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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49화 (49/470)

제49화

49화

“산본의가의 가주와 대공자는 어쩌고 있느냐.”

“겉으로 보기에는 별다른 것이 없습니다. 특히나 대공자는 나이가 어린데도…….”

심복은 말을 하다가 가주의 눈초리를 받고 입을 다물었다.

지금 적을 칭찬하는 거냐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죄송합니다. 가주님.”

“간 김에 혈겁을 해 버리고 올 걸 그랬어. 감히 제선문을 봉문시키다니. 그 뒤에 우리가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야. 건방진 북리세가 놈들!”

가주는 화를 참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더니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달라질 것이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 돌아갈 것이야. 조급해할 것 없다. 이제는 더 이상 감히 본가의 이름을 함부로 지껄이는 놈이 없을 것이다. 북리세가가 어떤 꼴이 되는지 보면, 그리고 산본의가가 어떻게 되는지 보면 멍청한 놈들도 깨닫는 것이 있겠지.”

“그럴 것입니다. 가주님. 본가에는 무궁한 영광만이 함께할 것입니다.”

심복은 가주에게서 더 이야기가 나올까 하며 잠시 기다리다가 조용히 물러났다.

백혈검 남궁도는 가주전에서 나와 자신의 처소로 가려다가 길을 틀었다.

뇌옥에 가서 죄인들을 보기 위한 심산이었다.

뇌옥에 갇힌 수많은 사람을 지나 가장 깊은 곳으로 향하자 갇혀 있던 이들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제발 꺼내 달라고 소리를 질렀고 그때마다 그들을 묶은 쇠사슬이 요란하게 부딪치며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남궁도는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빛도 들지 않고 바람도 통하지 않는 비좁은 방.

그 안에 두 남자가 갇혀 있었다.

한 아이는 남자라고 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아주 어렸다.

그러나 두 손목이 잘려나갔는데도 얼굴 한 번 찌푸리지 않은 아이였다.

산본의가의 가주와 대공자는 손목을 잃었다.

그 손 중 하나는 북리세가에 보냈고 남은 것도 나중에 그런 식으로 써먹기 위해 남궁세가의 가주가 가지고 있었다.

손이 잘려나간 곳에서는 분수가 터지듯 엄청난 양의 피가 솟구치고 그 후로도 줄줄 흘렀다.

그대로 가만히 놔두면 출혈 때문에 죽음에 이를 것 같았는데 그것이 가주의 뜻이었는지 치료를 하지 못하게 했다.

남궁도는 안으로 들어가 피웅덩이 속에 잠긴 두 사람을 보았다.

급격히 한기가 들 텐데 피에 젖어 한층 더 할 터였다.

두 사람의 몸이 떨리는 것 같기도 했지만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무인이 아니었고 자기 자신을 지킬 방법도 없었다.

그런데도 의연했다.

보통의 사람들은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혐오감이 일어날 정도로 삶에 집착하고 겁에 질린 모습을 보이곤 하는데 그들은 달랐다.

수많은 죽음을 가까이에서 목도한 무인이라고 해도 자기 죽음을 직접 맞아들이는 상황에서는 이렇게 의연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믿기지 않는 의지로 버티고 있었다.

“너희는 오늘 이 자리에서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에도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본의가의 가모는 죽지 않았다. 하지만 배 속에 있는 아이는 죽었을 거다. 그러니 납작 엎드려서 살 것이지. 그렇게 했다면 굶어 죽지는 않은 채 가족이 오순도순 살 수는 있지 않았겠느냐.”

남궁도는 자기가 왜 그 자리에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건지 알지 못했다.

북리의천의 제자에 대한 소문 때문일까.

아니면 북리의천이 두려워서 그런 것일까.

그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제 그들이 이곳으로 오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을 터였다.

준비는 완벽하게 마쳐져 있었다.

남궁세가의 모든 무인은 결사항전의 각오로 무장을 한 채 그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북리세가가 아무리 무인들을 모았다고 해도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그들보다 훨씬 많은 숫자가 남궁세가에 포진하고 있었다.

