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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35화 (35/470)
  • 제35화

    35화

    “부담 갖지 않아도 되오. 정 부담이 되면 두 분이 오가면서 들은 재미난 얘기나 들려주구려. 내 제자가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는데 내가 아는 이야기는 이미 밑천이 떨어져서 말이오.”

    “그런 거라면 저희가 정말 잘 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의 표정이 금방 환해졌다.

    “공자님은 어떤 얘기를 좋아하십니까? 듣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해 드리겠습니다.”

    “그냥 아무 얘기나 다 좋아요. 어떤 무가가 흥하고 어떤 무가가 쇠하는지. 의문 얘기도 좋고 요즘 유명한 의원이 있으면 그 얘기도 좋고요.”

    “아이고. 정말 잘 찾아오신 겁니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청산유수로 이야기를 해댔다.

    그중에는 북리의천도 처음 듣는 이야기도 끼어 있었다.

    “아 참. 독고세가에 변고가 닥친 일은 혹시 들으셨습니까? 아마 못 들으셨을 것 같은데 저희도 우연히 들었거든요.”

    그들에게서 독고세가라는 이름이 나오자 북리의천의 눈빛이 달라졌다.

    “방금 독고세가라고 했소?”

    “예. 대협.”

    “자세히 말을 해 보시오. 독고세가에 무슨 변고가 닥쳤다는 말이오?”

    “그게…… 하늘도 무심하시지. 독고세가에 대대로 아들이 귀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번에 소가주님의 동생이 아들을 낳았다지 뭡니까? 세가에 큰 경사였지요.”

    아진은 혹시 북리의천이 좋아했다던 독화 얘기인가 하면서 북리의천을 힐끔거렸다.

    북리의천도 그렇게 생각을 한 것 같았는데 이야기가 계속되는 동안 들어 보니 소가주의 남동생 이야기였던 듯했다.

    “그래서 가주님과 태상가주님이 모두 크게 기뻐하면서 아이를 예뻐했는데 그때를 노리고 자객이 침입을 했다지 뭡니까? 하루 이틀 준비한 게 아닌 것 같았다는 얘기가 돌았을 정도였습니다. 땅굴을 파고 들어와서 안에서 세가 무인들을 죽이고 문을 열어 밖에서 대기하던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고 참변을 일으켰다지 뭡니까?”

    “그, 그게 무슨 소리요!”

    북리의천의 기세가 갑자기 달라졌지만 그들은 놀랄 만하다고 생각한 듯 얘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워낙 갑자기 당한 일이라 세가 무인의 절반이 넘게 죽고 태상가주님도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가주님과 장로님들도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위중하다고 들었고 말입니다.”

    북리의천은 말도 되지 않는다며 멍한 얼굴을 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다는 것인가 했다.

    “그게 누구라고 합니까. 감히 누가 독고세가에 그런 일을 벌인다는 말이오!”

    “아직 듣지는 못했습니다. 저희가 오는 동안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곳으로 급히 가는 것을 보고 어렵게 알아낸 이야기입니다. 대협이 저희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지 않으셨다면 저희도 그 이야기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북리의천은 넋이 나간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쯤이면 개방에 의해 소문이 퍼졌을지 모르지만 며칠 전까지는 그 일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지요. 그런 짓을 저지를만한 사람들은 마도뿐이지 않겠습니까?”

    북리의천은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 듯 벌떡 일어섰다.

    그러자 아진도 옆에서 자신의 짐을 챙겨 일어났다.

    “말해 주어서 고맙소. 이건 음식값이오.”

    북리의천은 아직 나오지도 않은 음식값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아진을 바라보았다.

    아진은 느껴지는 게 있어서 북리의천의 손을 잡았다.

    그를 겪은 시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아진은 북리의천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 오랜 시간을 살아오면서 마음에 둔 사람이 오직 독고소영 한 사람뿐이었다면 그녀가 다른 사람과 혼인을 했다고 해도 이런 얘기를 듣고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아진아. 너를 산본의가에 데려다주겠다. 나는 아무래도…… 그곳에 가 봐야 할 것 같구나.”

