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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41화 (41/470)
  • 제41화

    41화

    북리세가에 도착하자 위사들이 반가워 어쩔 줄 몰라 하며 싱글벙글거렸다.

    아진을 보고 반가워서 그런 거였는데 그러다가 한 박자 늦게 북리의천에게 예를 갖춰 올렸다.

    존경하기는 하지만 대하기는 어려운 사람이 바로 가주의 형님인 북리의천이었는데 요즘 북리세가 무인들은 북리의천을 보고도 자주 웃었다.

    갑자기 북리의천에게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고 아진을 보고 웃다가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지 않은 채로 북리의천을 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북리의천도 불만은 없었다.

    자기 제자를 예뻐해 주는 모습을 보면 괜히 자기도 그들에게 잘 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북리세가의 무인들은 함께 온 독고소영을 알아보지 못했다가 북리의천이 소개하자 그제야 깜짝 놀라며 일제히 예를 갖추었다.

    세가의 자랑이었던 대공자의 정혼자.

    그러나 대공자의 지병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다른 사람과 혼인을 한 독고세가의 아가씨.

    그들이 생각하는 독고소영은 그런 사람이었기에 그녀를 향한 감정은 꽤 애틋했다.

    그런데 왜 여기에 온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직접 물어 보지는 못하고 서로들 여러 가지 추측만 할 뿐이었다.

    “세가는 어땠는가.”

    북리의천이 묻자 위사들이 그동안 세가에서 있었던 일들을 말하느라 바빴다.

    “제선문에서 사람을 죽이는 법을 가르쳐 본가에 잠입시킨 것을 문제 삼아 가주님께서 제선문에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책임 있는 사람이 본가로 와서 그 일에 대해 확실히 소명하지 않으면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거라고 하시면서요.”

    “그래서 제선문에서 사람이 왔는가?”

    북리의천이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아닙니다. 아직은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지부 차원에서 끝낼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거라 아마도 장문인이 직접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려면 시간이 걸리겠지요.”

    “그렇군. 다행이네.”

    아진은 북리의천이 깜짝 놀란 것이 그 재미있는 광경을 놓친 건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북리의천은 때때로 엉뚱한 모습을 보였는데 아진은 북리의천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점점 더 잘 알아차렸다.

    그러면서 자기가 북리의천을 닮아가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뿌듯해하곤 했다.

    “그자들. 의문에서 키운 살수들을 대거 투입하는 거 아니야?”

    독고소영이 말하자 북리의천이 조소를 흘렸다.

    “그래 보라지. 그러면 좋지. 이번에야말로 명분을 가지고 제선문을 멸문시켜 버릴 수 있을 테니까.”

    북리의천은 북리세가에 관계된 일이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는데 이번에도 그 성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북리의천의 조용한 모습만 보고 함부로 그를 판단하면 크게 당할 수가 있었다.

    “천의와 정진환은 어쩌고 있는가. 제선문에서 파견된 의원들은?”

    “모두 갇혀 있습니다. 가주님의 진노가 가라앉지 않아서 아마 몇 달은 더 갇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정진환도 다시 갇혔는가?”

    “예. 아진 의원님을 죽이려고 했는데 그렇게 가볍게 용서해 줄 일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다시 투옥을 명하셨습니다.”

    “길길이 날뛰었겠군. 천의에 대해 털어놓으면서 자기는 빠져나갈 수 있을 줄 알았을 텐데.”

    북리의천이 가증스럽다는 듯이 말하자 위사들도 이구동성으로 맞장구를 쳤다.

    그들이 아진을 의원이라고 칭했는데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아진은 자기가 아직 의원이 아니라고 했는데 그 말은 다른 이야기에 묻혔다.

    그들에게는 아진이 의원이 아니라는 게 말도 안 되는 얘기였고 그런 말은 들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의인들 간에 정해진 약속이 있다고 해도 일단 아진만큼은 모든 규칙의 예외가 돼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굳건한 믿음이었다.

    그러니 그들은 누가 뭐라고 하건 아진을 꿋꿋이 의원이라고 부를 생각이었다.