각 사람의 기량도 감히 북리세가 따위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독고세가에서 같이 나설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덜 떨어진 두 놈이 힘을 합친다고 뭘 하겠어.’

그는 잠시 두 사람을 보다가 밖으로 나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궁도는 정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꿈에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 * *

남궁세가의 위사들은 상상하지도 못한 광경이 벌어지는 모습을 보고 멍하니 서 있었다.

피할 틈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많이 잡아봐야 예닐곱 살이나 됐을까.

아니. 아직 그 정도는 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 조그만 아이가 말에서 몸을 날려 바닥으로 착지하더니 그대로 쇄도해 들어와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위사 한 사람의 얼굴 정면에 정통으로 주먹을 꽂아 넣었을 때 그게 무슨 일인지 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북리세가의 북리의천이다!”

뒤따라온 남자가 그렇게 외치기도 전에 그들은 북리의천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곧 북리세가에서 무인들을 거느리고 쳐들어올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불 속으로 뛰어드는 부나방과 조금도 다른 바 없는 모습이었는데 이상한 것은 그 모습을 보면서 떨림을 멈출 수가 없다는 거였다.

아이에게 맞은 사람은 뒤로 넘어가 즉사했다.

조그만 몸으로 어떻게 제 팔에 닿지도 않을 어른에게 그런 가공할 타격을 날린 건지 그것도 의아했다.

그러나 그 후에 이어진 연격을 보며 위사들은 아이를 결코 우습게 볼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북리의천의 목숨을 구해 준 어린 제자가 있다더니.

그 아이가 산본의가의 공자라더니.

사람들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이 뒤엉켰다.

야차를 건드린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그들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산본신의는 어디에 계시느냐!”

아진이 낮게 뇌까렸다.

그러나 누구의 입에서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어디에 계시느냐!”

대답 없는 사람들에게 오래 묻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물었고, 대답하지 않는 자들은 부숴 나갔다.

북리의천도 아진의 행보를 따랐다.

검을 빼 들고 산본신의가 있는 곳을 말하라 소리치고 대답하지 않은 채 머뭇거리는 이들의 허리를 양단했다.

검기가 작렬할 때마다 바닥에는 피 웅덩이가 생겨났다.

그렇지 않아도 준비를 끝마친 정예의 무력부대들이 곧바로 떨쳐 나왔지만 그들은 북리의천과 아진의 기세에 밀렸다.

설마하니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북리의천이라면 몰라도 그의 제자까지 그렇게 강하고 잔인할 거라고 상상한 이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누구 하나 말을 하지 못했다.

배신자로 낙인찍히는 순간 남궁세가는 물론이고 강호 어디에서도 자리를 잡을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과 무사로서의 자존감.

그것이 그들의 명을 재촉했다.

“어디에 계시느냐.”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아진은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그곳으로 말을 타고 오는 동안 마나가 다시 돌아왔다.

북리의천도 내공을 회복했다.

심법을 바꾸지 않았다면 그 시간 동안 내공을 회복하는 것은 어려웠을 텐데 심법을 바꾼 것이 적중했다.

말을 타고 달리면서 계속 내공을 쌓은 덕에 지금 그들은 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어디에 계시느냐!”

간격을 두고 주기적으로 울려 퍼지는 아진의 목소리는 소름이 끼쳤고 남궁세가의 무인들은 그 소리가 날카로운 예기를 가진 채 귀를 후벼 파고 마침내 심장까지 도려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말하겠소. 말하겠소!!”

누군가 소리쳤지만 그 말은 충분치 않았다.

아진은 그의 복부에 주먹을 꽂았고 뼈가 부러지며 남자의 숨통이 끊어졌다.

“말할 생각이면 그냥 말을 하면 된다. 어디에 계시느냐.”

아진이 그러는 동안 그의 품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아진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품에 감추어둔 작은 동물이 풀쩍 뛰어나오는 것 같더니 어느새 묵빛 구슬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구슬은 아진이 처리하고 간 무인들에게 내려앉아 남아 있는 진기를 허겁지겁 빨아들였다.

