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화
48화
그런 경공은 지금껏 구경해 본 적도 별로 없었다.
어디에서 나타난 건가 하며 짱돌이 고개를 들었을 때 죽립을 깊게 눌러쓴 남자가 검파로 죽립을 들어 올리며 짱돌을 보았다.
“북리세가에 사는 놈이냐.”
“…….”
짱돌은 엄청난 기세에 눌려 제대로 말을 하지도 못했다.
“내가 물었다. 북리세가에 사는 놈이냐.”
“그, 그…… 그렇습니다. 나으리.”
“이런 냄새나는 놈이 북리세가에서 뭘 하는지 모르겠군.”
그는 잔뜩 인상을 쓰며 짱돌을 노려보다가 말을 이었다.
“가주에게 전해라. 건방진 일은 이제 그만두라고 말이다. 그리고 이것도 함께 전하도록 해라.”
그가 보퉁이 하나를 짱돌 앞으로 던졌다.
짱돌은 옅은 색의 보퉁이가 얼룩져 있는 것을 보았다.
분명 핏자국이 말라서 생긴 거였다.
“지금은 그 안에 든 것이 전부지만 나중에는 어떤 것을 받게 될지 모를 거라고 말해라. 가주가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는 자라면 알아서 처신하겠지.”
그리고 남자가 바닥을 박찼다.
신형이 빠른 순간 사라졌지만 짱돌은 그것을 보고 있지도 않았다.
비룡채에서 가장 많이, 그리고 집중적으로 배운 것 중 하나가 각 세가의 무인들이 가지고 다니는 무기의 특징이었다.
무복도 당연히 외웠지만 신분을 감추기 위해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 경우는 있어도 수족 같은 무기는 쉽게 바꾸지 못하는 법이라며 채주는 무기를 외우도록 했다.
그것은 북리의천을 알아보지 못하고 덤볐다가 큰일을 치를뻔한 일 이후 채주가 열심히 가르친 거였다.
덕분에 짱돌은 죽립을 쓴 남자가 남궁세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짱돌은 태어나서 그렇게 빨리 달린 적이 없었다.
북리세가의 정문을 지키고 있던 위사들은 짱돌이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돌아오는 것을 보고 그가 뭔가를 두고 간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자기들끼리 웃었다.
“이 사람. 술 마실 생각에 들떠서 정신을 빼놓고 간 거야?”
웃으며 말하던 사람이 짱돌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을 알아차리고 경공을 전개해 그에게 달려갔다.
“무슨 일인가! 자네 왜 그러나. 응?”
“크, 큰일…… 큰일 났습니다. 남궁세가의 무인이 와서 가주님께 이걸 전해드리라고 했습니다. 이걸 먼저 전해 주십시오.”
그 말에 위사는 곧바로 보퉁이를 받아들고 가주전으로 향했다.
짱돌에게 더 들어야 할 말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어차피 짱돌도 곧 가주전으로 올 거라고 생각했다.
마침 가주가 가주전에서 나오고 있었고 그의 곁에는 북리의천과 독고소영, 그리고 아진이 함께 있었다.
“형님. 이렇게 다니시니 꼭 가족 같습니다.”
가주의 말에 북리의천도 기분 좋은 듯 웃음을 터뜨렸다.
“소영과 아진만 좋다면 나도 언제든지 이들과 가정을 꾸리고 싶다.”
다른 사람이 없는 자리라 북리의천이 가주에게 편하게 말을 했고 가주는 북리의천이 드디어 행복을 찾은 것 같다고 생각하며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위사가 달려온 것은 그때였다.
“가주님! 이걸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남궁세가의 무인이 이것을 가주님께 전해 드리라고 했다고 합니다.”
가주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보퉁이를 받아들었다.
위사가 설명을 하는 동안 짱돌이 허겁지겁 달려와서 자기가 들은 이야기를 모두 해 주었다.
그러는 동안 가주는 이미 보퉁이를 풀어 그 안에 든 것을 보고 있었다.
‘손이 아닌가…….’
그것은 손목 부근에서 잘린 손이었다.
누가 이런 짓을 했다는 말인가 하며 가주가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아진이 머리를 들이밀었다.
