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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39화 (39/470)

제39화

39화

북리의천이 돌아온 것은 거의 한 시진이 지난 후였다.

그는 천으로 둘둘 감싼 시신 하나를 가지고 왔는데 아진은 우선 시신을 살려보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달음질을 쳐가며 들어가던 마나가 그때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죽은 시간으로 봐서는 독고세가의 사람들보다 탈혼단의 시신이 늦게까지 살아 있었을 텐데도 마나를 불어넣는 것 자체가 되지 않다 보니 아진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사람들은 아진이 그를 살리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다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을 살린 것이 기적이었다.

“그러면 이 시신은 내가 처리하도록 하겠다. 아진아. 너는 다른 곳으로 가 있으면 좋겠구나.”

북리의천이 아진을 걱정하며 말했지만 아진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면 보고 싶어요. 스승님.”

“그래. 네 생각이 그렇다면 그렇게 해라.”

북리의천도 아진을 어린아이가 아닌 의원으로 대하고 있었고 그런 아진이라면 시신을 태우는 모습을 보는 것도 필요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독고세가의 많은 사람이 그 모습을 같이 지켜보았다.

갑자기 침입해 들어온 이들에게 속수무책으로 죽임을 당했던 이들이 다시 살아나서 자기들을 죽인 이의 시신이 불타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시신이 불에 타는 모습을 보면서 찡그리거나 고개를 돌리는 사람도 없었다.

모두 복수심을 불태우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진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북리의천이 손에서 일으킨 불이 한순간에 크기가 커지더니 시신의 몸에 옮겨붙어 화르륵 태웠다.

보통의 불보다도 훨씬 열기가 강한 그것은 마치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의 화염을 옮겨 붙인 것처럼 뜨거워서 몇 걸음이나 물러나 있는데도 견디기 힘들 정도로 열기가 피어났다.

그 강한 열기에 시신이 순식간에 불에 타고 뼈까지도 녹아버렸다.

“저게 뭐지?”

그 목소리는 북리의천에게서 나왔다.

새빨갛게 타오르는 불길 한가운데에서 어른 팔뚝만 한 벌레가 몸부림을 치다가 나중에는 그것마저 불길에 녹았다.

처음 봤을 때는 불길에 형체도 없이 녹아버릴 것 같더니 어느새 단단한 구슬처럼 뭉쳤고 모든 것을 태운 불길이 마침내 잠잠해졌다.

사람들은 한바탕 혼몽을 꾼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작정을 하고 일부러 그렇게 만들려고 해도 그렇게까지 동그랗게 만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지만 묵빛을 내뿜는 구슬이 영롱하니 바닥에 홀로 남겨졌다.

“이것은 제가 가져도 되겠습니까, 태상가주님.”

북리의천이 말하자 태상가주가 웃었다.

“이제껏 무영검이 그런 말을 하는 걸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데 제자가 대단하기는 대단한 모양이군. 무영검이 자기가 가지려고 그런 말을 한 것 같지는 않고 제자에게 주고 싶어서 그런 것 같으니 말이야.”

태상가주의 말에 북리의천도 부정을 하지는 않았다.

“그렇습니다. 제자가 생기니 욕심도 덩달아 느는 것 같습니다.”

“그건 좋은 일이지. 좋은 일이고말고. 그리고 이건 처음부터 두 사람의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니 나에게 허락을 구할 것도 없네. 그리하게.”

아진은 그 괴상한 것에 딱히 관심이 없었지만 스승이 부끄러움을 불사하고 얻어준 것을 마다하기도 쉽지 않았다.

“이런 벌레가 있다는 것을 들어본 적은 있지만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군.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실제로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 좋아하는 사람이 지어낸 거라고만 생각을 했는데. 그런데 누가 본가를 노리고 이런 흉악한 일을 꾸민 건지 모르겠군.”

태상가주가 말하며 가주를 돌아보았다.

짚이는 것이 있냐는 표정이었지만 가주라고 알 턱이 없었다.

“제 생각에는…… 독고세가에 특별히 원한이 있어서 그런 것이라기보다는 여러 곳 중 한 곳을 택한 것 같습니다.”

