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화
30화
“너무 격식을 차리지 말고 편하게 대해 주십시오.”
북리의천이 가주에게 말하자 가주가 호탕하게 웃었다.
“무영검 대협께 이런 말을 듣게 되다니 가문의 큰 영광입니다.”
“무슨 그런 말이 다 있습니까. 저야말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기에 오기 전부터 이미 산본의가의 명성에 대해서 많이 들었습니다만 와서 보니 명불허전입니다. 아진만 보더라도 가주님이 얼마나 훌륭한 분인지 알 것 같습니다.”
“제 얼굴에 그리 금칠을 해 주시니 부끄러울 뿐입니다.”
“금칠이 아닙니다. 사실을 말한 것뿐입니다.”
북리의천과 가주가 주거니 받거니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진료가 끝이 납니다. 의원의 수가 늘기는 했지만 아직은 제가 옆에 있어 주어야 마음이 놓여서 그러는데 잠시만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저녁을 먹은 후에는 좋은 술을 대접하지요. 그 사이에 아진이와 함께 산본을 둘러보시는 것은 어떠실지요. 대협.”
“그것도 좋은 생각입니다. 저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말고 어서 일을 보십시오.”
북리의천이 흔쾌히 놓아주자 가주가 일어나며 아진을 보고 애정 가득한 웃음을 지었다.
북리의천은 가주가 참 다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흐뭇해했다.
“저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가모님. 아진이를 오랜만에 보셨을 텐데 궁금한 것도 물어 보시고 이야기도 나누시지요. 저는 여기에 있는 것도 불편하지 않습니다.”
북리의천은 아진과 함께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다가 가모가 서운해하는 걸 보고 계획을 바꿨다.
“정말 그리 해도 되겠는지요. 아진이 딸아이처럼 살갑게 제 마음을 잘 살펴 주다가 떠나서 많이 그립기는 했었습니다.”
가모는 북리의천의 호의를 사양하지 않고 말했다.
“예. 괜찮습니다. 저도 제 제자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게 많으니 그 얘기도 많이 해 주십시오.”
“저희 아진이가 잘할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가모가 아진을 무릎에 앉히고 말하자 북리의천이 웃음을 지으며 북리세가에서 있었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가모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했다.
“그게…… 정말인가요? 세상에. 그래서요?”
가모는 처음에 북리의천을 어려워했지만 일단 북리세가의 이야기가 나온 후부터는 훨씬 적극적으로 그에게 질문 공세를 이어나갔다.
북리의천은 아진이 의원에게 공격을 당했다는 얘기를 해야 하나 망설였는데 그 이야기는 아진에게서 나왔다.
아진은 그 이야기를 모험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고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
그러다가 가모에게서 말이 없어지는 것을 알고 아차 싶었다.
“어머니?”
“음…… 그래. 얘기를 계속해 보아라.”
밝기만 하던 가모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보면서 북리의천은 실수를 했다고 생각했다.
북리세가가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아진을 북리세가에 보내주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혹시 세가에 머무는 것이 안심되지 않는다면 아진이와 함께 강호를 주유할까 합니다. 가모님. 가모님께서 걱정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게 할 테니 부디 믿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하시고, 아진이 역시 검술을 배우고 싶어 했으니 제가 막을 권한은 없겠지만 이런 얘기는 상상도 못 했던 것이라…….”
가모는 생각이 많아진 얼굴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만약 아진이 자신의 말을 들어 주기만 할 것 같으면 가지 말라고 말리고 싶었다.
아진은 신이 나서 북리세가에서의 일을 말하다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한 듯 갑자기 얌전해졌다.
할 말을 잃은 듯 눈만 깜빡거리는 것이 북리의천과 함께 이 난국을 타개할 방법을 찾으려는 것 같았다.
“세가의 가주님께서도 아진이를 아주 예뻐하십니다. 세가의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아진이를 예뻐하지요. 그도 그럴 것이 제가 워낙 세가에서 모두의 존경을 받아왔던 터라. 하하하.”
