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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42화 (42/470)

제42화

42화

“천의는 일부러 저러고 있는 거예요. 자기 상태를 그렇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천의가 죽어간다고 생각하면 우리 쪽에서 불안해하면서 손을 쓸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 아무리 악적이라고 해도 천의만 알고 있는 것들이 있고 지금 그걸 전부 알아내지는 못했을 테니까요.”

아진의 말에 두 사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진이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천의가 그렇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가 빠르게 쇠약해져 가며 몸이 이상을 보이자 가주도 천의에 대한 대우를 조금은 낫게 해 주라고 명을 내린 상태였다.

“천의는 지금 주도면밀하게 계산을 해서 움직이고 있어요.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증상을 꾸며내고 있는 거죠. 그냥 단순히 꾸미기만 한 건 아니고 그런 반응이 나오도록 자기 몸에 스스로 침을 놨을 수도 있어요.”

“침을요?”

그러다가 무인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인들도 내공으로 아혈이나 수혈을 짚어 손쉽게 사람의 입을 막아 버리기도 하고 잠이 들게 하기도 하지 않던가.

혈을 잘 알고 있는 천의라면 그런 짓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두 무인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악랄할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정말 기가 막힙니다.”

무인들은 천의가 한 짓에 소름이 돋는 듯 화를 냈다.

“어떻게 해야죠. 의원님? 이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는 것 아닌가요?”

“아니요. 이대로 두고 보시면 돼요.”

“……네?”

“천의는 보여 주려고 자기 몸을 고생시켜 가면서 지금 저러고 있는 거거든요. 보지 않으면 됩니다. 그리고 전처럼 하시면 돼요. 천의는 자기 자신을 끔찍하게 아끼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의 팔다리와 심장은 아낌없이 내어 줄 생각이 있겠지만 자기 것은 손가락 하나 내주려고 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면…….”

“잘못된다고 해도 천의가 죽는 것 말고는 문제 되는 게 없잖아요. 그리고 어쩌면 천의가 죽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어요. 여러분은 천의를 확실히 제압하거나 천의가 알고 있는 걸 결국 알아낼 거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사실은 그러지 않을 수도 있거든요. 그러니까 차라리 천의가 죽는 게 나을 수도 있어요.”

“아…….”

그 말을 듣고 안심을 하면 안 될 것 같기는 했지만 안심이 되기는 했다.

“그러면 정말 앞으로 벽곡단만 넣어 주면 될까요?”

“네. 최소한 연명할 수 있는 정도의 식사 거리만 주세요. 지금 천의가 저러고 있는 건 이쪽에서 어떻게 할 거라는 걸 대충 짐작을 할 수 있어서 그런 거예요. 이제부터는 우리도 만만치 않다는 걸 알려 주고 전전긍긍하게 해야죠. 천의가 작전을 세우게 하지 말고 우리 눈치를 보면서 우리에게 반응하도록 만드는 거예요.”

무인들은 아진의 말이 믿기지 않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댔다.

“의원님. 의원님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실 수가 있는 건가요? 저는 그런 생각은 절대 못 할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저도 어려서부터 똑똑하다는 소리는 꽤 자주 들었는데 의원님이랑 얘기를 해 보니까 그동안 아는 게 뭐가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까지 천의에게 놀아났다는 생각을 하면 부글부글 끓어요.”

“네. 그러셔야 해요.”

아진이 밝게 웃으며 정진환에게 가 보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들이 정진환이 갇혀 있는 곳으로 아진을 데려가 주었는데 문을 열기도 전에 상처가 썩는 냄새와 피비린내가 역하게 풍겨왔다.

그것만 봐도 무인들이 천의와 정진환에 대한 대우를 달리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정진환이 가까스로 눈을 떴다.

그러고는 아진이 온 것을 보고 욕을 퍼부으려 했다.

그러나 입술이 터진 채 말라붙어서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크게 고통스러운 듯했다.

아진은 정진환의 모습을 보고 북리세가 무인들에 대해 새롭게 생각할 계기를 가졌다.