    북리의천도 자랑스러운 듯 아진을 보고 웃었다.

    “그럼 지금 의방은 어떻게 운영이 되고 있어요? 의원 중에 그 일에 연루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텐데요?”

    아진의 말에 위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은 세가에 직접 의방을 두지 않고 밖에 있는 의방을 이용하도록 하라는 게 가주님의 명입니다. 세가의 의방에 상주하면서 갖게 된 권력으로 문제가 생겼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이제 아진 의원님이 돌아오셨으니 걱정할 것도 없고요. 하하하하.”

    호탕하게 웃으며 그들은 아진이 북리세가의 의원이 되는 것을 기정사실로 하고 있었다.

    의원님이라고 부르면서 자연스럽게 존대까지 했다.

    북리세가의 의원이라.

    “의생이랑 의녀도 없는 거죠?”

    “그…… 렇죠. 그런데 아진 의원님이 필요하다고 하면 아마 의생과 의녀들은 새로 뽑아 주실 겁니다.”

    아진의 입이 옆으로 길게 늘어지면서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지어졌다.

    그 이야기를 아버지나 도종이 들으면 뭐라고 할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괜히 신이 났던 것이다.

    북리의천도 아진이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한결 마음을 놓았다.

    “그래도 무공 수련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아진아.”

    북리의천이 말하자 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스승님. 둘 다 열심히 할 거예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에게 나타났던 스탯에는 확실히 의미가 있는 듯했다.

    공격력만큼이나 높은 치유력.

    한편으로 그의 공격력도 치유력만큼 높았다.

    그래서 어느 것 하나 쉽사리 포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제선문 같은 거대 의문과 싸우려면 이런 게 좋기도 하고.’

    아진은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기대됐다.

    제선문이 강할수록 더 재미가 날 것 같았다.

    “들어가자. 아진아. 문 앞에서 너무 오래 지체했다.”

    이미 안에서는 가주와 가모를 비롯한 세가의 어른들이 모조리 나오고 있었다.

    돌아온 사람이 아진 혼자만은 아니건만 그들의 시선은 일제히 아진을 향했고 서로 아진을 먼저 안아주려고 남들을 견제하며 경공까지 펼치며 달려오고 있었다.

    아진의 얼굴에 저절로 웃음이 감돌았다.

    북리세가로 돌아온 것이, 자신의 집에 돌아온 것만큼이나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 * *

    정진환을 찾아간 것은 혹시 정진환이 구슬에 대해 아는 게 있을까 해서였다.

    정진환에게서 수확이 없으면 천의에게 갈 생각이었기에 처음부터 기대하는 건 크게 없었다.

    북리의천이 함께 가려고 했지만 가주가 부르는 바람에 아진만 혼자서 뇌옥으로 향했다.

    “서 의원님이 아닙니까. 어서 오십시오. 누구를 만나러 오셨습니까?”

    뇌옥을 지키고 있던 무인들이 아진을 보고 반색을 하며 말했다.

    세가의 뇌옥은 다른 사람의 접근을 철저히 막고 있었지만 아진에게는 예외였다.

    가주와 북리의천이 함께 나서서 아진이 어디를 가려고 하거나 누군가를 만나려 하면 아무도 아진을 막지 말고 아진이 하고 싶은 것을 하게 해 주라고 명한 후에 아진에게는 세가 내에 성역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아휴. 그냥 아진이라고 부르시라니까요.”

    “아닙니다. 어떻게 의원님을 아진이라고 부르겠습니까? 게다가 의원님은 그냥 평범한 분도 아니고 저희 세가의 크나큰 은인이신데 말입니다.”

    처음에 그 말을 들었을 때 아진은 그게 무슨 말인가 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는데 북리의천의 병이 나았다는 소문이 나면서 전국 각지에서 북리의천의 회복을 축하하면서 값비싼 선물들이 속속 답지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무림 십이성의 한 축을 차지하던 북리의천의 부활.

    그것은 당당히 세가의 변화를 알리는 신호였다.

