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러, 의선되다-36화 (36/470)

제36화

36화

독고세가의 태상가주가 어떤 사람이었던가.

그는 추상같던 태상가주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독고 소영을 유난히 예뻐했던 태상가주는 북리의천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자신의 손녀를 데려가서 고생만 시킬 것 같다면서 심술궂게 굴기도 했지만 북리의천이 깊은 병증을 이겨내며 수련을 하는 것을 알고 나중에는 북리의천을 응원하며 조용히 격려하던 명숙이었다.

그런 태상가주가 죽었다는 것이 아직도 실감 나지 않았다.

독고세가에 이르면 얼마나 많은 사람의 죽음에 대해 다시 듣게 될지 몰랐다.

아진은 북리의천의 손을 잡고 그에게 마나를 불어 넣었다.

북리의천은 아진의 온기가 전해지며 마음이 평안해지자 자기가 자신의 어린 제자를 많이 의지하기는 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독고세가로 다가가면서 북리의천은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곳곳에 흑도 방파의 무인으로 보이는 자들이 활개를 치고 돌아다녔다.

독고세가의 힘이 강할 때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지역의 패주와도 같았던 가주였다.

그가 가진 힘은 성주를 부러워할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독고세가가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며 그 빈틈을 다른 이들이 치고 들어온 것이다.

북리의천은 깊은 슬픔을 느끼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아예 아진을 안고 걸었는데 아진은 그의 마음을 짐작했다.

이윽고 독고세가의 커다란 문 앞에 이르렀을 때 북리의천은 그곳을 지키는 위사가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게…… 그 말이 정말 모두 사실이라는 것인가.’

그곳에 오기까지 그의 생각은 수시로 변했다.

보부상이 그런 이야기를 어떻게 들을 수 있었겠냐고도 생각했고 누군가에 의해 소문이 와전되거나 과장됐을 수도 있을 거라고 억지로 믿으려 하기도 했다.

그러나 위사도 없이 텅 빈 정문이 북리의천이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가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몇몇 사람들이 저마다 품에 무언가를 안고 달려 나왔다.

“저놈들이!”

북리의천이 즉시 경공을 펼쳐 그들 중 가장 앞선 자를 붙잡았다.

“모두 그 자리에 서거라! 움직이는 놈들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누군가는 비단옷을 안고 있었고 누군가는 주방의 식기구들을 챙겼다.

품에 안은 것들은 모두 독고세가의 살림살이들이었다.

북리의천의 눈에는 그자들이 모두 악귀 같았다.

“네놈들이……! 네놈들이 그러고도 사람이냐! 그동안 독고세가에서 너희를 어떻게 돌봤느냐. 가족처럼 돌보며 선정을 베풀지 않았느냐! 그런데 독고세가에 화가 미친 틈을 타 노략질을 한다는 말이냐!”

북리의천이 시뻘게진 눈을 하고 소리치자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시선을 외면했다.

그 뒤에서 또 대여섯 명이 욕심 사납게 품에 물건을 끌어안고 달려 나오다가 북리의천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멈췄다.

앞서 달리던 사람들이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얼굴을 찌푸리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조금만 더 빨리 움직였으면 이런 일을 당하지 않고 빠져나갔을 텐데 굼뜨게 움직이다가 걸렸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누가 시키더냐. 누가 너희더러 독고세가가 비었다고 말을 하더냐!”

북리의천이 사나운 목소리로 말하자 사람들이 벌벌 떨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검을 빼 들어야 네놈들이 말을 하겠느냐!”

북리의천이 소리를 지르는 동안 아진은 그의 손을 놓았다.

안의 상황을 살피는 것이 아진에게는 더 중요해서였다.

그러나 지금 북리의천이 하는 일도 나름대로 필요했다.

“스승님. 저는 먼저 안으로 가 보겠습니다. 내원에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분들을 도와드리겠습니다.”