자기 앞에서는 순한 양처럼 굴고 있지만 해야 할 일은 확실하게 하는 이들이었다.

정진환만 해도 그랬다.

아진은 정진환의 손가락이 각자 다른 방향으로 꺾여 있는 것을 보았다.

저 손을 해서는 앞으로 시침을 하지도 못할 것 같았다.

진맥을 하기도 어려울 듯 보였는데 일부러 그것을 노리기라도 했는지 손가락 마디마디가 악랄하게 불에 지져져 있었던 것이다.

무인들은 그동안 자기들이 정진환에게 했던 일을 자랑스럽게 털어놓았다.

“의원님의 생명을 노린 자를 쉽게 용서해 주는 것은 의원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가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저희도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정진환은 아진이 원망스러우면서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 말을 차마 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다시 고문이 시작될까 봐 겁이 나는 듯했다.

“그래도 이 자를 통해서 제법 많은 정보를 얻었습니다. 의원님. 제선문이 이번에 어떻게 나올지는 지켜봐야 알겠지만 이번에 알아낸 것만으로도 크게 타격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인들은 산본의가와 제선문의 관계를 알고 있어서 아진의 기분이 좋아지라고 그런 이야기들을 해 주었다.

“의원님이 아니었으면 저희 소은 아가씨도 계속 제선문에 계셨을 테고 나중에는 무슨 일을 하시게 됐을지도 모르지요. 산본의가가 때맞춰서 이름을 날린 덕에 아가씨가 제선문에서 나오실 수 있어서 그것도 다행입니다.”

무인들은 할 이야기가 끝도 없는 듯했다.

아진은 그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그들에게 말했다.

“저는 지금부터 이 사람에게 제선문의 살수공을 배우고 싶은데 아저씨들은 바쁘지 않으세요?”

그러자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더니 결국 한 사람이 그곳에 남기로 했다.

아진 혼자만 정진환의 옆에 두는 것은 아무래도 위험하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러나 아진은 고개를 저었다.

“세가에 일도 많은데 저 때문에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이런 일은 제가 해결할 수 있어요.”

두 사람도 아진의 말이 틀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가서 일을 볼 테니 필요한 게 있으면 바로 부르십시오. 일각에 한 번씩은 들여다보겠습니다.”

아진도 그것까지 말릴 생각은 없었다.

사람들이 나가자 정진환이 기가 막힌다는 듯 아진을 노려보았다.

“이제 나는 전혀 무섭지 않다는 말인가?”

“이제요? 전부터 그랬는데요?”

아진이 그의 앞에 선 채 정진환의 모습을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아팠겠네요.”

동정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순전히 호기심 때문에 묻는 것처럼 하는 소리에 정진환은 화가 났지만 웬일인지 섣불리 화를 내지도 못했다.

눈앞의 아이가 겉으로는 천진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괴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그랬을지도 몰랐다.

“너는 누구지? 너는 뭐냐. 이제 와서 다른 미련은 없다. 그래도 알게 해 주면 좋겠군. 네놈이 누군지.”

아진은 유쾌하게 웃었다.

“이제 그거나 말해 보세요. 아저씨가 제선문에서 살수공을 전수받은 사람 중에 실력이 좋은 편이었기를 바랄게요. 아저씨도 그런 거 할 줄 아세요? 만천화우라던가 그런 거요. 당가에서도 직계만 익힐 수 있다는 그런 거 있잖아요.”

아진은 정진환이 하는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자기가 할 말만 해 나갔다.

정진환은 고개를 저어대며 그를 노려보았다.

“아저씨. 지금 처지를 이해를 못 하나본데 아저씨가 나를 그런 눈으로 보면 안 되거든요.”

아진은 작정을 한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순간 아진을 어린아이라고 느끼게 하는 것은 아진의 겉모습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풍기는 기운이나 분위기 모두, 그동안 정진환이 봐 왔던 누구보다도 위압적이었다.

정진환은 자기가 좁고 음산한 곳에서 사람들에게 계속 고신을 당하다 보니 이제는 그런 생각까지 하는가 보다고 여겼다.

