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화
34화
전에 가지고 있던 마나는 새로 쌓아지는 내공을 동생처럼 아껴주는 듯했다.
그것은 명백히 달랐지만 마나는 내공과 아주 유사한 형태로 바뀔 수가 있었다.
그 마나의 양만 해도 지금 상태에서 삼 갑자 이상이라 아진은 자기가 북리의천에게 무공을 배우기만 하면 상승무공도 금방 해낼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비단 아진만이 아니었고 북리의천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북리의천은 아진에게 가르칠 것을 하루에도 몇 번이나 생각하다가 다시 바꿨다.
이런 식으로 가르쳐나가면 되겠다고 생각하면서 아진에게 가르쳐주면 아진이 아아 하고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고 그것을 제 나름대로 재해석해서 금방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걸 보자 맥이 빠진 것이다.
“일단은 무인들의 세계를 곁에서 경험해 보는 것도 좋은 교육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먼저 평성에 가 보자.”
북리의천의 말에 아진은 기대를 했다.
북리의천은 가는 동안 자신의 첫 강호행에 대한 이야기도 해 주고 처음으로 마음을 주었었던 여인에 대한 얘기도 해 주었다.
북리의천은 말을 하다 말고 아직 어린 아진에게 할 얘기는 아니라고 했지만 아진은 그 말이 그렇게 억울할 수가 없었다.
“스승님. 그건 저에 대해 오해하시는 거예요. 저는 스승님이 하시는 말씀을 다 이해할 수 있어요. 아마 스승님을 저만큼 잘 이해하는 사람은 없을걸요? 제가 오래 살았으면 저는 스승님처럼 살았을 거라 스승님 얘기를 다 듣고 싶어요.”
북리의천은 아진의 말을 듣고 웃었다.
그로서는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 방법이 없었다.
지구에서 가장 강한 헌터가 되기까지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내 준 적도 없이 외로운 길을 혼자 내달렸던 아진은 북리의천에게 묘한 동지 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북리의천이 자신의 의지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병 때문에 여자를 깊이 사귀거나 가정을 꾸릴 생각을 포기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어쨌든 북리의천의 모습은 그곳을 떠나올 때의 아진과 여러모로 비슷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북리의천이 좋아한 여인이 있었다는 말을 듣게 되자 아진은 흥미가 생겼다.
만약 나도 다르게 살 수 있었다면 좋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었을까?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조롱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내가 모르던 사람 중에 나에 대해서 좋게 말하고 좋게 생각해 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너무 빨리 포기해 버린 건가?
북리의천의 이야기는 아진에게 많은 생각을 들게 했다.
북리의천은 이 조그만 아이가 뭘 안다고 그렇게 집요하게 관심을 보이나 하면서도 일단 아진이 뭔가에 꽂히면 그걸 그냥 넘어갈 방법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큼큼 헛기침하며 이야기를 했다.
“대단한 사랑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냥 뭐…… 흔하고 흔한 얘기다. 세가지연에 가서 눈이 맞았다는 얘기지.”
북리의천은 말을 하는 동안 쑥스러워서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이 나이에 어린 제자 앞에서 사랑 이야기를 하다가 얼굴을 붉히게 될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한 그였기에 그는 지금의 상황이 곤혹스러웠다.
그러나 아진은 북리의천의 앞자리에 타서 북리의천을 돌아보기가 매우 힘든 자세였는데도 불구하고 고개를 뒤로 젖혀서 북리의천을 보며 얘기를 계속해 달라고 졸랐다.
“아니. 대단할 건 없다는 데도 그러는구나. 나는 너도 알다시피 어려서부터 병이 있었고 다른 사람과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질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그건. 그래. 운명이었지. 하…….”
북리의천이 회상에 젖은 얼굴로 시선을 멀리 둔 채 말했다.
아진은 흥미진진해져서 북리의천을 바라보았다.
세가지연…….
나도 그럼 세가지연에 가서 기회를 노려볼까?
어느덧 그런 생각까지 하는 아진이었다.
