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화
47화
북리세가의 내부에는 여전히 의방이 생기지 않았다.
사람들은 다치거나 몸이 아플 때마다 외부의 의원을 찾아가 치료를 받고 왔고 북리의천은 웬만하면 아진을 귀찮게 하지 못하도록 했다.
아진이 북리세가에 온 것은 무공을 배우기 위함이었는데 아진에게 자꾸 이런저런 일을 떠맡기면서 가르침을 게을리하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진은 도저히 그 나이 또래의 실력으로는 볼 수 없는 성취를 보였고 그럴수록 북리의천과 독고소영은 더욱 의욕이 넘쳤다.
“어쩜 저렇게 의젓할까. 참. 산본의가의 가모님 산달이 가까워졌겠다. 아진이도 가 보고 싶겠어. 언제쯤 갈 거야?”
독고소영이 물었을 때 북리의천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직 두 달 정도 남은 것 같기는 했는데 아이가 두 달에서 석 달까지도 빨리 나올 수 있는 일이라 북리의천은 조만간 가 봐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때 하인이 오더니 산본에서 손님이 왔다는 말을 전했다.
“산본에서? 혹시 가모님께 산통이 시작됐다고 하더냐.”
북리의천이 놀라며 묻자 하인이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장로님. 약방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아진이 그 말을 듣고 그들에게 다가왔다.
“약방요? 혹시 비룡채라고 하던가요?”
“비룡채요? 그런 말은 없었고 산본의가에 약초를 대주는 약방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짱돌 아저씨인 것 같아요.”
아진은 먼저 말을 하고 정문 쪽을 향해 달렸다.
그러자 정문 안으로 들어와서 잔뜩 긴장한 채 안을 기웃거리던 비룡채의 산적 짱돌이 아진을 알아보고 환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잘 찾아왔네요. 공자님. 여기까지 와도 안에 들여보내 주지 않을 것 같아서 고민했는데 이건 공자님이 꼭 보셔야 할 것 같아서 와 봤어요.”
그러면서 갑자기 아진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주위를 곁눈질로 살피고 아진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짱돌은 다 죽어가는 자신을 살려준 아진을 잊지 않고 있었고 아진이 준 약초제서 한켠에 그려져 있던 영초들을 주의 깊게 보며 특히 그런 것들을 캐려 애썼다고 말하더니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영초요? 설마…… 설마 정말 책에 나와 있는 영초를 캐셨다고요?”
남들 모르게 아진에게만 말을 하려던 짱돌의 노력은 아진이 놀라서 큰 소리로 영초 얘기를 하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갔다.
짱돌도 그때부터는 자기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듯 편하게 말을 했다.
“네. 이런 건 뽑고 나서 바로 먹어야 더 효과가 좋을 것 같아서 가지고 왔지요. 소문이 나도 안 될 것 같고 이게 영초라는 걸 아는 사람이 생기면 욕심이 생길 것 같아서요. 산적 일을 그만두고 그동안 약방을 같이 운영하면서 굶지 않고 소소하게 잘 살아오고 있었는데 영초를 캐고 나니까 그런 게 다 걱정이 돼서요.”
“우선 보여 주세요.”
“네, 공자님!”
그러면서 짱돌이 봇짐을 풀더니 그곳에서 천에 싸인 것을 소중하게 꺼냈다.
북리의천도 숨을 죽인 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영초라는 말을 듣고 주위의 무인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슬금슬금 가까이 다가왔다.
아진도 기대에 부푼 채 천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제 생각에는 인형설삼이 틀림없습니다.”
“인형…… 설삼요?”
아진이 눈이 동그래진 채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인형설삼이라면 내공을 급진적으로 증진시키는 효과가 있다는 영초가 아닌가.
그 말에 경내에 있던 모든 사람이 숨소리조차 죽인 채 짱돌의 손만 바라보았다.
짱돌은 마침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그것을 들어 보였다.
“…….”
“이게…….”
“인형…… 설삼?”
사람들은 그것을 뚫어지라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형설삼을 직접 보지는 못했어도 얘기는 숱하게 들었는데 왠지 그것과는 다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던 것이다.
짱돌은 이제 사람들이 놀라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며 잔뜩 기대에 부풀었다가 아진을 보았다.
“공자님…… 아닙니까?”
