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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45화 (45/470)

제45화

45화

아진은 침을 날려버리고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팔이 아픈 듯 짤짤 흔들어댔다.

“그렇게 하는 거래요. 그러니까 그런 것만 대비하시면 될 거예요.”

아진은 처음에 하려던 말이 그거였다는 듯이 말해 주었다.

“그래…… 그렇구나…….”

북리의천과 독고소영은 이제 놀라는 것도 지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렵지는 않지요. 스승님? 세가 무인들에게 제가 시범을 보이는 게 좋을까요?”

“그래. 아진아. 부탁해야 할 것 같구나. 우리 중에는 너처럼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말이다.”

“네. 그러면 침을 더 많이 만들어야겠네요. 북리세가에 훌륭한 야장님이 계셔서 다행이에요.”

“그래. 말이 나온 김에 그 사람에게 찾아가서 격려를 해 줘야겠다.”

그날 이후, 북리세가의 공방에서는 수도 없이 많은 침이 만들어졌다.

야장은 자기가 그렇게 많은 침을 만들게 될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아무리 만들어도 그만하라는 말이 없었다.

힘이 들어서 조금이라도 쉬어 볼까 생각을 하면 어느샌가 북리의천이 와서 수고한다고 말하는 바람에 야장은 더 이상은 못하겠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저…… 의원님. 침을 한 번 사용하면 다시는 사용을 할 수가 없게 되나요?”

야장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아진에게 물었다.

“아뇨?”

“그렇죠? 그럼 침을 계속해서 만들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요?”

“네.”

답이 애매해서 네, 라는 말이 그렇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확실치가 않았다.

그래도 야장은 확실히 하고 가야 한다고 생각하며 아진을 보았다.

“의원님?”

“네.”

그러나 아진은 야장이 왜 그렇게 간절하게 자기를 부르는지 알면서도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가지 않았다.

아진에게는 노리는 바가 있었다.

물론 침은 어느 정도만 있으면 되기는 했다.

북리세가의 무인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침통 가득 침을 꽂아서 날린다고 해봐야 사용되는 침이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진은 침통을 이용해 공격을 하면서 산본의가 사람들을 떠올렸다.

무공을 하지 못하는 그들에게 이것은 정말 좋은 무기가 되어줄 듯했다.

조작이 어렵지도 않고 늘 가지고 다녀도 되는 것이라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진은 북리세가의 무인들을 훈련시키는 게 끝나면 그걸 전부 산본의가에 가져다줄 생각을 하면서 야장에게 이제 됐다는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야장 옆에 오래 있으면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다는 생각에 아진은 공방을 나섰다.

‘어머니는 잘 계시려나 모르겠네. 내 동생은 잘 자라고 있으려나? 가 보면 좋겠는데…….’

아진은 문득 그들이 그리워서 걸음을 멈춘 채 생각에 잠겼다.

‘아니야. 한 번 오고 가는 데 걸리는 시간도 긴데 생각날 때마다 가다가는 수련할 틈도 없겠다. 내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내가 정신 차려야 내 아우가 태어날 때 산본의가가 번듯해지지.’

아진은 동생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졌다.

가슴 언저리가 간지러워지는 것 같았다.

원래 아진은 작고 귀여운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사실은 자기가 그런 걸 좋아했는지 자신에 대해 알아볼 틈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동생은 귀여울 것 같았다.

‘형님, 형님하고 쫓아다니겠지? 혼자 걷지도 못하고 일어서지도 못하고 나를 붙잡고 일어서려고 애쓰겠지?’

아진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동생 생각에 헤벌쭉 웃었다.

‘내려놓지 않고 계속 업고 다녀야지. 엄청 예뻐해 줘야지. 사 달라는 게 있으면 다 사주고. 뭘 좋아하려나?’

생각을 해 봤자 당과 정도밖에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여기가 아니고 현대 세계라면 맛있는 걸 정말 많이 사 줄 수 있었을 텐데.

장난감도 정말 많이 사 주고 재미있는 곳도 자주 데리고 갔을 텐데.

‘이름은 뭐가 될까? 우리가 도종이랑 도진이니까 도원? 도혁? 도원이면 아원이라고 부르게 되나?’

