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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29화 (29/470)

제29화

29화

패도검은 맞은 눈이 퉁퉁 부어올라 눈을 뜨지도 못하고 있다가 귀에 들리는 소리에 기겁을 했다.

그는 자기가 느끼는 기분이 언젠가 혈천방 패거리들이 느꼈던 것과 같은 느낌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북리의천은 마두들의 단전을 부수고 그들이 다시는 검을 잡지 못하도록 팔을 어깨에서 뽑아냈다.

한 번씩 더 화풀이를 하면 속이 시원할 것 같은데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하고 마차로 돌아가던 북리의천은 마차를 지키던 북리세가의 무인들이 바닥에 쓰러진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몸을 날렸다.

경공을 펼쳐 가며 그는 아진을 소리쳐 불렀다.

마차에 당도하자 반대편 문이 열린 것이 보였고 그 앞에 선 북리의천은 기함했다.

마두는 끔찍한 모습으로 바닥에 누워있고 그 옆에 아진이 태연한 모습으로 서 있었던 것이다.

거기서 한술 더 떠서 소은이 그 옆에 쭈그려 앉아 환자의 환부를 살피고 있었다.

“이런 건 어떻게 고쳐야 하는 거야, 아진아?”

그렇게 물으면서.

북리의천은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공포를 느끼면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게 정말 현실이라는 건가.

그는 멍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스승님. 다 끝났어요?”

아진이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고 손바닥을 겹쳐 비를 막으면서 말했다.

“그, 그래. 아진아…….”

북리의천은 바닥에 누워있는 마두의 모습을 보았다.

단전을 부수지는 않았지만 단순한 주먹의 타격만을 생각하자면 아진의 공격이 온순했다고는 절대로 말할 수가 없을 듯했다.

“운도 나쁜 것 같아요. 왜 하필 여기에서 싸운 걸까요? 웬만하면 비 오는 날은 그냥 친하게 지내지.”

북리의천은 그 말을 들으면서 웃지 못했다.

도대체 이 녀석의 정체가 뭘까 하는 생각이 새록새록 들었던 것이다.

* * *

산본의가에 가까워지면서 아진은 들떠서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했다.

“스승님. 조금 빨리 가면 안 될까요?”

그러자 북리의천이 북리세가의 무인들을 바라보았다.

패도검의 독에 중독됐던 두 사람은 아진의 치료를 받고 말끔해져 있었다.

“이제 곧 미령인데 거기부터는 안전할 거예요. 거기를 장악한 사람들이 혈천판데 본가 단골이라서 말썽을 일으키지 않거든요.”

그렇게까지 말하는 것을 보니 여기서부터는 따로 오라는 뜻 같았다.

“그러시지요. 장로님. 먼저 가십시오. 저희도 곧 뒤따라 가겠습니다.”

“그럼 부탁함세. 이리 오너라. 아진아.”

그러자 아진이 북리의천의 목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북리의천은 한쪽 팔로 아진을 받치고 그대로 경공을 전개했다.

“우와!”

돌풍이 이는 것처럼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사납게 휘날리며 펄럭이는 소리를 냈다.

덕분에 아진은 그리웠던 산본의가에 조금 더 빨리 도착했다.

“저기가 산본의가가 맞는 모양이구나.”

북리의천이 그제야 바닥으로 내려서며 말하자 아진이 여전히 북리의천의 목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고개를 돌려 그곳을 바라보았다.

산본의가 앞에 사람들이 끝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얘기를 들었던 것보다 훨씬 더 환자가 많아 보이는구나.”

아진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럴 게 아니라 먼저 안으로 들어 가자.”

북리의천이 아진을 내려주자 아진이 감회를 느끼며 의가로 향했다.

“거기요. 자꾸 새치기하지 마세요. 그러면 순서가 돼도 진료를 봐주지 않을 겁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아진이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다.

전에는 줄 선 사람들을 따로 관리하는 사람들도 없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사람들에게 호통을 친 이는 다시 원래의 일로 돌아갔는데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증상을 묻고 그것을 일일이 받아적었다.

