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화
31화
북리소은 일행이 도착하고 의가는 다시 한번 활기를 띠었다.
북리소은은 자기가 그렇게 격렬하게 환영을 받을 거라고 생각을 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왜 그렇게 환영을 했는지 곧 알아차렸다.
북리소은은 아직 의생의 신분이었지만 의원의 업무를 바로 맡아도 부족함이 없었다.
탁자가 하나 더 놓이고 북리소은에게 환자들이 안내되자 줄이 훅 짧아졌다.
“내년에는 나도 진료를 보기로 했어.”
“의원이 되는 거야. 형님?”
“응.”
도종이 자랑스럽게 말했고 아진은 진심으로 그를 축하해 주었다.
사실 도종은 지금도 다른 의원들에 비해 조금도 실력이 뒤지지 않았다.
부족한 것은 실전 연습이었는데 아진의 도움으로 실전 연습을 많이 하면서 이제는 자신감도 많이 붙은 상태였다.
“환자가 많을 때는 내가 시침을 하는데 시침을 잘한다고 소문이 났어.”
“지금도 환자가 많잖아. 형님.”
“응. 그래서 원래는 해야 하는데 네가 있는 동안에는 너랑 같이 시간을 보내라고 아버지가 특별히 허락해 주셨어.”
그러면서 도종이 아쉬운 얼굴로 아진을 바라보았다.
“아진아. 오래 걸리겠지? 그래도 1년에 한 번은 올 수 있어?”
“그렇게 할게. 형님.”
“그래.”
도종이 아진을 꼭 안아주었다.
“내 동생은 언제 크냐? 너는 왜 점점 줄어드는 것 같냐?”
“형이 쑥쑥 크니까 그렇지.”
“너도 빨리 좀 크지.”
도종이 우쭐해하며 말했다.
“이제 혈천방은 본가에 와서 행패를 부리지 않지?”
“그럼. 당연하지. 북리세가 무인이 본가에 머물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고 네가 북리세가의 무인이 될 거라는 소문도 나고 그래서 이제 아무도 우리를 함부로 못 대할 거야. 혈천방은 여전히 우리 단골손님이고.”
“이제 밖에서 일은 안 저지르고 다닌대?”
“어떻게 그러겠냐? 그래도 전보다는 나아졌대. 보호세도 자진해서 내리고 사람들한테도 심하게 안 한대. 아 참. 약초를 캐오는데 제법 도움이 돼.”
“그래? 쓸만해?”
“응. 아버지가 그냥은 못 받겠다고 하시면서 돈을 주시려고 해도 한사코 돈을 거절하더라고? 자기들은 어차피 약초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모르니까 그걸로 약을 만들어서 자기들이 다칠 때 치료만 잘해 주면 된다고 하더라.”
“잘됐네.”
“그 사람들이 원래 그런 사람들이 아니잖아? 그래서 다들 희한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도대체 어디서 무슨 일을 당했기에 사람들이 그렇게 순한 양이 된 건가 하고.”
도종과 도란도란 얘기를 하는 동안 아진의 눈에 몇몇 사람의 중증 환자가 보였고 아진은 그들에게 다가가서 안내를 하는 것처럼 하며 몸에 손을 대고 마나를 밀어 넣었다.
“저쪽이 줄이 짧으니까 저쪽에서 기다리세요. 아주머니. 저 의원님도 환자를 아주 잘 보세요.”
“고맙구나. 아이고. 똘망똘망하니 예쁘게도 생겼네.”
도종은 아진이 일손을 돕고 싶어서 그런 거라고만 생각하고 흐뭇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돌아온 아진이 도종에게 질문을 이어나갔다.
“형님. 제선문은 아직 조용해?”
“일단은 조용한데 모르겠어. 사람들이 문제야. 여기에서 나았으면 그냥 여기에서 나았다고만 하면 되는데 그동안 제선문에 돈만 갖다 바쳤다고 하지를 않나, 제선문의 의원들은 사기꾼들이라고 하지를 않나. 그런 소리를 해대니까 내가 제선문 사람들이라면 본가에 대해서 저절로 나쁜 마음이 생길 것 같아.”
“그런 말을 못 하게 해야지.”
“그런다고 사람들이 듣냐? 그런데 어차피 여기에서 병을 못 고치면 또 제선문으로 갈 사람들이야. 그리고 거기 가서는 우리 욕을 하겠지.”
아진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도종이 그런 말을 하면서 인간들에게 환멸을 느끼는 것 같은 표정을 짓자 웃음을 터뜨렸다.