“……아닌 것 같은데요? 책에 나온 것하고도 조금 다른 것 같은데요. 아저씨?”
“네? 아닙니다. 분명히 이렇게 그려져 있었어요.”
짱돌은 품속에서 종이 몇 장이 꼬깃꼬깃 접힌 것을 꺼냈다.
“책이 한 권이고 그걸 혼자만 가지고 있을 수는 없어서 영초는 제가 따로 보고 그려서 가지고 다녔거든요. 계속 보면서 머릿속에 새겨 놓으려고요. 이거 맞잖아요. 공자님.”
그가 펼친 종이에는 상당히 주관적인 재해석이 많이 들어간 인형설삼이 그려져 있었다.
어딘가 좀 포동포동하고 통통하고 짧고 몽땅한 것이 꼭 짱돌이 들고 온 무처럼 생기기는 했다.
“내 눈에는 특이하게 생긴 무처럼 보인다만…….”
모두가 생각하면서도 차마 말하지 못하고 있던 것을 북리의천이 말했다.
그러자 짱돌의 얼굴이 빠르게 흙빛으로 변해 갔다.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이거면…… 이거면 공자님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겠다 싶어서 그 길을 달려왔는데. 이게 어떻게 무인가요? 여기에 그려진 인형설삼이랑 똑같지 않습니까?”
짱돌은 종이를 들어 보이며 서운함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그래. 여기에 그려진 것과는 비슷한 것 같구나. 그런데 내 생각에는 네가 이걸 옮겨 그리는 과정에서 조금 차이가 생겨난 것 같다만…….”
북리의천은 미안한 마음으로 말했다.
아진은 조마조마하며 기대했던 것이 결국 무로 판명 나자 아쉽기는 했지만 그래도 짱돌의 마음을 알 수 있어서 기뻤다.
짱돌의 눈꼬리에 눈물 몇 방울이 맺히더니 결국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으어어어……!!”
그는 서럽게도 울었다.
북리의천은 왠지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가진 것은 없는데 고마운 마음은 헤아릴 수 없이 커서 어떻게든 갚으려고 심산을 해치고 돌아다녔을 것이다.
그러다가 심산에서 무를 발견하고 그게 인형설삼이라고 생각하면서 좋아했을 짱돌의 모습이 선했다.
그놈의 무는 왜 하필 그런 깊은 산속에서 자라서 사람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한 것일까.
“아저씨. 그런데 아저씨는 그런 곳에 가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아저씨는 다른 사람들이랑 달라서 약한 타격으로도 내출혈이 일어날 수 있다니까요?”
아진이 말하자 짱돌은 더욱 서럽게 울었다.
“그래서. 흑. 조심해서. 흑. 다녔는데. 으어어어헉! 세상에. 내 인형설삼. 내 인형설사아암. 아닌데. 책에 나온 거랑 똑같은데. 으어어엉!!”
아진은 마음이 흐뭇했다.
인형설삼을 받은 것보다 더 기분이 좋았다.
“아저씨. 기왕 여기까지 오신 김에 앞으로 저한테 시침하는 법도 배우고 진맥하는 법도 배우고 세가에서 머무시면 어떠세요? 세가에 지금 의원이 없는 상태거든요.”
말을 해 놓고 그런 걸 자기가 혼자 결정할 게 아니라고 생각한 듯 북리의천을 보자 북리의천이야말로 좋은 생각이라고 여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좋은 생각이다. 아진아. 짱돌은 약초에는 이미 빠삭하지 않으냐. 약초의 효능에 대해서도 잘 알고 말이다.”
그러다가 북리의천이 혹시나 하는 얼굴로 그 종이를 일단 좀 보자고 말했고 짱돌은 수백 번을 만지작거려서 구겨지고 찢긴 종이를 내밀었다.
접힌 부분은 닳아서 잘 보이지도 않았는데 거기에 그려진 것은 영초들뿐이었다.
“그럼 여기에 없는 건 아진이가 준 책을 보고 채취한 게 맞는 거지? 그 약초들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거지?”
“물론입니다. 나으리. 다른 약초들은 지금까지 틀린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눈을 감고 가려내라고 해도 가려낼 수가 있습니다.”
그가 자신 있게 말했고 북리의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여기에 머물러 주게. 우리에게는 자네 같은 사람이 꼭 필요하네.”