    모두가 그의 부활을 기뻐한 것은 아니다.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숫자가 그 소식을 듣고 얼굴을 찌푸렸을 것이다.

    그 전에도 북리의천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고 있었지만 외부의 반응을 보면서 더욱 확실히 깨달아 갔다.

    무림 십이성이라는 칭호는 북리의천이 은거에 들어가기 전에 붙은 칭호였으니 이제는 거기에도 필연적으로 변화가 따를 터였다.

    사람들은 북리의천의 기량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지 못했고 강호에 있는 수많은 사람의 관심이 북리의천에게 쏠려있는 상태였다.

    그가 퇴화했을지, 전보다 더 강해졌을지.

    아무리 생각해도 퇴화했다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러웠다.

    아무리 무인이라고 해도 나이가 들면서 힘이 쇠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내공은 젊은 사람에 비해 많을 것이고 절기의 완성도도 높아지겠지만 나이가 듦에 따라 죽음에 한 발 한 발 가까워지는 것은 누구도 피하지 못하는 숙명이었다.

    어찌 되었건 지금 북리의천이 병을 털고 일어섰다는 사실 때문에 북리세가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고 세가의 힘이 강해진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다른 세가에서는 앞다투어 사람들을 보냈다.

    북리세가의 분위기를 알아보고 북리의천도 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북리의천이 아진과 함께 산본의가로 가 버리는 바람에 헛수고를 하고 돌아간 이들이 수십 명이었다.

    그때마다 자연스럽게 산본의가라는 이름이 나오고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뇌리에 박혔다.

    북리세가의 사람들은 산본의가의 공자가 북리의천을 고쳤다는 사실을 자랑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산본의가로 향했고 그 결과 산본의가의 발전은 더욱 가속화되고 있었다.

    “그런데 혹시 천의를 보러 오셨어요?”

    무인 중 한 사람이 먼저 물었다.

    “아뇨. 정 의원요.”

    “그렇군요. 잘됐습니다. 천의는 지금 정신이 좀 오락가락하는 상태인 것 같거든요. 대화가 어려울 수도 있어요.”

    “왜요?”

    “그거야 우리도 모르죠. 의원이 다녀갔는데 자기도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아진은 천의를 먼저 들여다보기로 했다.

    두 무인이 아진을 따라 들어가 아진의 뒤에 성벽처럼 우뚝 서 있었다.

    아진이야말로 북리세가의 가장 큰 자산 중 하나였기에 만에 하나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날까 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안으로 들어간 아진은 천의를 바라보았다.

    천의는 눈에서 초점이 흐려져 있고 입이 벌어져 침이 흘렀다.

    권위와 지혜가 넘쳐나는 것 같던 처음의 모습은 간 곳이 없었는데 아진은 그런 천의를 보다가 씩 웃었다.

    “당분간은 문에 손만 오갈 수 있는 구멍을 내서 거기를 통해서 벽곡단만 넣어 주시고 문을 열어주거나 안으로 들어가지 마세요. 천의는 전염병을 앓고 있습니다. 제가 한 말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서 꼭 그렇게 하도록 하셔야 합니다. 이대로 나가서 바로 뜨거운 물에 세신을 하시고 입고 있던 옷은 삶아서 빠세요.”

    아진은 그렇게 말하고 먼저 서둘러 나갔다.

    “저, 전염병이라뇨?”

    무인들은 깜짝 놀라며 달리듯이 아진을 뒤쫓아 갔다.

    순간적으로 아진이 돌아섰을 때 천의의 눈에 노여운 불길이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황당함과 함께 이 사태를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하며 복잡한 고뇌가 얼굴 가득 자리 잡았다.

    불과 몇 초 사이에 표정이 극단적으로 변한 것이다.

    조금 전만 해도 다 죽어 가는 사람 같더니 그때의 천의는 이전과 같은 모습 그대로 돌아와 있었다.

    아진은 속으로 피식 웃으면서 그곳을 나왔다.

    무인들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의원님. 저희가 죽을병에 걸린 건가요?”

    그러자 아진이 뇌옥에서 멀리 걸음을 옮기더니 그들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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