북리의천은 조심스럽게 자기 생각을 말했다.

독고세가는 정파 무림의 대표적인 명문 세가임에는 틀림이 없었지만 이제는 오대 명문 세가에 이름을 확고히 올리지 못하고 칠대 세가니 팔대 세가니 할 때만 말석을 두고 다른 가문들과 다투는 실정이었다.

무림 십이성에는 들지 못하고 강호 삼십 대 고수에 이름을 올리는 사람들과 비슷한 처지인 것이다.

북리의천은 더 할 말이 있었지만 그것은 그냥 혼자만 마음에 담아두었다.

누군가 정파 무림에 복수를 하기로 마음을 먹고 뒤에서 음모를 꾸몄을 때 정파 무림인들에게 타격을 주면서 가장 쉽게 도전할 수 있는 대상.

북리의천은 독고세가가 그런 식으로 선택된 것이 아니었을까 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머릿속에도 그런 생각이 서서히 들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자존심 때문에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차라리 그렇다고 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이제 그 일이 자신들을 지나갔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놓을 수 있어서였다.

“무영검. 자네와 자네의 제자가 이번에 이곳을 찾아 주지 않았다면 본가가 어떻게 됐을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어.”

가주는 주변 사람들의 격려를 받아 북리의천에게 독고소영과의 혼사에 대해 얘기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분위기를 먼저 눈치챈 독고소영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버지. 의천에게 괜한 부담을 주지 마세요. 무슨 말씀을 하려고 하시는 건지 알지만 이제는 제가 싫어요.”

독고소영의 말에 북리의천의 눈이 동그래졌다.

“소영…….”

“흥. 내가 매달릴 때 그렇게 야멸차게 나를 홀대했으면서 쉽게 나를 차지할 수 있을 줄 알았어? 용서를 받으려면 진심을 오래오래 보여 줘야 할 거야.”

“응?”

북리의천은 독고소영이 어쩌자는 건가 하며 갸웃거렸고 아진은 이거 정말 점점 흥미진진해진다고 생각하며 두 사람을 구경했다.

“어차피 저는 아진의 수신호위가 되기로 했어요. 아진이 가는 곳에는 어디든 따라가야 하니까 의천과도 자주 마주치겠죠. 그래도 혼인은 아직 생각이 없어요.”

독고소영이 그렇게 말하자 가주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이놈. 무영검을 데릴사위로 들이겠다는 것도 아닌데 벌써 무영검을 아끼느라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로구나.”

“그런 거 아니에요. 아버지.”

그녀가 그렇게 말했지만 이미 속마음을 들켜 버린 후였다.

아진은 그들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같이 웃었다.

웃을 때도 얼굴 한쪽에는 언제나 그늘이 남아 있는 것 같던 북리의천도 이제 아무 근심 없이 웃었다.

“무영검. 급히 돌아가야 하는 게 아니면 당분간 여기에 머물면 어떻겠나. 오랜만에 다시 봐서 반갑기도 하고 듣고 싶은 이야기도 많고 해서 말이네.”

가주가 말했지만 이번에도 독고소영이 나섰다.

“아버지.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시면 의천은 당연히 거절하지 못하고 그러겠다고 하겠죠. 하지만 의천은 혼자도 아니고 이제 제자도 있잖아요. 의천도 제자를 가르칠 계획을 세워 두었을 텐데 여기에 잡아 두시는 건 안 된다고 봐요. 그렇지, 아진아?”

“네? 아. 네.”

아진은 독고소영이 도움을 요청하는 거라고 생각하면서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군. 그것도 일리가 있는 말이라서 나도 더 이상은 강권을 하지 못하겠네. 아무튼 무영검과 아진에게는 우리가 큰 은혜를 입었어. 앞으로 우리 세가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거든 언제든 연락을 해 주게. 본가의 마지막 사람이 죽는 날까지 본가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주겠네.”

독고세가의 가주가 한 말은 가히 파격적이었다.

자그마치 명문 무림 세가 하나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었다.

그것도 횟수조차 제한하지 않았고 언제까지 사용할 수 있다는 조건조차 없었다.

