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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38화 (38/470)

제38화

38화

“뭔데?”

독고소영이 자상한 어조로 물었다.

한두 사람을 살려주었다고 해도 고마울 텐데, 평생 바닥에 내려놓지 말고 계속 업고 다니라고 해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진이 너무 고마웠던 것이다.

그러지 않았다고 해도 의천의 제자라는 이유만으로도 예뻤을 터였다.

“스승님은 혼인하신 것으로 알고 있던데…… 아니지요?”

독고소영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서 자꾸 문장성분 하나가 생략되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대답을 하지 않고 그렇게 묻는 독고소영을 보면서 아진은 자기 생각이 맞다고 더욱 확신했다.

“아니면 아니라고 대답하셨겠죠.”

그러자 그녀가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맞아.”

“그런데 왜…… 아아…….”

아진은 묻다 말고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랬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네 스승님에 대해서 아주 잘 아는 것 같구나.”

“네.”

아진이 웃음을 지었다.

“스승님의 병은 다 나았어요. 그리고 많이 그리워하세요.”

“의천이 나았다고? 그렇지 않아도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는 했어. 마지막에 봤을 때는 정말 얼굴이 좋지 않았거든. 몸도 나보다 가냘프고 얼굴도 나보다 더 갸름했는데. 혹시 의천을 고친 것도 너니. 아진아?”

“네.”

“정말 고맙다. 내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뭘 해도 고마운 마음을 다 갚지는 못할 거야. 죽는 날까지 갚아 나갈게. 아진아. 네 수신호위가 돼 줄까?”

그러더니 그녀가 갑자기 눈빛을 빛냈다.

아진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자기가 북리의천의 제자를 지켜주는 수신호위가 된다면 북리의천과도 헤어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른 듯했다.

그러면서 좋은 생각이라고 스스로 감탄하는 것 같은 독고소영을 보며 아진은 웃고 있었다.

아픈 몸 때문에 즐거움도, 사랑도 포기하고 있던 북리의천이 옛사랑을 다시 찾게 될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졌던 것이다.

“그래. 그러자. 아무래도 그 방법밖에 없겠어. 내가 너한테 은혜를 다 갚으려면 말이야. 그러니까 사양하지 마. 아진아.”

아진은 그녀를 놀려 주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고개를 저었다.

“저는 스승님으로도 충분해요. 스승님이랑 같이 다니는데 누가 저를 해하려고 하겠어요? 죽으려고 환장한 사람이 아니라면요.”

“……응? 아니. 그건…… 그건 네가 잘못 생각하는 걸 수도 있어. 무예가 뛰어난 거랑 실전에서 강한 건 전혀 다른 문제거든. 그래. 의천은 좀 그런 부분에서 둔해. 실전에서 말이야. 그러니까 그때는 내가 도움이 될 거야.”

“누가 내 제자 앞에서 나를 음해하고 있는 거지?”

갑자기 북리의천이 들어와 웃으며 말하자 독고소영이 뜨끔한 듯 두 손을 저어대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 오해야. 의천. 아니지. 그건 어느 정도는 사실이잖아. 실전은 내가 훨씬 더 강했어. 아진아. 빙소검후라고 너도 들어 봤지?”

“아뇨?”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안 들어 봤어? 북리의천이 내 얘기를 안 했어?”

“아뇨. 하셨는데 별호가 독화였다고 하셨어요.”

아진은 흥미진진해진다고 생각하면서 말했다.

“독화라니 언제 적 얘기를 하고 있어? 지금은 독화라고 불리는 애가 따로 있겠지. 하여간 주책이야. 너는 언제 철이 드니?”

독고소영이 북리의천을 홱 노려보며 말했다.

“…….”

북리의천은 설마하니 자기 나이에 그런 말을 듣게 될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한 듯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폭소를 터뜨렸다.