북리의천은 가모의 마음을 풀어 주기 위해 평소에 하지 않던 자기 자랑까지 늘어놓아 가며 말을 해 주었는데 북리의천이 그런 말을 해 주자 가모의 마음도 조금씩 녹기 시작했다.
“가주는 북리세가의 가주와 가주의 직계만이 익힐 수 있는 검술과 무공도 아진에게 전수해도 된다고 특별히 허락을 해 주었을 정도였습니다. 모두 은공을 대하듯이 아진을 대하고 있습니다.”
“저희 아진이가 그랬다는 말이지요?”
가모의 눈에는 금세 자랑스러움이 맺혔다.
“아진이는 의술도 뛰어나지만 무의 묘리를 이해하는 머리가 정말 남다릅니다. 제가 가르쳐 준 초식을 완전히 이해하고 형을 탈피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변화시켜 적용을 하기도 합니다. 아진이 지금은 어리고 몸도 작지만 아진은 제가 가르쳐주는 것을 자신의 작은 몸으로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서 찾아냅니다.”
그것은 아진도 직접 들은 적이 없는 말이었기에 아진은 신기해하며 귀를 기울였다.
“그렇군요. 만약 대협께서 아진의 부모라고 하신다면 아진에게 의술을 권하고 싶으신가요, 무공을 권하고 싶으신가요? 저는 아진이 남에게 당하지 않고 자신의 안전을 지킬 수 있을 정도로만 강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지금 대협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아진이 그쪽으로도 큰 재능을 가진 것 같아서 여쭤봅니다.”
“저라면 당연히 무인의 길을 가라고 할 것입니다. 가진 재능이 너무 뛰어나서 그걸 묵히는 것이 너무 아깝습니다. 물론 의술에 대한 재능도 뛰어나고 그 일 역시 고귀한 일이지요. 그렇지만 저는 장차 아진이가 검술로 무림에 이름을 날리게 될 거라고 의심하지 않습니다. 아진이에게도 말했지만 이 아이는 분명히 천하 제일인이 될 것입니다.”
“……!”
가모는 북리의천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자기가 그에 대해 잘못 생각한 것 같다고 느꼈다.
진중하고 생각이 깊다고 여겼는데 제자 앞에서는 자기나 상공과 똑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가모는 북리의천의 말을 완전히 믿지는 못했다.
북리의천이 무림에서 손꼽히는 명숙이라고는 하지만 아무리 북리의천이라고 해도 아진을 천하 제일인으로 만들어 줄 수는 없을 것 같았던 것이다.
북리의천은 가모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이 이해가 되었다.
그러면서 혼자서 웃음을 지었다.
‘숙명일지도 모르겠군.’
이런 제자를 데리고 다니다 보면 허풍을 친다는 말은 수도 없이 듣게 될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사실인 걸 어찌해야 할까.
북리의천은 가모의 품에 안긴 아진이 가모의 어깨에 조그만 머리를 기대고 가모의 배를 어루만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빤히 보고 있으면 가모에게 예가 아닐 것 같아서 고개를 돌리려고 해도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저절로 다시 눈이 가곤 했다.
가모도 북리의천이 자신과 아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진에게 그만하라고 말을 하지 못했다.
아이를 둘이나 낳았으면서도 태기를 느끼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아이가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이겠지만 이번 아이는 얌전하고 조용했다.
며칠 동안 속이 더부룩하다는 기분이 들어 상공에게 진료를 해 달라 했지만 그도 태기가 있다는 것은 상상하지 못해서였는지, 아니면 그때는 아직 느껴질 때가 아니어서 그랬는지 임신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아마 오늘 저녁쯤에는 다시 진료해 달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녀는 그때를 기다렸다.
그때쯤 되면 모든 것이 확실해질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머니의 배를 어루만지는 아진의 표정은 사실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평화롭지 않았다.
