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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46화 (46/470)
  • 제46화

    46화

    그들은 강호의 명숙들을 몰래 습격해서 죽인 경험이 많았다.

    긴장을 풀고 방심하고 있다가 당하는 것은 아무리 초고수라고 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들은 서로 전음을 보내며 다음 목표를 향해 자리를 옮겼다.

    제선문의 살수들이 노린 곳은 내원이었지만 그곳으로 가는 도중 무인들을 발견했고 살수들은 그 자리에서 무인들을 향해 암기를 날렸다.

    침을 잔뜩 넣어 피리처럼 부는 형식이었는데 지금껏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무기였다.

    그들이 각자 침통을 꺼내 훅 불어 침을 날리자 무인들이 투두둑 바닥에 쓰러졌다.

    ‘정말 별것도 아니군.’

    제선문의 살수들은 이렇게 늦게 온 것을 후회했다.

    북리세가에 대해 그동안 너무 많은 소문이 돌아서 전력을 판가름하기 위해 신중을 기했던 것인데 그러는 동안 제선문의 평판은 끝도 모르게 추락했다.

    이번에 나선 것은 북리세가의 가주가 최후통첩을 해서였는데 그때도 의견은 분분했다.

    하지만 더 이상 북리세가에서 함부로 떠드는 것을 놔두고 볼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 이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결국 이번 살수행을 감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무인들이 바닥에 쓰러지자 살수들은 어둠 속에서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복면 위로 드러난 그들의 눈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내원으로 향한다!]

    수장이 전음을 보내자 모두 고개를 숙여 보이고 한 몸처럼 움직였다.

    그러나 그들은 채 내원에 당도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섰다.

    “……!”

    눈앞에 나타나 그들을 가로막은 사람은 북리의천이었다.

    ‘우리 기척을 알아차렸을 리가 없을 텐데……?’

    살수들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북리의천을 노려보았다.

    살수의 가장 큰 이점은 상대가 방심한 틈을 노려서 기습을 감행한다는 거였다.

    일단 존재를 들키고 나면 그때부터는 끝이 어떻게 될지 누구도 장담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상대가 북리의천이라면 더더욱 비관적이었다.

    거기다 설상가상, 독고소영까지 같이 모습을 드러냈다.

    살수들의 입에서 작은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제선문의 문주는 말이 통하는 자가 아니군. 그렇다면 우리도 할 말이 없다.”

    북리의천이 말하자 바닥에 쓰러졌던 북리세가의 무인들이 하나둘씩 일어섰고 살수들은 순식간에 그들에 의해 포위되었다.

    누군가 도망치려고 바닥을 박찼지만 북리세가의 무인이 한 발 더 빨랐다.

    “그래서야 쓰나.”

    무인들의 검이 날카롭게 대기를 갈랐다.

    슈각-!

    희롱이라도 하는 것처럼 검 끝이 복면을 가르고 지나가자 살수들의 얼굴이 드러났다.

    “놀아보자고 온 것 같은데 우리도 제대로 대해 주겠다.”

    북리의천이 싸늘한 얼굴로 말하자 살수들은 오금이 저리는 것을 느꼈다.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 방대하고 압도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너희의 잘못이다. 누구도 원망하지 말아라.”

    북리의천이 말하자 북리세가의 무인들이 검을 휘두르며 날뛰었다.

    살수들은 북리의천이 의도적으로 뒤로 물러섰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린 새끼에게 사냥하는 법을 가르치려고 그 자리를 내주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살수들은 서로 눈길을 보냈다.

    이곳에서 붙잡힌다면 조직의 비밀을 누설하지 말고 차라리 자결을 하라는 신호였는데 그들은 애초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

    무인들의 검은 단호했고 미처 자결할 틈도 주지 않은 채 목을 베어나갔던 것이다.

    서걱-.

    서걱-.

    서늘한 소리가 대기를 수놓았다.

    북리의천은 뒤늦게 입을 열었다.

    “한 놈은 살려두어라. 제선문에 소식을 전할 사람이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무인들은 잠시 주춤하더니 결국 한 사람을 남기고 모두 베어 쓰러뜨렸다.

    홀로 남은 살수는 바들바들 떨면서 고개를 들었다.

    모든 게 속임수였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러면…… 뇌옥에 갇혔던 자들도…….”

    그의 말에 북리의천이 웃었다.

    “그자들은 네놈들이 죽여 놓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북리의천은 무인들에게 고갯짓으로 신호를 보내고 그곳을 떠났다.

    의욕적인 살행이 그렇게 허망한 끝을 맞이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살수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입술을 떨었다.

    * * *

    아직 여명이 채 세력을 키워나가기도 전에 북리세가에서 한 남자가 정신없이 서두르며 떠났다.

    제선문의 살수였다.

    그가 전해야 할 소식은 명료했다.

    ‘남궁세가와의 관계를 밝히고 봉문하라. 그렇지 않으면 멸문을 당할 것이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제선문의 문주는 멋대로 조건을 선택했다.

    봉문을 결정했지만 남궁세가와의 관계를 밝히지는 않았던 것이다.

    * * *

    제선문을 봉문하게 하고 북리세가의 위명은 더욱 높아졌다.

    그동안 제선문의 위세에 굴복하고 의술을 포기했던 개인 의료원들이 속속 문을 열었다.

    제선문이 봉문하며 지부들 역시 일제히 문을 닫았는데 개인 의료원들 때문에 의료 공백은 크지 않았다.

    “이제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가주님.”

    자리에 모인 북리세가의 무인들은 남궁세가에 대한 대응 방안을 놓고 가주의 의견을 물었다.

    가주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북리의천에게 향했다.