“그보다 소영. 이제 시댁에 돌아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여기에는 얼마나 머물기로 하고 온 거야? 걱정하시지 않겠어?”

북리의천은 독고소영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한 채 말했다.

아무리 시댁에 말을 안 하고 왔다고 해도 지금 그쪽 사정을 걱정해 줄 때가 아닌 것 같은데 북리의천은 이상한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것을 보면서 아진은 북리의천이 알고 싶은 게 따로 있는 거라는 걸 알아차렸다.

“혼인 안 하셨대요.”

두 사람만 놔두면 북리의천이 그 사실을 알아내게 되기까지 또 얼마나 걸릴지 몰라서 아진이 얼른 말을 했다.

“……어? 그때 분명히…….”

북리의천의 얼굴에 놀라움이 깃들었지만 그것은 봄바람에 날리는 꽃가루처럼 함박웃음에 떠밀려 사라졌다.

“거짓말을 한 거야?”

“거짓말은 아니고 그냥 나중에 마음이 바뀐 것뿐이야. 누가 나 같은 사람을 당해내겠어? 나도 성질 죽여가면서 다른 사람 비위 맞춰 주면서 살고 싶지 않았고. 그 사람은 또 무슨 죄야? 그래서 그냥 포기했지.”

“너는 어떻게 하나도 변하질 않아?”

“내가 변했으면 좋았겠어?”

두 사람이 아웅다웅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흐뭇해서 아진은 아빠 같은 미소를 짓고 웃었다.

“어쨌든 아진이 너는 이제부터 나를 사고라고 불러. 내가 네 사부의 사자니까.”

“네가 왜 내 사자지? 사매라면 몰라도.”

그러는 것도 웃겼다.

별것도 아닌 도발에 매번 넘어가 주고 있는 것이 대화의 불씨가 꺼질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처럼 보였던 것이다.

따지면서도 그 얼굴에 계속 행복해 보이는 웃음이 지어져 있었다.

“따지지 마. 북리의천. 네 제자를 위한 거야. 나 같은 수신호위를 둔다고 생각해 봐. 얼마나 든든해? 네 제자는 딱 봐도 보통 아이가 아닌데 너한테만 맡겨 두기에는 너무 걱정돼서 안 되겠어. 네 제자에 대한 소문이 나면 누구라도 탐낼 수밖에 없잖아. 안 그래? 누가 아진을 납치라도 하려고 해봐. 소문이 들어가면 황상도 가만있지 않을걸? 황군 수만 명이 따라온다고 해봐. 혼자 아진이를 지켜낼 수 있어?”

가만히 놔두면 무슨 말까지 나올지 알 수가 없었다.

북리의천은 독고소영이 그렇게까지 말해 주는 것이 고맙고 흐뭇하기도 했다.

아진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그가 겪어본 바로 북리의천은 남이 자리를 깔아 주지 않으면 자신의 애정사에서는 조금도 진전을 보지 못할 사람 같았던 것이다.

도란도란 얘기를 하는 동안 기척이 느껴지더니 누군가 다가왔다.

“소영아.”

태상가주였다.

“할아버지!”

독고소영이 그를 향해 달려가 그를 끌어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태상가주는 그녀를 안아주면서 시선은 아진과 북리의천을 향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다시 말을 해 줄 수 있겠는가. 내가 설명을 들은 것 같기는 하네만 다시 한번 들었으면 해서 그러네.”

“예, 태상가주님. 몇 번이고 다시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런데 흉수는 보셨는지요.”

북리의천이 묻자 그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구나. 아니. 알기는 안다. 그런데…… 내가 아는 그 자들일 리가 없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태상가주님.”

혹시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 것인가 하며 북리의천이 묻자 태상가주가 말을 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다만 무영검이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네. 그자들은 분명 탈혼단의 살수들이었어.”

“살수요?”

독고세가의 무인들이 살수에게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탈혼단이라는 살수 단체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어떤 살수단체라고 하더라도 결코 독고세가를 이런 식으로 만들 수는 없을 터였다.