구슬은 자기가 나온 것도 모른 채 아진이 계속 전진하는 것에 조바심이 났는지 순식간에 진기를 빨아들이고 아진을 따라갔다.

“뇌옥…… 뇌옥에…… 외당 무사들이 머무는 전각을 지나서 반 각 정도를 가면 그곳에 뇌옥이 있습니다. 커다란 버드나무가 있는 곳에 보일 것입니다.”

누군가 소리치자 아진은 그대로 몸을 날렸다.

북리의천의 신형 역시 빠르게 사라졌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멈추지 않고 달렸다.

간혹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검을 겨누고 두 사람을 막으려 했지만 그들의 행로를 막으려는 자들은 북리의천이 처리했다.

그의 검이 비명을 토해낼 때마다 남궁세가의 무인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북리의천은 남궁세가의 검객들이 어느 수준인지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자신이 그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상대할 수 있을지 알지 못했다.

자신이 없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남궁의 무인들이 너무 쉽게 나가떨어지는 것을 보며 북리의천은 의아해했다.

괴물 같은 제자를 키우면서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알 틈도 없이 무섭게 성장해 있었는데 그때에야 그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먼저 가라. 아진아.”

“예, 스승님.”

아진이 몸을 날리자 몇 사람이 아진을 막으려 했지만 그때마다 여지없이 북리의천의 검이 날아들었다.

“막지 마라. 누구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

북리의천의 음성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북리의천이 회복했다는 말을 듣고도 그동안 반신반의하던 이들이 많았지만 그 순간 북리의천은 자신이 살아 있음을, 건재함을, 그리고 그전의 자신을 훨씬 뛰어넘었다는 것을 모두의 머릿속에 새겨넣었다.

수십 개의 검영이 각기 강기를 띠고 날아가 일시에 남궁의 무인들을 베고 사라졌다.

공기가 터져 나가는 소리가 아직 뒤에서 나고 있는 동안 북리의천은 빠르게 내달렸다.

‘아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는 무리 사이를 뚫고 달려가 육탄 공격을 감행하며 아진과의 거리를 유지해나갔지만 결국 사람들에게 붙잡혔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한 듯, 섬전대와 창천대가 동시에 덤벼들었다.

남궁세가의 최정예들인 그들이 합격을 가하며 설상가상 합격진까지 만들어 공격해 오자 북리의천은 잠시 발이 묶였다.

“버러지 같은 놈들!”

때로는 강한 의지와 정신력이 한계를 부수어 버리기도 했다.

북리의천에게는 그때가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자신과 제자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놈들.

그자들은 뚫어 버려야 하는 거대한 덩어리에 불과하게 느껴졌다.

북리의천의 검으로 내공이 사납게 날뛰며 들어갔다.

-스승님. 이건 꼭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제가 보기에 스승님은 형에 너무 얽매여 계신 것 같아요. 그게 오히려 스승님의 발목을 붙잡는 것 같고요. 그건 어차피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거잖아요? 스승님은 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것을 따라 하실 필요가 없어요. 스승님의 검을 휘두르면 더 강해지실 거예요.

언젠가 당과를 입안에 넣고 볼이 불룩 튀어나온 채로 아진이 했던 말이었다.

당과가 너무 커서 입이 다 다물어지지 않는 바람에 가끔 끈적한 침을 흘리면서.

그런 아이에게서 그런 소리를 듣고 있자니 기가 막혔었다.

북리의천이 아진을 자신의 목숨만큼이나 아끼지 않았다면 그때는 정말 아진을 나무라고 싶었을 만큼 울컥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제자가 스승에게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따끔하게 말을 하려고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그때 아진이 북리의천에게 조잘조잘 말을 하다가 당과를 떨어뜨리고 나라를 잃은 표정을 짓는 바람에 얼른 새 당과를 꺼내 주느라고 말을 하지 못했다.

그 이야기가 갑자기 지금 그 순간에 떠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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