자기에게는 세가지연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는 아주 기본적인 생각도 들지 않을 정도로 북리의천의 이야기에 푹 빠져 있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한자리에 모여 있는데 유독 작고 귀여운 소저 하나만 자꾸만 다른 곳을 맴돌더구나. 그러다 보니까 나랑 자주 마주쳤지. 나도 한자리에 모여 있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맴돌았거든. 아무 근심도 없는 것처럼 훗날이 당연히 다가올 거라고 생각하면서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부담스러웠던 것 같은데. 어쨌건 그렇게 낙엽처럼 구르고 있는데…….”
북리의천의 얼굴에는 어느 순간부터 웃음이 떠올랐다.
이제 마흔 중반쯤에 들어선 북리의천이 옛 생각을 떠올리면서 그렇게 계속 웃음을 짓는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낙엽 두 개가 굴러다니다가 자꾸 마주치게 된 거고 그 아이가 먼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북리 소협은 왜 다른 사람들이랑 어울리지 않으세요? 그랬던 것 같구나.”
북리의천은 그 말을 해 놓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게 뭐라고.
전혀 대단한 말도 아닌 그것을 참 오래도 간직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아진은 자기에게도 그런 기억이 있지 않을까 하며 기억 여기저기를 들쑤셔봤다.
함께 레이드를 하러 간 여자 헌터 중에 자기에게 말을 걸었던 사람은 없었던가 하고.
그러나 떠오르는 것은 한결같이 다 안 좋은 기억들뿐이었다.
‘저 사람이 그 헌터래. 치유력을 가졌다는 헌터.’
‘신기하다. 그런데 설마 그 치유력도 5나 10이거나 그렇지는 않겠지?’
‘듣겠다. 조용히 말해. 그나저나 그런 스탯으로 각성할 거면 그냥 각성을 하지 말지. 일반인으로 살았으면 헛바람 안 들고 잘 살았을 텐데.’
‘그러게 말이야. 저러다가 레벨이 오르면 뭘 해? 그래 봐야 하급 헌터 스탯 정도나 될 텐데.’
아진은 괜히 과거 일을 떠올리다가 기분이 나빠져서 팽 토라져 버렸다.
그것도 모르고 북리의천은 옛이야기를 술술 늘어놓았다.
처음에는 아진이 부탁해서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하는 것 같았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독고소영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 아진아.”
“독고소영…… 요? 혹시 그분이 스승님이 연모하시던 그분이신가요?”
“그래. 독고세가의 망나니라고 불리던 문제아 아가씨였지.”
그래놓고 북리의천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네에?”
아진은 생각지도 못한 얘기에 눈이 동그래진 채 북리의천을 바라보았다.
스승님의 취향이 그런 쪽인가? 하면서 머릿속이 분주했던 것이다.
작고 귀여운데 망나니에, 문제아라니.
아진은 그 여러 가지 키워드를 어떤 식으로 조합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소영이라는 이름보다 독화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렀지. 독화라는 이름은 대대로 사천당가의 소저 차지가 되는 별호였는데 소영이 그 별호를 뺏어 버렸지. 소영이 그 별호에 욕심을 낸 것은 아닐 거다마는 워낙 독보적으로 어울리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을 거다.”
“왜요, 스승님?”
“소영은 정말 독화 같았거든.”
그러고는 북리의천이 몸을 들썩이면서 웃었다.
공유하지 못한 추억을 떠올리면서 폭소를 터뜨리는 걸 옆에서 보는 건 참 난감한 일이었다.
그러나 아진은 북리의천이 그렇게 신나게 웃는 모습을 보면서 기분이 좋았다.
“지금은 어떻게 되셨어요? 그 후로도 자주 만나셨어요. 스승님?”
“혼인을 한다고 하더구나. 황도의 고관대작 자제와. 가기 전에 한번 보고 싶다고 연락을 해 왔다만 내가 봐서 뭘 하겠느냐. 그래서 보지 않았다.”
“후회는 안 되세요?”
“후회를 해서 뭘 하겠느냐? 할 이야기도 없었고. 잘 살라고 말을 해 줘야 했겠지만 그 말은 안 나올 것 같았다. 그때는 나한테 얼마나 시간이 남았는지 알 수가 없었던 터라…….”
북리의천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병이 아니었다면 연인을 포기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마음이 보였다.