“신기하구나. 나는 이런 모습은 처음 본다. 보통은 세가의 의방에서 진료와 처방을 받다 보니.”

“그러실 거예요.”

그들이 함께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조금 전까지 새치기를 하지 말라고 하던 사람이 눈을 부라렸다.

“아니. 이제는 대놓고 새치기를 하시네. 나으리. 이러시면 안 됩니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 전부 아파서 새벽부터 온 거라고요. 의원님을 보고 싶으시면 줄을 서세요. 아무리 높은 분이라고 해도 줄을 서셔야 합니다.”

그러자 아진이 웃었다.

“아저씨는 처음 보네요. 그런데 저는 이 집 아들이라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아진이 말하자 그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아진을 보았다.

“혹시…… 가주님의 둘째 공자님이라는 건가요? 북리세가에 갔다는 그 공자님요? 아이고. 맞네. 맞는 것 같네. 그러고 보니 가주님이랑 가모님을 딱 반씩 닮으셨네요. 세상에. 어서 들어가시지요. 두 분이 정말 반가워하시겠습니다. 어서 가세요. 어서요.”

그는 가주와 가모가 즐거워할 모습이 선해서 기분이 좋아진 듯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가족이 기뻐할 거라는 생각에 즐거워하는 사람을 보고 있자 아진도 기분이 좋았다.

아진이 북리의천을 보자 그도 웃어 보였다.

“좋은 사람들이구나.”

“네. 스승님.”

아진이 돌아왔다는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진료를 하고 있던 가주와 의원, 의생들도 달려 나왔고 의녀 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아진이가 왔다고요? 정말 아진이가 돌아왔어요?”

멀리에서 소리를 지른 도종이 우다다다 달려왔다.

“아진아. 내 동생.”

북리의천은 아진이 의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사랑을 받고 살았는지 알 수 있었다.

아진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붙잡혀 꼭꼭 안기느라 금방 찐빵처럼 부풀어 오를 듯했다.

북리의천은 그 모습을 보고 허허 웃다가 가주와 눈이 마주치자 그에게 예를 차렸다.

“북리세가의 무영검 북리의천이라 합니다. 산본의가의 가주님에 대해서는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아진을 제자로 삼고자 먼저 가주님의 허락을 받으려고 찾아왔으니 부디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북리의천이라는 말을 들은 사람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변했다.

왈패만 나타나도 벌벌 떠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런 왈패들을 한 번에 압살해 버릴 수 있는 무가, 그것도 명문세가로 통하는 북리세가에서 명숙이 온 것이다.

“저분이 무영검 대협이시라고?”

“세상에. 내가 살면서 무영검 대협을 다 보네.”

“무영검 대협이 유명하신 분이야?”

“에이. 이 사람아. 아무리 무림의 일을 몰라도 그렇지. 무림의 열두 명숙 중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신 북리의천 대협도 모르나?”

사람들은 각자 자기들이 아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경쟁적으로 북리의천에 대한 이야기를 해댔다.

“그런데 무영검 대협께서는 지병으로 은거에 들어가셨다고 하던데.”

“그 얘기는…… 나도 들은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설마 무영검 대협도 아니면서 무영검 대협이라고 사칭을 하시는 거겠어?”

그러나 아진의 귀에는 그런 말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어머니!”

아진이 가모의 배를 보면서 놀란 얼굴로 소리를 지르자 그녀가 놀란 얼굴로 아진을 바라보았다.

“아진아. 왜 그러니?”

그 반응을 보고 아진은 그녀가 아직 자신의 임신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머니. 태기예요. 모르고 계셨어요?”

아진은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 채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아진아…… 그게 무슨 소리냐?”

놀란 것은 가주도 마찬가지였다.

도종은 아진의 옆에 와서 아진의 어깨를 감싸더니 알밤을 먹였다.

“이 녀석. 또 오자마자 사고 치네. 어딜 봐서 태기라는 거야? 아무런 표시도 나지 않는데. 하여간 너는 정말 대단하다.”

도종이 웃었지만 아진은 확신에 찼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의 눈에는 지금 아주 조그맣기는 하지만 어머니의 몸속에서 자라고 있는 생명체가 보였던 것이다.

