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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44화 (44/470)
  • 제44화

    44화

    독고소영은 그 짧은 침묵으로 충분히 대답이 됐다는 듯이 구슬을 집으려 했지만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화들짝 놀라며 손을 뗐다.

    닿지도 않은 것 같았지만 그녀는 다른 손으로 팔을 붙잡고 주물러댔다.

    “으윽!!”

    아진은 그녀의 머리카락이 순간적으로 공중에 뻗치는 것을 보았다.

    정전기만 일어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기분이 나쁜데 지금 얼마나 불쾌할까 하면서 아진이 독고소영에게 다가가자 그녀는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 전체에 심한 화상을 입어 피부가 짓물러 뼈까지 드러난 상태인 것을 보고 아진은 새삼스럽게 구슬의 위력에 놀랐다.

    정말 순식간이었는데 언제 그렇게 될 틈이 있었을까 했던 것이다.

    아진이 독고소영의 상처를 고쳐 주자 그녀는 아진이야말로 정말 이해되지 않는 아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상처가 나아가는 것을 구경했다.

    “아진이 너는 정말…….”

    “네?”

    “스승을 바꿔볼 생각 없니?”

    집요한 독고소영의 시도에 아진이 웃었다.

    “그럼 이건 어떻게 하죠?”

    아진이 묻자 북리의천이 별수 없겠다는 듯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무인들을 나가게 하고 뇌옥을 완전히 비운 후에 바닥에 구멍을 내고 구슬을 파묻어야겠지.”

    그러자 그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구슬이 데굴데굴 굴러 아진의 발치로 갔다.

    “…….”

    북리의천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구슬을 바라보았다.

    구슬은 그들이 지켜보는 동안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면서 마치 아양을 떠는 강아지처럼 굴었다.

    슬금슬금 몸을 굴리면서 아진의 발 주위로만 도는 것이 자기 좀 집어 보라고 말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손을 대 보지 않고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어서 아진은 결국 몸을 숙여 구슬을 집었다.

    북리의천과 독고소영은 눈에 불을 켜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그러나 허망할 정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진은 두 사람을 보다가 구슬을 주머니에 넣었다.

    서로 뻘쭘한 상태에서 그걸 계속 들고 있기도 무엇했던 것이다.

    “아진…… 아. 괜찮은 거냐?”

    북리의천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채 물었다.

    “네 품에 넣고 있을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이대로 다른 곳으로 가서 거기에다 묻어 버리는 게 좋지 않을까?”

    하지만 아진은 구슬이 자기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구슬에서 전해지는 기운이 아진의 마나와 비슷했던 것이다.

    ‘잘만 하면 마나 보급고로 쓸 수도 있겠다.’

    분명히 구슬의 힘은 평범하지 않았고 사람의 진기를 흡수해서 강해져 아진도 딱히 그것을 사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구슬이 아진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리면서 매달린다면 딱히 떼어 내려고 애쓸 필요도 없을 듯했다.

    어찌 보면 구슬이 그러는 건 북리의천이나 독고소영과도 비슷했다.

    북리의천은 아진이 처음부터 스승으로 간택하고 접근한 경우였으니 북리의천보다는 독고소영과 더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저는 괜찮을 것 같아요. 스승님. 당분간은 좀 더 지켜볼게요. 저에게 좋은 작용을 하고 있거든요.”

    아진이 그 느낌을 말하자 북리의천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아진을 바라보았다.

    정말 그렇게 하도록 놔둬도 되는가 하는 얼굴이었다.

    눈앞에서 천의가 구슬에 당해 죽는 걸 본 후라서 더욱 생각이 많아지는 것 같았다.

    “아진이 원한다면 그렇게 해 주자. 의천. 내가 늘 아진을 지켜볼 테니까 너무 걱정은 하지 마.”

    독고소영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북리의천도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아진이 구슬을 갖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뇌옥에서의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져서 뇌옥을 나올 때는 이미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아진이 너. 점심은 먹었니?”

    독고소영의 말을 들었을 때가 되어서야 아진은 자기가 아침만 먹은 채 내리 굶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때부터 급히 허기가 느껴졌다.