“그 사람들이 어떻게 가르쳤는지 말해 보세요. 아차아암. 내가 그걸 물어 보려고 온 게 아니었지.”

아진은 호들갑을 떨면서 구슬을 꺼냈다.

그러고는 그것을 정진환의 앞에 불쑥 들이밀었다.

“아저씨. 이게 뭔지 알아요?”

“…….”

정진환은 멍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 잠깐의 시선만 보고도 아진은 자기가 잘못 찾아왔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구슬을 집어넣었다.

뇌옥에서 돌아가기 전에 천의에게도 한 번 보여 주기는 해야겠다고 생각은 했는데 요즘에는 왜 그렇게 잊어버리는 게 많은지 이번에도 깜빡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 시진이 지날 무렵, 정진환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살수의 비전을 탈탈 털렸다.

그는 만천화우를 할 수는 없었지만 입으로 불어서 날리는 침통을 만드는 법을 알고 있었고 손가락에 침을 끼워 날려 사람들을 죽이는 법도 알고 있었다.

가까이 접근을 할 수 있으면 중요한 혈에 침을 꽂아 소리도 내지 못하게 하고 죽일 수도 있었고 흔적도 남지 않도록 사람을 죽이는 법을 수십 가지도 더 알았다.

극독을 구하는 방법도 많이 갖고 있었는데 제선문에 선이 닿아 있기만 하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라고 했다.

“제선문에는 독이 왜 그렇게 많은데요?”

“남궁세가 때문이지. 남궁세가는 겉으로는 사천 당문을 까 내리지만 일이 생길 때마다 독으로 간단히 해치워 버리는 사천 당문이 부러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은밀하게 특임부대를 만들려고 시도했다가 그 일을 제선문에 아주 위임해 버렸지. 제선문은 남궁세가라는 거대한 후원자를 등에 업고 순항을 해 나갔고. 돈은 부족하지 않게 지원을 받아서 각지에 있는 독을 긁어모았다.”

아진은 그럴만하다고 생각했다.

편하게 전투를 끝낼 방법이 있는데 독은 정당하지 않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일을 어렵게 끌고 갈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아저씨가 만약에 제선문의 독에 당한다면 어떻게 할 거예요?”

“해독을 해야겠지. 무인들은 기본적으로 내공을 사용해서 어느 정도의 독은 스스로 해독을 할 수 있겠지만 우리 같은 사람은 해독약을 먹지 않으면 죽는다.”

“해독은 어떻게 해요?”

“독성을 파악하고 그걸 막아야지.”

그가 생각해도 자기가 왜 그렇게 호락호락 대답을 해 주는 건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아진은 정진환의 말이 끝나면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다음 질문을 해 나갔다.

해독제를 만드는 법은 어떻게 배워야겠냐고 하자 정진환이 피식 웃었다.

그것까지 가르쳐 주면 자기는 아무 쓸모가 없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제는 입을 다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건 아주 어려운 일이다. 살수의 비전을 익히는 것보다 오히려 그게 더 어렵지.”

“말해 보세요.”

“그러면 너는 나를 죽일 게 아닌가?”

“죽어야 할 때가 되면 죽는 게 당연하잖아요.”

아진은 그렇게 말하고 정진환에게 다가갔다.

“아저씨. 나는 아저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 살았어요. 그래서 내가 아무리 지키려고 혼자 아등바등해도 그게 간단히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포기하는 법도 일찍부터 배웠어요. 아저씨를 이용하면 해독제를 만드는 법을 쉽고 편하게 배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 그걸 모른다고 해서 큰일이 생기는 건 아니에요.”

정진환은 아진이 달라 보인다는 생각을 다시 하고 있었다.

“……내가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해줘. 나는 살고 싶다.”

“제선문을 배신하라고 해도요?”

아진은 정진환의 대답이 진심으로 궁금한 듯 정진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에게서는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제선문의 문주.

그를 떠올리자 정진환은 목이 콱 막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쓸데없는 욕심인가?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려고 하다가 견디기 힘든 나락으로 빠지게 되는 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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