북리의천은 아진을 그대로 보내도 되는 건가 하면서 자기도 금방 뒤따를 생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진의 의술을 믿지 못했다면 붙잡았겠지만 지금 북리의천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진밖에 없었다.

북리의천이 검을 빼 들자 그 앞에 있던 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건을 떨어뜨렸다.

“모두 뒤로 돌아 걸어가거라. 내가 너희를 각 사람을 심문할 것이다. 굼뜨게 움직이는 자들은 이 검에 팔 하나는 잃을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

북리의천의 서슬 퍼런 기세에 눌려 사람들이 달렸다.

그들이 자기들을 가두게 될 곳으로 자진해서 달려가자 북리의천이 밖에서 문을 잠그고 걸음을 옮겼다.

고루거각이 우뚝 서 있는 세가 내에서 진득한 피 냄새가 가득 번졌다.

여러 개의 전각이 부서져 있었고 바닥이 파헤쳐있는가 하면 고즈넉한 정취를 자아내던 오래된 나무가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터져나가 있었다.

“…….”

북리의천은 차오르는 눈물을 가누지 못한 채 내원을 향해 몸을 날렸다.

가는 동안 독고세가의 무인들을 한 사람 정도는 볼 수 있지 않을까 했지만 그것마저도 헛된 소망이었던 듯 그는 독고세가의 사람을 한 명도 만나지 못한 채 내원까지 이르렀다.

‘시신은 어떻게 된 건가. 저런 자들이 시신을 수습해 주었을 것 같지는 않고.’

북리의천은 떨리는 마음으로 내원을 향했다.

금방이라도 독고소영이 달려와 그를 보고 웃음을 지을 것 같은데 그 모든 것이 옛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내원으로 달려가며 북리의천은 자기가 대체 뭣 때문에 이렇게 서두르는 건가 했다.

뭘 보기 위해서 이렇게 서두르는 것인지…….

내원에 펼쳐진 광경을 볼 자신이 있기는 한 건지.

그러나 그곳에는 아진이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북리의천을 움직일 힘이 되었다.

그가 내원으로 달려갔을 때 그 앞은 텅 비어 있었다.

‘그래. 그럴 것이다. 가주의 직계들이 모여 사는 내원에서 사람을 찾아서는 안 될 것이다. 가주님은 세가의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다른 곳으로 가셨을 테니까.’

그리고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북리의천의 머릿속에서는 어느덧 그 생각이 들었다.

“아진아. 아진아. 어디에 있느냐!”

북리의천이 큰 소리로 불렀지만 아진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목소리에 내공을 실었기에 근처에 있기만 하다면 아진이 대답을 했을 텐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북리의천은 마음이 급해져 더욱 서둘렀다.

급하더라도 아진과 함께 왔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사로운 원한 때문에 일을 그르친 것과 뭐가 다른 건가 하면서 그는 아진을 불렀다.

그러다가 원로원으로 이어지는 곳에서 아진의 기척을 느끼고 그가 달렸다.

“……!”

“의천……!”

북리의천은 원로원으로 가는 월동문을 지나려다가 그대로 얼어붙은 그 자리에 멈춰섰다.

“소영…….”

그는 자신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고 그 이름이 귀에 번지는 것을 들었다.

눈앞의 독고소영은 그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다름이 없어 보여 북리의천은 혹시나 자기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했다.

왜…… 왜 그대가 여기에 있는 것인가.

황도의 고관대작 집안으로 시집을 갔다면서 왜 거기에 있지 않고.

너만은 화를 피했을 거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안심을 하고 있었는데 왜 여기에 있다는 것인가.

북리의천은 독고소영이 그 참변을 모두 겪은 것인가 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보지 못했으면 좋았을 텐데.

“소영…….”

북리의천이 다시 부르자 그녀가 그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 중 그나마 빨리 정신을 차린 사람은 그녀였다.

“의천의 제자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있는지 찾아보래. 그리고 가능하면 빨리 자기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 달래.”

“아진이? 아진을 봤어?”

“응. 의천도 서둘러줘.”

“죽은…… 사람이라도 말이지?”