‘생명력이 왜 이렇게 약하지?’
아진은 걱정이 됐다.
처음에는 마냥 기뻤는데 배 속의 아이가 너무 약한 것 같아서였다.
그는 마나를 불어넣어 아이에게 힘을 주었다.
‘나는 네 형님이야. 네가 태어나면 내가 건강하게 해 줄게. 그러니까 그곳에 있는 동안은 네가 너를 잘 지키면 좋겠다. 나오기만 하면 내가 좋은 걸 많이 줄게. 정말 많이 예뻐해 줄 거고.’
아진의 따뜻한 마나가 태를 향해 빨려들어 갔다.
* * *
“형님. 어서 제 잔을 받으십시오.”
“아우. 나는 정말 많이 마셨네. 그보다 아우는 내일도 진료를 봐야 하지 않은가. 오늘도 환자 중에 태반이 진료를 못 받고 그냥 돌아가는 것 같던데.”
“그래도 형님을 모시는데 소홀할 수는 없지요. 어서 받으십시오.”
가주와 북리의천은 어쩌다 보니 의형제를 맺었다.
처음 그 말을 꺼낸 사람은 북리의천이었는데 가주가 반색했다.
그러면서 이런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듯 그때부터 꼬박꼬박 북리의천을 형님이라 부르고 있었다.
북리의천은 지금껏 일가를 꾸리지 못했지만 느지막이 동생을 얻은 것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천재를 아들로 둔 남자의 인생을 기웃거려볼 수 있었다.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 건데 혹시 아진의 의술이 도저히 아우가 넘볼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게 되면 그때는 아우도 아진을 질투하게 될 수 있을까?”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아진은 어머니와 도종과 함께 그 옆 방에서 편하게 음식을 먹으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무래도 북리의천과 같이 있는 것이 어머니나 도종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일 터였기 때문이었다.
아진은 옆방에서 나는 소리에 집중했다.
우연히 그들의 얘기를 들었다가 아버지의 생각이 어떤가 해서 그때부터는 집중해서 내공을 모아 귀를 기울였던 것이다.
“확실히 저희 아이들은 부모라도 질투할만한 재능과 실력을 갖추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마 그런 마음을 품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형님. 아이들이 자라는 걸 보면 늘 미안하겠지요. 조금 더 잘 가르쳐주지 못한 것이 미안할 테고 조금 더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한 것이 미안할 거고 말입니다.”
“그렇군.”
“형님은 어떠십니까? 혹시 아진이 형님을 뛰어넘는다면 형님은 아진에게 질투를 느끼게 될 것 같은가요?”
“나는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었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못한 건 없다고 생각했어. 비무에서 진 적도 있고 이긴 적도 있지. 하지만 누군가의 약하고 강함은 한 번의 비무 승부로 판가름이 나는 것이 아니지. 나는 나에 대해서 제법 잘 알고 있었고 나를 믿었지. 그런데 아진이는 나를 많이 돌아보게 했어.”
북리의천의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에게는 아진이가 내 두 번째 삶처럼 느껴지네. 아진이를 통해서 나는 내게 주어진 내 두 번째 삶을 살아볼 생각이야. 질투를 하게 될 것 같냐고 했지? 아니야. 왜냐면 나는 아진이의 성취가 내가 이룬 성취만큼이나 기쁠 것 같으니까.”
“감사합니다. 형님.”
“내가 내 제자를 질투하지 않는다는데 왜 자네가 감사하다고 하나?”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시원하게 터져 나왔다.
아진은 문득 도종을 바라보았다.
도종도 그랬다.
사람들이 아진을 칭찬하면 아진이 미울 법도 한데 그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목소리로 아진을 칭찬하고 아진이 자기 동생임을 자랑했다.
‘그런데 나라도 그럴 것 같아.’
아진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자리 잡은 아기를 보면서 생각했다.
‘건강하게만 태어나. 형님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걸 줄게.’
아진은 꿈에 부푼 채로 상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