“그분을 한 번 찾아가 보는 건 어떨까요, 스승님? 그냥 멀리서 잘 지내는지 보고 와도 되는 거잖아요.”
“아서라. 지난 인연은 그냥 지나간 것으로 두면 된다.”
북리의천이 말을 하며 아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느덧 그들이 탄 말은 평성에 이르고 있었다.
* * *
북리의천은 아진이 피곤할 거라고 생각하며 우선 객잔부터 잡았다.
자기 혼자만 하는 여행이라면 그냥 몸을 눕힐 수 있는 곳이면 족할 것이고 노숙도 불편하지 않을 테지만 아진을 위해서 그는 가장 좋은 객잔으로 들어갔다.
아진도 북리의천이 자기 때문에 그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맙지도 않고 돈만 아까운데 어차피 말을 한다고 해도 북리의천이 고집을 꺾을 것 같지도 않아서 그냥 그가 하는 대로 놔두고 있었다.
북리의천은 술을 즐기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가끔 기분에 따라 몇 잔씩을 마시곤 했다.
북리의천이 혼자 기분 좋게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아진도 술 생각이 날 때가 있었는데 자기도 한 잔만 달라고 할 수는 없어서 부러운 시선으로 북리의천을 보기만 했다.
“평성 제일 객잔이라고 하더구나. 여기가. 우리가 잘 찾아온 게 맞는 것 같다.”
북리의천은 사람이 많이 오가는 객잔으로 들어가면서 아진의 손을 꼭 잡았다.
행여나 놓칠세라 그러는 거였는데 북리의천이 아진을 챙기는 게 눈에 다 보이자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아진을 바라보았다.
처음에 산본의가를 나설 때만 해도 그냥 평범하고 단정한 차림이었는데 지금의 아진은 명문세가의 귀공자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귀티가 줄줄 흘렀고 옷차림도 그랬다.
걸을 때마다 질 좋은 비단이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사람이 정말 많아요. 스승님.”
“그렇구나. 과연 평성 제일 객잔답구나.”
북리의천이 들어가자 점소이가 달려나와 허리를 굽신거렸다.
“어서 오십시오. 대협. 3층으로 가시지요. 거기가 전망도 좋고 조용합니다.”
북리의천이 아진을 바라보자 아진이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곳에서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고 싶었던 것이다.
북리의천은 아진의 뜻을 알아차리고 점소이에게 말했다.
“괜찮으니 우리도 1층에 자리를 찾아주게.”
“1층에는 자리가 없어서 합석을 하셔야 할 텐데요. 대협.”
“합석도 괜찮네.”
그것도 새로운 즐거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며 아진이 눈을 빛내는 동안 점소이가 탁자 하나에 두 사람이 앉아 식사를 하는 곳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손님들. 잠시 합석 좀 해 주시죠.”
그들은 보부상인 듯 바닥에 짐이 많았는데 북리의천을 한 번 보고는 단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히 식사를 하는데 미안하오. 나와 내 제자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어두워 혹시 그런 얘기를 들을 수 있을까 해서 합석을 부탁했소. 내가 죽엽청을 한 병 사리다.”
북리의천이 능숙하게 말하자 그들의 표정이 단번에 밝아졌다.
한눈에 봐도 지체 높은 사람이 분명하고 허리에 찬 검집도 결코 평범해 보이지 않는데 그런 사람이 정중하게 대우를 해 주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아이고. 나으리. 여기가 저희 객잔도 아니고 사람이 많으면 합석도 할 수 있는 일이지요. 괜히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보부상의 말에 북리의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음식을 주문했다.
“여기에서 가장 잘 하는 것으로 네 개를 가져다주고 죽엽청 한 병을 같이 주게.”
“예. 대협.”
북리의천은 보부상들이 먹고 있던 소면 그릇을 본 듯 그들의 것까지 다시 주문을 했다.
바닥에 있는 봇짐을 보고 그걸 다시 짊어지고 가려면 힘이 들겠다고 생각한 듯했다.
그들은 느닷없는 호의에 어쩔 줄 몰라 했고 자기들은 이미 식사를 마쳐 간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