    북리세가에서 제선문을 강제로 봉문시킨 이상 남궁세가가 가만있지는 않을 거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남궁세가가 어디이던가.

    강호 제일의 검이라고 하면 누구든 남궁세가의 고수들을 꼽았다.

    정사마가 서로 대립할 때 정파 무림의 대표로 나서서 전장을 평정하던 이들이 남궁세가의 검객들이었다.

    당장 무림 십이성 중 여섯 명이 남궁세가의 사람이었고 무림맹에서도 중책을 차지했으며 강호의 오랜 역사 속에 오대 명문 세가의 수장 자리를 놓친 적이 없는 그들이었다.

    제선문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남궁세가는 북리세가라고 해도 결코 쉽게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북리의천은 자신을 향한 시선을 알고 있었지만 대답을 서두르지 않았다.

    답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불가피한 싸움이 아니라면 정파 무가끼리 일을 크게 만들지는 말라며 무림맹의 총군사인 제갈세가 태상가주가 다녀간 것이 며칠 전의 일이었다.

    겉으로는 중재를 하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북리세가가 중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무림맹 전체와 척을 지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을 흘렸다.

    그것은 명백한 협박이었고 가주는 이제 결정을 내려야 했다.

    “지금은 넘어가더라도 이번 일을 잊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세가의 힘을 키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본가가 다른 가문과 연합할 필요 없이 남궁세가를 응징할 수 있었다면 오늘날 이런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니 말입니다.”

    모두가 북리의천의 말에 동감했다.

    뼈아픈 일이었다.

    제선문을 봉문하게 했으나 남궁세가의 죄를 묻지는 못하고 넘어감으로써 그들은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

    절반의 성공을 영예롭게 생각한 이는 북리세가에 아무도 없었다.

    * * *

    두 번의 계절이 바뀌는 동안 아진은 훌쩍 자라 있었다.

    그래 봐야 이제 겨우 여섯 살이었지만 북리의천은 아이가 자라는 것이 정말 신비롭다는 생각을 한두 번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연무장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아진을 흡족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소영이 알려 준 거야?”

    “응.”

    북리의천은 지금 아진이 펼치고 있는 것이 독고세가의 직계에게만 전수되는 비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북리의천이 입을 벌리고 뭔가 말하려 하자 독고소영이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안 들켰잖아. 들키면 그때 가서 걱정할 거야. 그리고 의천이 아버지께 말씀드리지 않으면 들킬 일도 없어.”

    그 말에 북리의천이 웃음을 터뜨리다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제자는 힘들게 수련을 하고 있는데 자기들은 그늘에 앉아 편안히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는 게 미안해서였다.

    “그런데 소영. 저 초식이 원래 저렇게 연결되는 거였어?”

    “당연하…….”

    당당히 말을 하려던 독고소영이 아진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진이 왜 저러지? 처음에 알려줬을 때는 잘 따라 했는데. 그사이에 잊어버린 건가?”

    그러나 북리의천은 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초식이나 구결을 잊어버린 거라면 내공의 흐름이 그렇게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저 녀석. 뭔가를 또 깨달은 모양이군.’

    결국 독고소영도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설마……?’

    독고세가의 비전이 아진의 손에서 새롭게 변형되고 있었던 것이다.

    독고소영은 아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저 초식을 저렇게 생략해도 되는 거라고? 하지만 어떻게……?’

    아진은 확신이 없는 듯 목검을 움직이며 같은 동작을 반복하더니 어느 순간 웃음을 지었다.

    고개를 끄덕인 후, 아진은 더욱 확신에 찬 채 검을 휘둘렀다.

    독고소영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지금 같은 경우에 아진을 방해하는 것이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생각할 틈도 없었다.

    가주도 그 끝을 보지 못한 검술의 진수가 아진의 검 끝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말도 안 돼…….’

    독고소영은 고개를 저었다.

    초식이 잘못됐다고 도저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야말로 정수였고 시초였고 모든 것이었다.

    북리의천은 독고소영이 느끼는 감정을 고스란히 이해할 수 있었다.

    어린 제자가 그러는 것이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때마다 매번 놀라게 되는 것은 두 사람의 숙명인 듯했다.

    아진이 마침내 검을 내렸을 때가 되어서야 독고소영은 아진에게 달려갔다.

    “아진아. 왜 그 초식을 줄였어?”

    “아아. 오히려 내공의 흐름을 방해하는 것 같아서요. 처음에는 왜 이 불편한 초식을 끼워 넣은 건가 했는데 이걸 빼고 보니까 몇 가지 문제가 생기더라고요. 이 검법을 창안하신 분은 이걸 해결하려고 그 초식을 일부러 넣으신 것 같은데 그건 꼭 그렇게 해결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요.”

    그러면서 아진은 자기가 깨달은 것을 천천히 해 보였다.

    독고소영은 아진의 시범을 보면서 그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 말을 이해했다뿐이지 아진이 하는 것을 똑같이 해내지는 못했다.

    아진이 말한 초식을 빼면서 독고소영은 그가 설명했던 바로 그 문제에 봉착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아진이 제시한 방법이 꿈이나 허상과도 같은 거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것을 너무 간단히 해내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설명을 해 주는 아진을 보면서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건 너에게나 쉬운 거라고 말을 해 주고 싶었지만 독고소영은 그냥 웃어 버렸다.

    “나중에 본가에 가면 그걸 보여 드리자. 다들 놀라실 거야.”

    그 말은 사실이었다.

    가문의 비전을 전수했는데도 독고세가의 가주는 화를 내기보다 오히려 독고소영을 북돋우며 뭐든 아끼지 말고 아진에게 정성을 기울이라고 말을 해왔다.

    멸문에 이를 수밖에 없던 가문에 베푼 은혜를 그들은 결코 잊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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