    “어서 가자. 지금 잘 먹어야 키가 크지.”

    북리의천의 재촉에 식당으로 가면서 아진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구슬을 만져 보았다.

    구슬은 언제 일을 저질렀냐는 듯이 그저 평안하기만 했다.

    * * *

    북리세가에는 거센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북리의천이 재기에 성공하고 독고소영까지 오자 세가 내부에는 앞으로 북리세가가 크게 도약할 거라는 믿음이 팽배했다.

    가주는 북리세가의 무력부대를 세분화하고 그들의 훈련을 강화하는 한편 외부에서 무인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것은 제선문의 문주가 가주의 부름에 응하지 않으며 점점 정면 대결의 조짐이 펼쳐지면서 내려진 결정이었다.

    북리의천의 이름은 아직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고 그사이에 그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았던데다 독고소영까지 북리세가에 머물고 있다는 소문이 나자 수많은 무인이 북리세가로 향했다.

    한 사람의 발전도, 한 가문의 발전도 일단 그것이 어떤 흐름을 타기만 하면 그 후로는 걷잡을 수 없는 급류에 떠밀리는 것 같았다.

    아진은 북리세가의 변화를 그 중심에서 지켜보면서 그 생각을 더욱 절실하게 깨닫고 있었다.

    ‘언젠가 우리 산본의가도 이렇게 커지면 좋겠다.’

    아진은 북리세가의 발전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중에 산본의가에 접목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스승님. 제선문의 뒤에 남궁세가가 버티고 있어서 북리세가가 무림맹에 도움을 요청해도 무림맹이 쉽게 움직이지 못할 수도 있겠지요?”

    아진이 묻자 북리의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독고소영은 어떻게 그런 생각까지 했냐며 기특해하면서 아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휴. 아진이 같은 아이 하나만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

    독고소영이 그렇게 말하면 북리의천은 허공을 보며 큼큼거리다가 소심하게 말을 하곤 했다.

    “아직 안 늦었는데 왜?”

    그러면 독고소영은 뾰로통한 목소리로 입술을 삐죽 내밀고 됐다고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아 평범한 삶을 사는 것도 좋을 것 같았지만 아진은 독고소영이 주저하는 이유를 알 듯했다.

    이미 그녀의 어깨에는 너무 많은 사람의 삶이 얹어져 있었던 것이다.

    독고소영은 자신이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임신으로 인해 무력한 상태가 되었을 때 주위 사람들에게 위험이 닥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북리의천도 독고소영의 마음을 모르지 않아서 더욱 안타까워했다.

    “그냥 저를 아들이라고 생각하세요. 사고님.”

    아진은 그럴 때마다 의젓한 소리로 그들의 마음을 달래 주었다.

    결혼할 때를 지나서 가정과 아이를 포기한 사람의 심정을 아진만큼 잘 아는 사람도 드물었다.

    “그래. 잘못해서 의천을 닮은 아이가 나와봐. 고집만 세고 말도 안 들으면 골치 아플 거야.”

    독고소영이 말하자 북리의천의 얼굴이 속절없이 붉어졌다.

    아직은 손을 잡아본 것이 다였는데 아이 얘기를 하는 독고소영을 보자 자꾸 아이 만드는 단계가 상상되는 모양이었다.

    아진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아 참. 스승님. 이제 곧 스승님도 바빠지실 텐데 제선문이 살수를 보낼 때를 대비해서 제가 몇 가지 드릴 말씀이 있어요.”

    아진은 벌떡 일어나서 북리의천의 앞에 섰다.

    “정 의원이 알려준 건데 제선문의 살수에는 특징과 정형성이 있어요. 그걸 알고 있으면 나중에 공격을 당할 때 대비하기가 훨씬 쉬울 거예요.”

    “정진환이…… 알려 줬다고? 아니. 알려준 게 문제가 아니라…… 그걸 다 익혔다는 말이냐, 아진아?”

    “네. 스승님. 완전히 익힌 건 아니고 방법만 아는 거예요. 그래도 일단 알아두면 나중에 유용할 거예요.”

    “그래. 그럼 한번 해 보아라.”