한 번 떠오른 생각은 계속 꼬리를 물었다.

아진의 손에는 손가락으로 다 모이지 않을 만큼 수북하게 침통이 들려 있었다.

아버지와 도종에게도 주고 의원과 의생들에게도 줄 터였다.

의녀 중에서도 금방 익히는 사람이 나올지도 몰랐다.

‘누가 익히게 될지 모르니까 일단 다 가져다주기는 해야지.’

북리세가에는 세가 내에 공방이 있어서 이런 걸 필요할 때마다 바로바로 만들 수가 있지만 산본의가는 사정이 달랐다.

침이 필요할 때마다 대장간에 가서 부탁을 해야 했는데 대장간에서는 바가지도 많이 씌우고 대장장이의 실력이 떨어졌다.

그러면서도 자존심만 세서 자기가 최고인 줄 알고 있었다.

‘침만 달라져도 진료하는 게 훨씬 쉬운데.’

아진은 침을 보다가 이럴 게 아니라 우선 어느 정도는 미리 산본의가에 보내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며 북리의천을 찾아 갔다.

북리의천은 새로 생긴 무력부대의 대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아진이 오는 것을 발견했다.

“아진이구나.”

그때까지 깐깐하게 부대의 상황을 보고받고 대주들을 질책하던 북리의천의 표정이 눈 녹듯이 녹아내리자 대주들도 다행으로 여겼다.

북리의천의 심기가 불편하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아진을 찾게 됐다.

아진이 있어야 북리의천을 달랠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스승니이임.”

희한했다.

부탁할 게 있으면 부르는 소리가 길게 끌렸다.

북리의천도 아진이 그런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아진이 자기에게 부탁할 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기분이 좋았다.

“그래. 아진아. 무슨 일이냐?”

그는 다가오는 아진을 향해 자연스럽게 두 팔을 벌렸다.

“스승님. 제선문의 살수들을 대비한 훈련이 끝나면요. 이 침들을 산본의가에 가져다줘도 돼요?”

그러자 북리의천이 멍한 표정으로 아진을 보았다.

“아진아. 정말 그렇겠구나. 거기는 마을이 작아서 이런 물건을 만들어 줄 실력 있는 야장이 없을 텐데. 내가 미리 생각을 해야 하는데 그랬구나. 침은 비단 무기만이 아니라 의료 기구지 않으냐. 좋은 침이 있으면 훨씬 도움이 될 텐데. 내가 생각이 짧았다. 당장 그렇게 하자. 사람을 보내 마.”

북리의천은 아진을 내려놓지 않은 채 산본의가로 보낼 사람을 찾았고 대주들은 각자 자기들의 부대에 있는 사람 중 경공 실력이 뛰어난 사람을 추천했다.

그렇게 추천을 받은 사람 중에 더 경공을 잘하는 사람이 북리의천의 명령으로 침을 가지고 산본의가로 향했다.

아진은 그걸 받은 아버지와 도종이 얼마나 기뻐할까 하면서 들뜬 마음으로 세가를 돌아다녔다.

경공이 빠른 무인은 며칠 만에 돌아와서 아진에게 편지를 전해 주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도종이 각자 편지를 썼고 의원 하명준과 소은의 편지도 같이 있었다.

한 사람마다 써서 보낸 편지가 결코 적지 않았는데 겹치는 내용은 별로 보이지도 않았다.

짧은 시간 동안에 산본의가에 정말 많은 일이 생겼다는 얘기였다.

자기들끼리 각자 내용을 나눠서 이건 내가 쓸 테니까 너는 다른 내용을 쓰라고 미리 정한 것 같기도 했다.

“잘들 지내고 계신다고 하더냐.”

북리의천이 아진에게 묻자 아진이 밝은 얼굴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어떻더냐.”

북리의천이 그곳을 다녀온 무인에게 묻자 그는 자기가 본 것을 소상히 말해 주었다.

“소은 아가씨는 의원이 되셨습니다. 그 댁의 대공자님도 그렇고요. 가는데 한 곳에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어서 저는 혹시 거기가 산본의가인가 했는데 약방이라고 했습니다. 약방에 산본의가의 의녀들이 나와서 처방전대로 약을 파는데 좁은 마당에 발 디딜 틈이 없이 사람들이 가득 차고 골목까지 나와 있었습니다. 미령과 산본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 온 환자도 많아서 잠시도 쉴 틈이 없었고요.”