    북리의천이 말하자 아진이 고개를 젓고 그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저도 같이 가요. 스승님. 아직 살아 계신 분이 있으면 제가 도움이 될 거예요. 스승님도 아시잖아요.”

    “그렇지만 아직 침입자가 누군지도 밝혀지지 않은 상태라면 너에게 위험하다.”

    “그러면 스승님이 지켜주시면 되죠. 가요. 스승님. 스승님만 가시는 것보다는 제가 같이 가는 게 나아요.”

    북리의천은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다. 경공을 펼칠 테니 나를 잘 잡아라.”

    “이번에는 저도 경공을 펼칠게요. 스승님. 거리가 가깝지도 않은데 저까지 데리고 가시려면 내공이 많이 소모될 거예요. 그러다가는 제때 못 갈 거고요.”

    북리의천은 아진의 말을 듣고 놀랐다.

    설마 경공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하면서 그가 아진을 바라보았다.

    “너는 이제 겨우 심법을 익혔다. 그리고 보법과 신법을 알려주기는 했지만 그건 그냥 단순히 이해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내공의 운용 방법도 알아야 하고.”

    북리의천의 말이 길어지려는 것을 보고 아진이 먼저 점소이에게 다가갔다.

    “말을 팔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알려주세요.”

    “마방이라면…… 조금 떨어져 있는데 급한 일이라면 여기에서 중개를 해 주기도 합니다. 팔려고 하시는 말이 밖에 있는 말이지요?”

    점소이는 그것이 아진의 뜻이 아니라 북리의천의 생각일 거라고 여긴 듯 북리의천을 보면서 말했다.

    북리의천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진이 스스로 경공을 펼치겠다고 하는 것을 막을 필요는 없었다.

    가다가 힘이 든다고 하면 그때부터는 다시 자기가 데려다주면 되는 것이다.

    그러다 자신의 내공마저 떨어지면 그때는 다시 말을 사건, 마차를 사건 해서 최대한 빨리 독고세가로 가면 될 터였다.

    점소이와 객잔 주인이 같이 서두른 까닭에 잠시 후 그들은 전표를 품에 넣은 채 경공을 펼쳐 그곳을 떠날 수가 있었다.

    북리의천의 말은 품종이 좋았고 그만한 말이라면 은자 스무 냥은 더 받을 수 있을 텐데 그들에게 급한 사정이 있는 것을 알고 객잔 주인이 터무니없이 헐값에 사들인 거였지만 아진과 북리의천은 모두 그 사실을 알고도 우선은 그곳을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알려 준 대로 해 보아라.”

    “예, 스승님.”

    아진은 북리의천의 앞에서 경공을 펼쳤다.

    신법 중 절기라고 할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북리의천이 알려주었던 것을 정확하게 해 내면서 아진은 순식간에 몇 장을 나아 갔다.

    북리의천은 독고세가에 일어난 일을 들은 후, 처음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의 제자가 괴물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끝도 없이 놀라게 하는 아진을 보면서 웃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 *

    북리의천은 아진이 이십 리를 가도 많이 버티는 거라고 생각했다.

    독고세가까지의 거리가 워낙 멀었기에 우선 아진이 버텨 주기만 하면 북리의천도 자신의 내공을 조절하면서 가다가 그때부터 아진을 안고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객잔을 떠난 후 어느덧 오십 리를 지나고 백 리를 지났다.

    처음에는 허허 웃었지만 나중에는 머릿속에서 땀이 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진의 재주를 보며 북리의천은 어린아이의 재롱을 보는 것처럼 흐뭇해했는데 경공을 펼치는 아진을 보면서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

    당연히 여유를 두고 지켜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조금씩 시간이 지나면서 북리의천은 자기가 가진 실력을 진지하게 내보이지 않으면 아진에게 뒤처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아진은 경공을 펼치며 시시각각 실력이 나아지고 있었다.

    북리의천은 아진과 함께 지내는 한, 놀라는 일을 멈출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힘이 들지는 않는지 물어 보려고 해도 아진이 골똘히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을 걸기도 미안했다.

    아진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동시에 돌아가고 있었다.