“우리 정보각에서 그자들에 대한 정보를 이미 파악해 두고 있어서 알게 된 사실이지. 그자들은 분명히 탈혼단의 살수들이었어. 일급 살수들만 온 것도 아니고 이급, 삼급, 심지어 사급 살수도 끼어 있었는데…… 그자들이 우리 가문의 식솔들을 베어냈네.”

그가 여전히 충격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북리의천은 그가 느끼는 충격과 의혹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북리의천도 독고세가의 전력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절대 살수들에게 그런 식으로 당할 사람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태상가주의 말을 들어 보면 살수들이 살행을 펼쳤다고 하더라도 어느 순간에는 존재를 들킨 것 같았는데 일단 존재를 들킨 후부터는 살수들이 불리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을 상대로 독고세가의 무인들이 일방적으로 밀리다가 마침내는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이 아무래도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사술이네. 아니면 단시간 동안 몸을 강하게 만드는 환단 같은 것을 먹었을지도 모르지.”

북리의천도 고개를 끄덕였다.

작금의 강호에서는 그것을 실제로 봤다는 사람이 없었지만 그런 환단을 혈교에서 만들어 사람들을 전투에서 사용하고 죽게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 환단을 먹으면 자기가 가진 내공과 전력의 네 배까지 끌어내서 발휘할 수 있고 약효가 지속하는 시간이 지나면 단전이 부서진 채 죽음을 맞이한다고 했었다.

“그자들이 어디에 있는지 아신다면 제가 가 보겠습니다. 태상가주님.”

“그러면 소영이와 함께 가 보겠나. 내 생각에는 그곳에 살아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네. 그래도 확인은 하고 싶군.”

독고소영이 그곳을 알고 있어서 이야기는 쉽게 되었다.

아진은 그들의 이야기를 신기하다는 듯이 듣다가 말했다.

“거기에서 시신을 찾으면 가져와 주세요. 스승님.”

“그래. 알았다. 금방 돌아오마.”

북리의천과 독고소영이 사라지고 아진은 자신을 향해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이 집중되는 것을 알아차렸다.

자기가 생각해도 정말 대견하고 기특하겠다 싶었다.

“하…… 아하하하…….”

아진은 어색하게 웃었고 태상가주는 아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떻게 이런 일을 했다는 것인지 나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구나. 본가의 큰 복이다. 무영검의 제자라고 했지?”

“예. 태상가주님.”

“그래. 무영검이 내 손주 사위가 될 뻔했다는 것도 알고 있지?”

“예. 알고 있어요.”

“그래. 지금이라고 해도 늦은 것은 아니다. 내가 알기로 무영검은 아무 여자나 좋아하는 성격은 아닌데.”

“네. 스승님은 지금까지 사고님만 좋아하셨습니다.”

“그래. 그래. 그럴 줄 알았다. 돌아오면 혼례부터 올리라고 해야겠다. 이런 일에 격식을 차려서 뭘 하겠느냐. 오래 기다려온 사람들을 더 기다리게 할 수는 없지.”

그는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구워 먹을 기세로 북리의천을 탐냈다.

어쩌다 보니 가문에 일어난 참사가 더 이상 참사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진은 그런 태상가주를 재미있다는 듯이 보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움직임이 자유로워진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들은 독고세가의 재건에 나섰다.

그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세가의 재건은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산본의가의 아이라고 했느냐. 아진아.”

“네. 가주님.”

어느덧 아진의 옆에는 가주가 있었는데 가주는 독고세가의 방계 중에 아진과 나이가 얼추 비슷한 아이들을 소개해 주면서 정혼을 추진해 보려고까지 했다.

아진은 그때마다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고 아직 정혼을 할 생각은 없다면서 손사래를 쳤다.

독고세가의 가주는 크게 낙심한 표정을 지었고 아진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무진 애를 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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