그는 그렇게 사람이 많은 곳은 본 적이 별로 없었다면서 부지런히 설명을 이어나갔다.

환자가 없어서 의가 사람들끼리 할 일 없이 오가던 날을 기억하고 있는 아진은 그 말을 듣고 뿌듯했다.

“그런데 신의님은 정말 신의님이셨습니다. 한눈에 그분이 가주님이라는 걸 알아보았지요. 의원님과 정말 비슷하게 생기셔서요. 대공자님도 그렇고요.”

무인의 말에 아진은 금방 다시 그들이 그리워졌다.

“제가 대충 눈대중으로 본 것만 해도 환자가 삼 백 명도 넘었습니다. 의원님이 가져다드리라고 한 것을 드리고 편지를 받아오느라고 기다린 시간이 이각도 안 됐을 텐데 그동안 그 정도 사람들이 의가에 계속 들어오면서 진료를 받더라고요. 그래도 의원과 의생이 적지 않아서 사람들이 그리 오래 기다리지는 않는 것 같았습니다.”

“의학당은 어떻게 되고 있던가?”

북리의천이 묻자 무인은 의학당에서 공부하는 의생들이 진료하는 과정을 옆에서 보며 실습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서 그런지 빨리 배우는 것 같다고 했다.

“의학당의 의생들은 입고 있는 옷이 달랐는데 그 사람들의 시침 솜씨도 제법이었습니다.”

아진은 그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찾아오는 환자가 많아 실습을 할 기회도 그만큼 많아져서 빨리 의원으로 육성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저씨. 정말 고마워요. 어머니는 건강해 보이시던가요?”

“예. 의원님. 가모님은 정말 현숙하고 지혜로워 보이셨습니다. 가주님의 옆에 있는 동안 행복해 보이셨고요. 가주님이야말로 인품도 훌륭하시고 의술도 높아서 사람마다 칭찬을 그치질 않았고 대공자님은 얼마나 의젓하신지. 의원님이 어린 나이에도 이렇게 의젓하고 밝으신 이유를 알게 됐습니다.”

무인의 말에 아진의 얼굴 가득 웃음이 지어졌다.

“어머니는 불편해하지 않으시고요?”

“예. 의원님. 이제 겉에서 보면 조금 표시가 날 정도이기는 한데 불편은 느끼지 않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걸으실 때는 허리를 짚고 걸으시기는 하셨습니다만 특별히 아파하거나 불편해하시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아진은 배가 불러온 어머니의 모습을 상상해 보려고 했지만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아진이가 기대가 되는 모양이구나. 곧 동생을 보게 될 거라는 생각에 말이다.”

북리의천이 아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제선문의 문제만 해결이 되면 산본의가에 함께 다녀오자고 말했다.

“이 일도 이제는 곧 끝이 날 거다. 가주님이 제선문에 최후통첩을 하셨으니 말이다.”

북리의천의 말에 아진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구나.

이제 곧 그들이 오겠구나.

그 생각이 그의 작은 머릿속에 부지런히 지나갔다.

* * *

천공을 장악하며 오랫동안 지상을 관장하던 태양이 서서히 기울기 시작할 무렵.

한 무리의 사람들이 북리세가로 조용히 스며들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꽤 노련해서 움직임을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을 듯했다.

나무와 땅, 벽이 그들의 몸을 표면처럼 흡수했다.

완벽하게 기척을 숨긴 채 그들은 일각이건 이각이건 멈춰 기회를 노렸다.

처음에 그들이 노린 사람들은 뇌옥에 있었다.

제선문의 소속으로 제선문의 비밀을 누설한 자들을 향해 철퇴가 가해졌다.

정진환은 뇌옥에 갇힌 채 그들을 발견했고 목이 터져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북리세가의 무인들은 들어오지 않았다.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았지만 정작 시신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살수들은 손쉽게 일이 진행되는 것에 마음을 놓았다.

북리의천이 병을 털고 일어나고 독고소영까지 세가에 머물며 북리세가의 명성이 전과 다르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래 봤자 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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