떠나기 전 북리의천은 북리세가에서 가져온 선물과 함께 의학당을 지을 돈을 가주에게 주었다.
가주는 절대 받을 수 없다고 했지만 북리의천은 강경했다.
“아우. 이건 산본의가만을 위한 결정이 아니네. 이렇게 해서 의원들을 양성하면 우리 북리세가에 일이 생길 때 의원들을 보내서 우리를 도와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때를 위해 투자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받아주게. 나는 다른 곳에서 가르침을 받은 의원 열 명보다 아우에게 배운 의원 한 사람에게 더 믿음이 갈 거네. 그래서 그런 거니 좋은 의원들을 많이 만들어 주게.”
“형님…….”
“세가로 돌아가면 무인을 몇 명 더 보내겠네. 여기에 와서 의가의 상황을 직접 보니 우리가 뭘 지원해 주는 게 도움이 될지 알 것 같군.”
“이렇게 신세를 지면 제가 어떻게 다 갚는다는 말입니까. 형님.”
“그런 소리 하지 말게. 그동안 나는 아진이를 잘 가르치겠네. 제수씨가 조카를 낳을 때 오도록 하지.”
가주는 못 이기겠다는 듯이 북리의천을 보다가 웃음을 지었다.
지금껏 깊은 속에 있는 마음을 털어놓고 얘기를 나눌만한 친구를 가져본 적이 없던 그였는데 북리의천과 함께 한 며칠 동안 십수 년의 우정을 쌓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본가가 북리세가에 받은 은혜를 반드시 돌려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겠습니다.”
가주가 말하자 북리의천이 손을 저었다.
“아니야. 그러면 안 되네. 그런 일이 생긴다는 건 우리에게 변고가 생긴다는 뜻이 되는데 그러면 안 되지. 그러니 우리는 웬만하면 서로 보지 않고 이대로 쭉 지내는 게 좋네.”
북리의천의 말에 두 사람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떠나기 전, 북리의천은 소은에게도 여러 가지 당부를 했다.
북리세가의 명성에 해가 되는 일이 없도록 항상 말과 몸가짐에 각별히 신경을 쓰라는 거였는데 소은은 걱정하지 말라며 그들을 배웅했다.
그들이 막 산본의가를 떠나려 할 때 한 사람이 수레를 끌고 먼지를 폴폴 풍기며 달려왔다.
“다 비켜. 다 비키란 말이다. 여기 죽어 가는 사람이 있다. 다 비켜!”
눈물 콧물을 쏟으며 달려온 사람은 혈천방의 짝눈이었다.
아진은 묘하게 기시감을 느꼈다.
짝눈은 처음에 아진을 알아보지 못하고 수레를 끌고 달려오다가 마침내 아진을 발견했다.
그러고는 이대로 계속 와야 하는 건지 멈추고 도망쳐야 하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는 듯 머뭇거렸다.
그러나 빠른 속도로 달리는 수레를 끌다가 주춤거린 것은 엄청난 위험을 초래했다.
계속 움직이는 수레 때문에 그것을 끌던 짝눈이 넘어질 위기에 처하자 북리의천이 바닥을 박차고 가서 수레를 한 손으로 밀었다.
그것을 보고 있던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세상에. 저걸 한 손으로 세우다니. 역시 무영검 대협이시네.”
그 소리를 들은 짝눈의 눈이 커졌다.
아진만 해도 무서운데 이제는 북리세가의 그 무영검 대협이라는 말에 그대로 오줌을 지릴 것 같았다.
“무슨 일이에요. 아저씨?”
아진이 수레로 다가와 묻자 짝눈이 정신을 차렸다.
생각을 해 보니 근래에는 산본의가에 잘못 한 것도 없고 자기들 패거리가 다친 것도 어떻게 보면 산본의가 때문이기도 해서 조금 용기를 내 보았다.
“고, 공자님이 약초를 캐오라고 해서 약초를 캐러 갔다가 산채에 있는 놈들에게 습격을 당했습니다. 전부터 깐족거리면서 약초를 캐지 말라고 했는데 저희가 누굽니까? 혈천방 아닙니까? 역사를 따져봐도 미령에 터를 잡은 건 저희가 더 오래됐어요. 그런데 늦게 굴러들어온 놈들이 통행세를 내라는 둥 약초는 자기들 것이라는 둥 지랄을 해 대는데 저희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짝눈은 일단 한 번 말문이 터지자 그때부터 하소연을 줄줄이 이어나갔다.