    ‘아아…… 내공을 왜 이렇게 움직이라고 한 건지 알겠는데 이건 꼭 필요한 건 아니네. 이걸 한 번에 속도를 유지하면서 혈맥을 지나가는 게 어려워서 어쩔 수 없이 그쪽으로 돌려서 속도를 얻으라는 거였던 것 같은데 나는 이럴 필요가 없는 것 같고. 그보다 이 신법은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아무래도 스승님이 나한테 맞춘다고 너무 으깬 이유식을 주신 것 같다.’

    아진이 갑자기 멈췄을 때 북리의천은 이유를 알지 못한 채 그의 옆에서 멈췄다.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것도 희한한 일이었다.

    누군가 쉬지 않고 경공을 펼치다가 멈췄으면 힘든가 보다, 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할 텐데 아진을 보면서는 힘이 드는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왜 멈추었느냐, 아진아?”

    “스승님. 이것 말고 다른 신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응?”

    만약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수련이 고되어서 머리를 굴리는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북리의천은 자신의 제자가 그런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간이 많았다면 왜 그러는지 이유를 물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그가 보더라도 지금 가르쳐 준 것은 아진에게 너무 쉬웠고 효율도 떨어졌다.

    아진이라면 그보다 더 어려운 것도 얼마든지 깨우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북리의천은 아진이 말하는 대로 새로운 신법을 알려주었다.

    풀 위를 달린다고 해서 초상비라 이름 붙은 신법이었다.

    만약 아진이 그건 못 하겠다고 한다면 그때 가서 한 단계 낮춰서 좀 더 쉬운 거로 알려 주더라도 우선은 초상비를 들이댔다.

    북리의천이 구결을 알려주자 아진은 구결을 입안에 넣고 사탕을 굴려보는 것처럼 이리저리 외워보았다.

    “알겠느냐?”

    “예, 스승님.”

    그걸 몇 번 듣고 다 외웠다고 하는 것도 선뜻 믿기지 않았지만 북리의천은 그대로 내공이 움직일 길을 알려 주었다.

    초상비를 펼치는 동안 내공을 어떤 식으로 운용해야 하는가 하는 것도 설명을 해 주었는데 그거야말로 아진에게는 가장 쉬운 것 중 하나였다.

    헌터로 지내면서 마나의 운용만큼 그가 집중했던 것도 없었는데 내공이 익숙해지면서 그것을 운용하는 것이 갈수록 쉬워졌다.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으면 말을 해 보아라.”

    북리의천은 내공이 어떻게 흘러가야 하는지 자기가 알고 있는 선에서 설명을 했지만 아진은 그의 설명을 들으며 이미 세혈에서 어떤 식으로 지나야 할지도 터득을 했다.

    지금부터 알아야 할 것은 각각의 부위에서 어떤 속도로 흘러가야 하는지의 문제였는데 북리의천은 세세히 그것을 설명해 주었다.

    아진은 북리의천의 말을 무섭게 흡수하듯 빨아들였고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말했다.

    “제가 한번 해 봐도 될까요, 스승님?”

    북리의천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 해 보아라. 아진아.”

    그는 어린 제자가 이제 곧 좌절에 부딪힐 거라고 생각했지만 잠시 후에 그는 깨달았다.

    이제부터 좌절은 내내 자신의 몫이 되리라는 것을.

    * * *

    독고세가에 이른 것은 객잔을 떠난 지 닷새만이었다.

    북리의천은 그렇게 빨리 그곳에 도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감회에 젖을 틈도 없었다.

    “스승님. 어떤 일이 벌어져도, 어떤 모습을 보게 되더라도 너무 참담하게 여기지 마시고 마음을 굳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진이 의젓하게 말하자 북리의천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진아. 그러겠다.”

    아진이 북리의천의 손을 꼭 잡았다.

    북리의천 자신은 알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의 가슴은 이미 심하게 요동하며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다.

    단지 자신의 옛 정인 때문만이 아니었다.

    근래의 독고세가가 이전만 한 위명을 누리지는 못하고 있다고 하지만 누가 있어 독고세가의 안으로 들어가 그들에게 혈겁을 벌인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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