가주가 독단적으로 한 말이었지만 태상가주를 비롯해 모든 장로와 무인들이 기쁜 얼굴로 웃으며 흔쾌히 동의했다.

“그건 당연한 이야기이네. 우리는 이미 사선을 넘어갔던 사람들인데 목숨이 아깝겠는가. 아진아. 너는 다 끊어진 우리의 삶을 이어붙여 주었다. 가주의 말을 명심하고 있다가 우리 힘이 필요하거든 잊지 말고 찾아오너라. 우리는 앞으로 더욱 정진해서 네 무기가 되어 주도록 하마.”

태상가주의 말에 아진은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 들었다.

그 천군만마를 쓸 일이 생길지는 모르지만 쓸 일이 안 생기더라도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귀한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북리의천은 진심으로 감격한 얼굴을 하고 그들에게 인사를 올렸다.

아직 세가에는 복구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지만 돌아서는 걸음이 무겁지는 않았다.

모두의 얼굴이 밝았고 그들이 죽기 전의 힘을 모두 찾아 회복했다는 것을 서로가 다 알 수 있어서였다.

“의천. 짐은 네가 들어.”

독고소영이 말하며 자신의 짐을 떠넘기자 북리의천이 환하게 웃으며 그것을 받았다.

“아휴. 약올라. 약을 올리려고 해도 웃기만 하고 말이야.”

아진은 독고소영의 말을 들으며 큰 소리로 웃었다.

“정말 웃기는 애 아니니. 아진아? 너희 스승 말이야. 그렇지?”

아진의 머리를 쓰다듬고 웃는 독고소영을 보며 아진은 생각했다.

빙소검후라는 말은 그녀가 웃지 않아서 붙은 별호일 텐데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 독고소영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는 것을 본 일이 없는 것 같다고.

세 사람을 태운 말이 석양을 받으며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여름의 첫날이었다.

* * *

독고세가로 향할 때의 기분이 어땠는지를 생각하면 지금은 천국을 거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와아……, 천국 같아요.”

아진이 말하자 북리의천과 독고소영이 그를 바라보았다.

“천국?”

“아…….”

이 사람들은 천국이라는 말은 안 쓰겠구나.

그럼 선계라고 하나?

아진은 머리를 굴리다가 크게 웃고 다른 이야기로 말을 돌렸다.

전에는 천사 같다는 말을 했다가 비슷한 눈초리를 받은 적이 있었다.

북리의천은 그 말을 잘못 들어서 선녀 같다고 한 거냐고 물었고 그때는 그렇다고 하면서 넘어갔다.

그런데 이제는 두 사람이 서로 물어 가면서 아진이 잘못한 말을 정확히 짚어 냈다.

아진은 그들의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리려고 탈혼단 살수의 몸에서 나온 구슬 얘기를 꺼냈다.

“그런데 스승님. 그 구슬 말인데요. 저도 좀 볼 수 있을까요?”

“그래. 잠깐만 기다려라.”

북리의천은 품에 잘 간직하던 구슬을 꺼내주었다.

구슬은 완전히 새까만 묵빛을 지녔고 안은 전혀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음침한 느낌이야.”

독고소영이 말하자 북리의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기분을 받는 것은 아진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영물 같은 걸까요?”

“영물? 영물이라기보다는 사이한 기운이 담긴 물건 아닐까? 그런 것도 영물이라고 하나?”

“사술을 쓰는 자들에게 들어가면 영물이라면서 좋아하기는 하겠네.”

독고소영이 말하자 북리의천도 그럴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 우리가 가지고 있으면 이건 전혀 쓸모가 없어요. 스승님?”

“그건 잘 모르겠구나. 나랑 소영에게는 확실히 쓸모가 없을 것 같은데 아진이 너라면 혹시 또 모르겠다.”

“맞아. 특이한 돌가루를 갈아 먹여서 사람을 살렸다는 의원의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

독고소영이 말하자 북리의천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걸 먹인다고? 이걸 먹은 살수들이 어떻게 됐는지 생각해 봐. 이런 건 먹이면 안 되지.”

“이걸 먹이자는 건 아니고 그런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있다고.”

어차피 답이 없는 얘기였다.

검은 구슬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어서 추측만이 난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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