다행히 수레에 누워있는 환자들을 보고 밖에 있던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가 가주와 의생들이 달려 나왔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상처가 그리 심하지는 않아서 아진도 발길을 다시 돌리지는 않았다.
다만 짝눈에게 물어서 그 산채가 어디에 있는지는 자세하게 알아두었다.
짝눈은 신이 나서 산채에 대한 얘기를 시시콜콜 털어놓았다.
“같잖은 놈들이 이름이 비룡채라고 아주 무슨 용 나올 것 같은 이름을 갖다 붙여놨어요. 녹림채 소속이라고 해서 무슨 소리냐고 따지면서 우리가 녹림채 총채주님을 뵌 적이 있고 녹림채 소속의 산채들을 다 안다고 거짓말을 섞어서 협박을 했더니 농림채라고 자기들끼리 따로 만든 게 있다잖아요? 그래서 하도 같잖아서 좀 이죽거렸더니 바로 죽방이 날아오잖아요.”
“…….”
짝눈도 나중에는 창피했는지 고개를 돌리고 시선을 회피했다.
“어찌 됐건 그 작자들 때문에 약초를 캐는 게 어려워졌다는 거잖아요?”
“네. 네. 맞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공자님!”
짝눈은 드디어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혹시 공자님이 그놈들을 해치워 주시려고요?”
“뭐. 못할 건 없죠. 하지만 먼저 조건이 있습니다.”
짝눈의 얼굴이 금방 일그러졌다.
아진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만큼 쉬운 얘기는 나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크게 어려운 건 아닐 거예요. 정말이에요.”
잠시 후 짝눈은 약초제서 사본 한 권을 들고 있었다.
약초제서에 나와 있는 약초로 매달 서른 근씩을 뜯어다 산본의가에 가져다 달라는 거였는데 어차피 짝눈에게는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안 한다고 하면 비룡채를 토벌해 주지 않을 것 같은데 좁은 땅덩어리를 비룡채와 나눠 먹어서는 영 유지가 힘들었던 것이다.
짝눈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했고 아진은 나중에 와서 약초를 제대로 캐 왔는지 꼭 확인할 거라고 말하며 그곳을 떠났다.
북리의천은 아진이 짝눈과 협상을 하는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그 모습을 보고만 있었는데 보면 볼수록 놀라움이 커져만 갔다.
‘내가 다섯 살 때도 저랬었나?’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 나이 때 자기는 어른들과 세상을 무서워하며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은 순진하게 다 믿었던 것 같았다.
“스승님. 이제 스승님이 실력 발휘를 하실 차례에요.”
후련한 표정을 지으며 아진이 말했다.
“내가? 그렇구나. 그러면 네 견식을 높여 줄 테니 잘 보고 배우도록 하거라. 아진아.”
“네. 스승님.”
비룡채로 향하는 두 사람의 뒷모습은 소풍이라도 가는 것처럼 즐거워 보였고 설레는 것 같기도 했다.
* * *
비룡채에는 여기저기에서 험하게 굴러먹다가 요즘 각광 받는 업종이 산적이라는 말을 듣고 뜻을 뭉친 한 무리의 흑도 패거리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처음에는 잘 아는 사람들로 여섯 명이 모여서 시작을 했는데 산적질을 하다 보니 아무래도 머릿수로 밀리는 일이 자주 생겨 자기들의 인맥을 총동원해서 삼십 명까지 인원을 늘렸다가, 산채의 운영도 다 돈이라는 것을 깨닫고 다시 열 명 정도를 방출했다.
이제 어중이떠중이는 전부 정리를 했고 저잣거리에서 힘깨나 쓴다는 사람들만 남아 있었다.
“왜 진작 여기로 안 왔나 몰라. 여기는 인근에 무가도 없고 있다고 해 봤자 조그만 흑도 방파 정도라 산채를 세우기에는 딱인데 말이야.”
채주가 자신의 결단력에 만족하며 말하자 산채의 다른 이들도 머리를 주억거렸다.
모두가 채주와 같은 생각인 것은 아니었다.
돈이 있고 사람이 있으면 왜 무가가 들어서지 않겠는가.
무가처럼 돈 냄새에 예민한 곳도 없었다.
사업이 되겠다 싶으면 남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서 떡하니 깃발을 꽂고 세력을 키워가는 게 그들이었다.
무가의 무인들을 먹여 살리고 무가를 운영해 나가려면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무가가 없다는 것은 이곳이 그만한 돈이 돌지 않는 곳이라고 해야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