“가, 가주님…… 제가 그걸 볼 수 있을까요?”
아진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알아차리고 북리의천이 아진을 보았다.
“왜 그러느냐, 아진아.”
“아버지의…… 아버지의 손 같습니다. 제가 그걸 볼 수 있게 해 주세요.”
북리의천은 깜짝 놀란 얼굴로 손을 아진에게 보여주었다.
아진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헉……!”
아진의 말을 듣고 옆으로 와서 그 손을 본 짱돌 역시 그것이 산북신의의 손이 맞다고 말했다.
“그자가 어디로 갔습니까!”
아진이 노성을 발하며 소리치자 짱돌은 놀라며 뒷걸음질을 쳤다.
아진에게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모습이었다.
그런 생각을 한 것은 북리의천도 마찬가지였다.
아진은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여유를 잃지 않고 차분하게 상대를 묵사발로 만들고 징계하곤 했다.
이렇게 감정적으로 동요하는 것은 처음 보았던 것이다.
“아저씨!”
아진이 소리쳤지만 짱돌은 해 줄 말이 없었다.
“그건…… 그 사람이 워낙 순식간에 사라지기도 했지만 가주님께 이걸 전해드리는 게 더 급한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공자님. 제가 잘못 생각한 것 같습니다.”
아진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아진아!”
북리의천이 곧 그 뒤를 따랐고 독고소영 역시 사라졌다.
“…….”
가주는 짱돌을 다독이려고 하다가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건가 하며 무인들을 바라보았다.
“아진이 지금…… 아진이 초상비를 극성으로 펼친 것이 맞느냐.”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렇게 말을 했다.
설마하니 아진이 지금 허공답보를 펼친 것이라고는 그의 머리가 도저히 인정하지 못해서였다.
* * *
단전이 붕붕거리며 고통이 느껴졌다.
지금껏 마나를 아무리 끌어다 써도 그런 느낌이 든 적은 없었다.
허공답보의 구결을 외우고 초식을 이해하고서 그것을 해 본 적은 있었지만 반 시진 가까이 극성으로 펼친 것은 처음이었다.
아진은 북리의천이 자기를 따라올 거라고 생각하면서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기다려 줄 틈은 없었다.
“……!”
아진은 뒤늦게 아버지의 손을 떠올렸다.
고치더라도 그게 있어야 고치는데 지금 북리세가로 돌아가서 손을 가져오는 게 나을지 이대로 산본의가로 가는 게 나을지 결정을 못 하고 잠시 갈팡질팡했다.
그러다가 아진은 그대로 산본의가로 향했다.
단전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거세졌다.
이러다가 산본의가에 도착하기 전에 내공이 소진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버지의 손목을 잘라 버릴 정도라면 다른 사람들 역시 모두 남궁세가의 무인들에게 제압당해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늦을지도 몰라. 도착한다고 해도 아버지를 고치지 못할지도 몰라. 어머니는? 어머니는 괜찮으신 건가? 형은?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이야……?’
아진은 상상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자꾸 떠오르는 바람에 머리를 흔들었다.
허공답보의 구결을 알려주면서 북리의천이 내공의 소진이 극도로 많은 술법이라 자신은 웬만하면 펼치지 않는다고 말한 게 떠올랐다.
그것은 농담이었고 사실 북리의천은 허공답보를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아진은 조금 놀랐다.
그는 처음부터 그것을 하는데 조금도 무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대로 포기해야 하는 건가 했지만 이내 산본에 이르렀다.
허공답보를 배우지 못했다면 늦을 수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며 아진은 그대로 산본의가까지 향했다.
쓰러지더라도 어머니와 아버지를 본 후에 쓰러지겠다는 생각으로 그가 산본의가에 이르렀을 때 주위에 몰려있던 사람 중 누군가가 아진을 발견했다.
“공자님. 아진 공자님……!”
비룡채의 부채주였다.
그가 단숨에 달려와 아진을 붙잡고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가주님과 대공자님이 잡혀가셨습니다. 남궁세가 놈들이었습니다. 그건 분명합니다. 무복은 바꿔입고 있었는데 들고 있는 검은 남궁세가 무인들이 가지고 다니는 검이었습니다.”