“저…… 저는 산본의가에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인데요?”
자신감이 대단했다.
다른 사람들도 짱돌이 재미있다고 여긴 듯 편안한 얼굴로 모여들었다.
“거기에는 자네 말고도 훌륭한 약초꾼들이 많은 것 같으니까 여기서 우리를 치료해 줘. 금창약을 만드는 법만 알아도 크게 도움이 될 텐데.”
대주가 말하자 짱돌이 고민하는 얼굴로 아진을 보았다.
“정말 그러는 게 좋을까요?”
“네. 아저씨. 아저씨는 과격한 움직임은 피하는 게 좋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하세요.”
“인사도 안 하고 왔는데 큰일 났네. 그런데 금창약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짱돌은 어떻게 그런 것도 모를 수가 있냐는 듯이 말하며 금방 울음을 그쳤다.
“약방에 약초가 다 있는지 모르겠네. 저는 그러면 가주님께 인사를 드리고 바로 일을 시작하면 되나요?”
짱돌이 말하자 어느덧 그 주위에 끼어서 구경하던 총관이 자기와 함께 가자며 짱돌을 데리고 갔다.
그가 떠난 자리에 통통한 무 하나만이 오도카니 남아 있었다.
잘못한 것도 없이 다 큰 남자를 대성통곡하게 만든 무는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고 아진은 그 무를 들고 웃었다.
뭐라고 정확하게 설명을 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런 것들이 모두 보상 같았다.
이제는 힘이 들 때 술 한잔하자고 말할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려면 일단 자라서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되기는 해야겠지만 아진은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 * *
짱돌이 북리세가에 자리를 잡은 후 한 달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사람들은 이제 짱돌과 제법 친해졌고 짱돌은 무인들에게 약초에 대해 알려 주며 몸이 아픈 사람들이 있으면 그것을 달여먹게 했다.
큰 병이 생기기 전에 짱돌이 미리 알고 그런 것들을 알려 주자 세가 무인들은 점점 짱돌의 덕을 보고 있었다.
짱돌은 인근에 있는 약방에 몇 가지 약초를 구해 놔 달라고 말을 해 둔 상태였고 그날은 그것을 가지러 가기로 한 날이었다.
“총관 어른.”
그가 약초를 사 오려고 총관을 찾아가자 총관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전낭을 내주었다.
“자네가 와서 사람들을 미리 치료해 주면서 큰 병치레를 하는 사람이 없네. 가주님께서도 몇 번이나 자네 칭찬을 하셨어. 약초를 사고 남은 돈은 술이라도 사서 마시게.”
“고맙습니다. 총관 어른. 고맙습니다.”
짱돌은 사람들이 자기를 인정해 주는 것이 기쁘면서도 아직 현실감이 나지 않았다.
비룡채의 산적이었던 그는 무림인들에 대한 경외감이 있었다.
무림인들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할 정도로 무서운 사람들이었는데 그런 무림인들이 득시글거리는 곳에 와 있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을 때가 있었다.
‘이럴 게 아니라 얼른 약방에 가야지.’
좋은 약초가 들어왔으면 좋겠는데 이곳의 약방은 영 시원치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한 번 산본에 가서 약초를 몽땅 뜯어오거나, 그게 어렵다면 비룡채 사람들이 뜯어온 약초를 사 오고 싶었다.
‘오늘은 좋은 게 있어야 할 텐데.’
그런 생각으로 걸음을 서두르는 동안 북리세가 무인들이 그를 보고 아는 척을 했다.
“약방에 가나?”
“예. 무사님.”
“그래. 조심해서 다녀와. 나간 김에 술이라도 한잔 마시고 와.”
전에 짱돌에게 약초 달인 차를 얻어 마시고 차도를 본 적이 있던 무인이 철전을 주었다.
“아이고.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총관 어른이 이미 주셨는걸요.”
“총관 어른이 주신 건 총관 어른이 주신 거고 이건 내가 주는 거니까 받아. 은자가 아니고 철전이라고 안 받는 거면 모르지만.”
“아이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정문을 나설 때는 그렇게 받은 철전이 꽤 두둑해졌다.
‘주머니도 무거워졌겠다. 좋은 약초가 많으면 좋겠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짱돌이 한참 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아무도 없던 곳에 갑자기 한 남자의 신형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