“……응.”

독고소영은 그를 바라보려 하지 않았다.

그녀도 지금 자신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죽은 이의 시신을 모두 모으라는 말을 들었으면 응당 화를 내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할아버지의 몸에 맥과 심장이 뛰고 혈색이 돌아오는 것을 본 터라 그녀는 당장 아진의 말을 따라 움직였던 것이다.

그리고 가다 보면 제 스승님이 보일 테니 같이 시신을 찾아오라고 했다.

처음 원로원에서 아진을 발견했을 때 그녀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폭도로 변한 인근의 백성들은 자객들만큼이나 무서웠다.

그들은 원로원에 있는 것도 닥치는 대로 훔쳐갔다.

그동안 노략질을 하면서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아 기세등등해진 것 같은 이들은 원로원에서 독고소영과 마주치자 움찔하더니 도리어 큰소리를 쳤다.

겁내지 않겠다고 자신을 다독이려고 그런 것인지 독고세가가 그동안 얼마나 폭정을 해 왔냐고 없는 소리를 지어내 외치더니 누군가는 표독스럽게 달려와 독고소영의 옷까지 빼앗아가려 했다.

미친 게 틀림없었다.

어쩌면 그들의 양심이 아직 숨쉬고 있어서, 자기들의 행동이 부끄러워 더 난폭하게 굴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독고소영은 검을 뽑아 들고 자신의 옷을 뺏어 가겠다고 덤비는 아낙의 팔을 베어 버렸다.

그 후에는 옆구리를 벴고 멱을 따는 것 같은 비명을 들으며 사람들이 도망치는 것을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독고소영의 옷에 난 핏자국은 그 아낙의 것이었다.

뜨끈한 피가 얼굴에도 튀었지만 그것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혼자 남은 세가에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왜 나는 함께 죽지 못하고 이런 뇌옥에 혼자 갇힌 것인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그런 생각을 하며 검날을 바라보다 입을 벌리고 자결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그때 아진이 달려 들어왔다.

아진은 독고소영과 눈이 마주쳤지만 그러지 말라는 말도, 뭐 하는 거냐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곧장 태상가주를 향해 달려갔다.

이제는 하다 하다 시신까지 훔쳐가려는 것인가!

독고소영은 화가 나서 벌떡 일어섰다.

수습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갈기갈기 찢어져 죽은 태상가주의 시신을 간신히 모아놓은 것은 독고소영이었다.

“저리 가. 이 금수만도 못한 놈!”

독고소영은 태상가주에게 다가간 아진을 보며 소리쳤다.

그러나 아진은 독고소영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저분의 시신을 이리 옮겨 주세요. 근처에 있는 시신을 전부 옮겨 주세요. 참. 저는 무영검 대협의 제자예요. 북리의천 대협이 제 스승님이세요. 스승님도 오고 계실 건데 여기에 있는 시신을 먼저 제 주위로 옮겨 주시고 그다음에 스승님을 찾아가서 세가 내에 있는 시신을 모두 모아 주세요. 일찍 죽은 분부터요. 그래야 살릴 가능성이 더 커요.”

“…….”

독고소영은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도대체 얼마나 악랄하면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건가 했다.

무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하더니 나중에는 북리의천의 이름까지 들먹였다.

그녀에게 할 수 있는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농락을 하는 것 같아서 가만히 놔두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때 시야에 그 모습이 들어왔다.

태상가주의 손가락이 미약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주머니가 늑장을 부려서 살리지 못한 사람은 아주머니가 죽인 거나 다름없어요.”

그 말에 정신이 들었다.

그 아이가 뭘 하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지금보다 상황이 더 나빠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정신이 반쯤 나가 있는 것 같았는데 목표가 생기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달라졌다.

‘의천…… 의천이 왔어…….’

거세게 뛰는 심장이 원망스러웠다.

가문이 멸문의 화를 당한 순간 듣게 된 옛 정인의 소식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환호하는 제 처지가 안타까웠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