“어머니는요?”
“가모님은 하혈을 하시고 쓰러지셨습니다. 그 찢어 죽일 놈들이 가모님의 배를 마구 검집으로 때려서…….”
부채주는 그 말을 전하는 것도 큰 죄인 것처럼 말했다.
그러는 동안 북리의천과 독고소영이 도착해 아진의 곁에 섰다.
그들은 아진이 허공답보를 펼쳐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도저히 믿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때때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 존재하는데 이번에야말로 그런 경우였다.
그들은 자기들이 할 수 있는 경공을 극성으로 펼쳐 쉬지 않고 와서 간신히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그것도 부채주의 설명이 길어져서 아진과 어긋나지 않은 거였다.
아진은 지금이라도 가서 어머니를 봐야 한다는 생각과 아버지와 도종을 구하러 가야 한다는 생각 사이에 갈등을 일으키다가 독고소영을 바라보았다.
“사고님. 어머니가 하혈을 하셨대요. 어머니를 지켜 주세요. 소은 누님이 계시면 치료를 하실 수 있을지도 몰라요. 꼭 어머니 곁에 계셔 주세요. 그놈들이 다시 올지도 모르고 잔당이 있을지도 몰라요. 스승님. 스승님도 여기에 같이 계셔 주세요.”
그러나 북리의천은 얘기를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결연하게 고개를 저었다.
“소영. 반드시 지켜라.”
“다녀와. 죽는 한이 있어도 지킬 테니까.”
독고소영은 그 말을 남기고 안으로 달려갔다.
그녀 역시 내공이 충분치 않은 상태였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여유가 없었다.
“결국 남궁세가구나. 그때 그렇게 덮어 두는 게 아니었다.”
북리의천이 말을 하고 바닥을 박차려다가 휘청거렸다.
쉬지 않고 내공을 너무 많이 사용하는 바람에 그에게도 무리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북리의천은 만약 아진이 그 사실을 안다면 혼자서 가겠다고 할 것 같아 자신의 상태를 숨기려 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내공이 소진된 것은 아진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다른 경우라면 아진은 자신의 한계 따위는 무시해 버리고 그냥 내달렸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남궁세가에 빨리 가는 것보다 최상의 상태로 가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가 말을 좀 가져다주세요.”
아진이 말했을 때 산본의가 안에서 북리세가의 무인들이 달려 나왔다.
그들은 온몸이 피투성이였는데 독고소영에게서 소식을 듣고 나온 듯했다.
“장로님. 아진 의원님. 죄송합니다.”
온몸에 성한 곳이 하나도 없이 적어도 수십 군데에 자상을 입고 피를 철철 흘리면서 그들은 용서를 구했다.
“아니에요. 제가 은혜를 입었어요. 그런데 말이 있으면 말을 빌려주세요. 무사님.”
아진은 얘기가 길어지려는 것을 막으며 말했다.
무인들은 곧 말을 가져다주었고 아진과 북리의천은 말을 탄 채 그대로 그곳을 떠났다.
두 사람이 탄 말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대지를 박찼다.
* * *
남궁세가의 깊은 곳.
세상이 남궁세가를 설명하기 위해 가져다 붙이는 온갖 수식어들은 여전히 유효했다.
가주는 멀리 시선을 둔 채 충복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가모라는 여자도 죽이지 그랬느냐. 그렇게 성정이 모질지 못해서야. 그런 일에서는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는 것이 좋다. 차라리 그렇게 하는 것이 좋았을 거야. 가모와 태아를 같이 죽였다면 훨씬 더 효과가 좋았을 텐데 아쉽군. 가주의 손 대신 태아를 꺼내 그것을 싸서 보냈으면 더 좋았을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가주는 끔찍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면서 음산한 웃음을 지었다.
그의 심복도 웃음을 지으며 다음부터는 명심하겠다고 말했다.
“다음이라. 나는 그런 말을 아주 싫어한다. 내 곁에서 머문 시간이 짧지 않았는데도 그런 소리를 하는군. 나는 지금 너를 질책하는 중이다.”
“……죄송합니다. 가주님.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 다음에도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지.”
가주가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