    아진은 미리 준비한 침통 여러 개를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이건 세가 야장 아저씨가 만들어 주신 건데 제가 생각한 걸 그대로 만들어 주셨어요.”

    아진은 그사이에 깨알 자랑을 늘어놓았다.

    세가 공방에 있는 야장의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야장이 다른 대가는 필요 없다면서 무영검 장로님에게 자기가 고생했다는 말만 전해 주면 된다고 해서 열심히 그 말을 전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북리의천이 세가 안팎의 사람들에게 칭송과 존경을 받다 보니 북리의천의 이름만 팔아도 저절로 되는 일이 많았다.

    “그랬구나. 내가 한 번 야장을 불러서 상을 내려야겠다.”

    “그러면 정말 좋아할 거예요. 그러면 공격을 시작해 볼게요.”

    아진은 그 말을 하고 예고도 없이 가느다란 침통을 피리처럼 입에 물고 침을 날렸다.

    북리의천과 독고소영은 아진이 침통을 만지작거리는 것을 봤을 때 이미 아진이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지 짐작을 하고 있었기에 전혀 어렵지 않게 침을 피했다.

    검을 빼 들 것도 없이 북리의천은 지강을 날려 침을 쳐냈고 독고소영은 손날로 그것들을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아진을 보며 좋은 시도였다는 표정을 지은 두 사람은 뒤늦게 따끔한 느낌을 받으며 바닥으로 쿵 쓰러졌다.

    “이게 시간차 공격이에요.”

    아진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일단은 그들에게 시범을 보여야 할 게 많아서 후다닥 마나를 불어넣어 정신을 차리게 해 놓고 아진은 그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북리의천과 독고소영은 아진의 공격에 그렇게 속절없이 당할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허허 웃어 버렸다.

    당하고도 믿기질 않았던 것이다.

    “그다음에는 이거예요. 제선문의 살수 중에 만천화우까지 펼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고 그것보다는 위력이 약할 테니까 그냥 정신만 차리고 있으면 막을 수 있을 거예요.”

    아진은 친절하게 설명을 하고 손가락 사이사이에 침을 끼워 넣었다.

    고사리같이 앙증맞은 손가락에 침을 끼워 넣는 모습이 꼭 소꿉놀이를 하는 것처럼 귀여웠지만 4개의 손가락 사이에 세 개의 침을 끼우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그 짧은 손가락 사이 사이에 각각 스무 개 정도의 침을 꽂아 넣었다.

    그렇게 하고 나니 대략 백여 개의 침이 꽂혔다.

    오른손에는 왼손으로 침을 끼우더니 왼손에 침을 끼우는 건 먼저 꽂아놓은 침 때문에 어려웠는지 북리의천에게 끼워 달라는 아진이었다.

    북리의천은 살수가 이렇게 어설퍼서야 어떻게 하냐고 하면서 웃고는 침을 다 꽂아 주었다.

    가늘고 조그만 손가락이 버겁게 침을 조였다.

    “아이고오.”

    짧은 손가락을 한스럽게 보다가 아진이 북리의천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공격할게요. 스승님.”

    “그래. 해 보아라. 아진아.”

    북리의천은 좀 전에 자기가 아진의 공격에 당해 쓰러졌다는 것은 그새 까맣게 잊고 아진이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조그만 손가락을 보면 저절로 웃음이 만개했다.

    독고소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진은 얼굴에서 웃음도 거두지 않은 채 침을 날렸다.

    날아오는 침이 한 번에 도달하지 않고 이번에도 시간차를 둘 거라는 것은 예상한 바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피하지 못했다.

    이전의 실수를 뼈아프게 새기고 이번에는 처음부터 검을 들고 준비를 했는데도 아진의 침이 검기와 검막까지 뚫고 그들의 혈에 절묘하게 날아와 박혔다.

    독고소영은 놀란 얼굴로 북리의천을 보았다.

    이렇게 강한 강기라니.

    그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침은 평범하게 날아오지도 않았다.

    마치 화살의 궤적처럼 물고기가 헤엄을 치듯 그 길을 알 수 없게 휘청이며 날아와 정확하게 꽂혔다.

    그들은 다음 동작을 해낼 수 있을 거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오해였고 착각이었다.

    도무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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