“와아아. 세상에! 아기예요. 아기요. 진짜 선녀 같아요.”

아진이 계속 그렇게 말을 하자 가모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아진아. 그건 아닌 것 같다만…….”

가모는 일단 그 말이 맞건 안 맞건 북리의천의 앞에서 그렇게 떠들어댈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가주의 얼굴 역시 새빨갛게 붉어졌다.

그러나 북리의천은 이런 경사를 그냥 지나갈 수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쩌렁쩌렁한 소리로 그들을 축하해 주었다.

“이렇게 큰 경사가 또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아진의 검술 수련을 위해서 데리고 가야 해서 그동안 적적하실 것 같아 걱정이 많았는데 아진의 동생을 가지셨군요. 저에게는 정말 마음이 놓이는 일입니다.”

북리의천은 꺼져가는 불씨를 살리듯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가주는 북리의천이 선의로 그러는 걸 알고 더 부끄러워졌다.

“대협.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하 의원. 잠시 진료를 부탁하겠네.”

“예. 가주님. 당연하지요. 무영검 대협께서 오셨는데 기다리시게 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어서 들어가십시오.”

가만 보니 사람들은 꼭 이름을 칭해야 할 때가 아니어도 무영검 대협, 무영검 대협 하면서 다른 이들에게 각인을 시키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제선문의 뒤에 남궁세가가 있다면 산본의가의 뒤에는 북리세가가 있고 북리세가와 산본의가의 관계는 남궁세가와 제선문의 관계처럼 느슨한 것이 아니라 사제간의 연으로 묶였다는 것을 은연중에 자랑하고 싶은 듯했다.

“아진아. 나는 너를 처음 봤을 때부터 정말 뭔가 해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무영검 대협의 제자가 됐다니. 정말 자랑스럽다.”

하명준의 말에 아진이 활짝 웃었다.

산본의가가 어려웠던 시절, 하명준이 혈천방의 핍박과 협박에도 불구하고 의가를 굳건히 지켜주지 않았다면 의가가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을지 그것도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아진은 의원이 하명준 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

아진이 주위를 둘러보자 하명준도 그 이유를 알아차린 듯했다.

“의원이 늘었다. 이제 산본의가는 의원이 다섯이야.”

“그런데도 줄이 줄어들지 않고 있는 거예요?”

아진은 그거야말로 희한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러는 동안에도 새로운 줄이 더 생겨나고 있었다.

“무영검 대협이 오셨다는 소문이 나면 더 많은 사람이 몰려들 거다. 아마 인근에 있는 무관에서도 사람들이 올지 몰라. 무영검 대협을 볼 수 있다면 당연히 그러지 않겠냐?”

모두가 들떠 있었고 아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환자들이 기다리는 것을 생각하고 우선 내원으로 향했다.

가모는 안주인 노릇을 능숙하게 해냈다.

시비들을 시켜 상을 차리게 하고 북리의천을 대접했는데 북리의천은 아진이 그동안 이런 부모 밑에서 자라서 그렇게 밝았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사제의 정이라는 것이 대단해서 제자의 부모를 보자 그 마음이 참 애틋했다.

가주와 가모는 북리의천이 아진을 얼마나 아끼는지 진작 알아보았다.

“저희 아이가 행여 대협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거나 실망을 끼치지는 않았을지 걱정입니다.”

가주가 말하는 동안 아진은 가모의 곁에서 자리를 잡았다.

동생이 생겼다고 생각하니 눈을 돌리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가모는 북리의천의 앞에서 그러고 있는 것이 부끄럽기는 했지만 아진이 신이 난 것을 보고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아진아. 동생을 갖고 싶었느냐?”

가모는 가주와 북리의천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조용히 물었다.

“동생을 갖고 싶었던 건 아닌데 동생이 생긴 걸 보니까 너무 좋아서요. 어머니.”

가모는 아진이 이미 그것을 기정사실로 만드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도 있긴 했지만 아진이 생각 없이 그런 말을 하는 아이가 아니라는 것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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