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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28화 (28/470)

제28화

28화

남자는 아진의 말을 듣고 어떻게든 진정해 보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으으으으아아!”

그러나 충수염은 어지간한 의지가 있다고 참을 수 있는 통증이 아니었다.

“배 아래 쪽에 통증이 있고 그 통증이 점점 강해지나요?”

그러자 남자가 눈을 반짝 뜨고 그때부터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앓다가 누군가 그것을 알아주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는 법이었다.

이제야말로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듯 남자는 그렇다고 말하며 제발 좀 고쳐 달라고 애원했다.

빠르게 빨려들어 가던 마나가 어느덧 움직임을 멈추었고 아진은 환부를 살폈다.

그러는 동안 남자가 아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분명히 아팠는데 왜 갑자기 안 아프지?’

대략 그런 말을 하고 싶은 듯했다.

“이제 진정이 되셨으면 저희 의생님에게 진료를 받아 보세요.”

아진은 치료를 다 끝내놓고 소은에게 넘겼다.

소은은 몇 가지 질문을 하고 환자에게 시침을 했다.

침을 놓는 속도와 각도, 깊이는 숙련돼 보였고 그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명의가 나타나서 사람을 구했다며 신기해했다.

“정말 우리 은아가 사람을 구한 것이냐.”

북리의천은 처음 보는 질녀의 모습에 감격을 한 것 같았다.

“통증이 도중에 가라앉아서 다행이었어요. 안 그랬으면 치료도 받지 못하셨을 거예요. 그리고 저희 의생님을 만나서 운이 좋으셨고요.”

아진은 혹시라도 남자가 이상한 생각을 할까 봐서 서둘러 말했다.

죽을 것 같은 통증이 사라진 것은 분명히 아진이 손을 복부에 얹은 후에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진이 하는 말을 듣고 그는 통증이 일시적으로 사라진 건 우연이었고 그 후에 의생이 자신을 시침으로 고쳐준 거라고 믿었다.

“정말 고맙습니다. 지금은 시험을 치러 가야 해서 제대로 인사를 드리지 못하지만 시험이 끝나면 꼭 산본의가에 내려가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제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그가 말하는 동안 사람들이 산본의가라는 이름을 말하며 거기가 어디냐고 서로들 물었다.

“산본의가라고 하니까 산본에 있는 의가인가 보지. 그런데 산본에 아직 의가가 남아 있나? 요즘에는 거의 제선문 지부 아니면 천응문인 것 같던데.”

“그래도 용하네. 아까부터 벌벌벌 떨고 있길래 오늘 이 객잔에서 초상 치르는 줄 알았는데.”

사람들이 말하는 동안 북리의천은 뿌듯함이 넘치는 얼굴로 자신의 질녀를 바라보았다.

“은아야. 정말 대단하구나.”

소은은 정말 자기가 한 건가 하면서도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누님. 정말 대단했어요. 떨지도 않으시던데요?”

“아진이 네가 옆에 있다고 생각하니까 겁이 안 나더라. 안 그랬으면 엄청 떨었을 거야.”

음식은 전부 식었지만 불만은 없었다.

북리의천은 북리세가의 장래가 밝다고 생각하며 연신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 * *

천둥 번개가 내리치면서 무서운 폭우가 쏟아졌다.

하필 객잔을 떠나고 그런 날씨가 계속 이어졌다.

객잔은 보이지도 않았고 인가에 가서 비를 피하려고 해도 가장 가까운 인가도 아직 몇 리는 더 가야 했다.

북리의천은 아진을 마차에 태우고 말을 빠르게 달렸다.

그래도 산본의가가 이제 하루거리로 다가와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장로님. 저 앞에 숲이 보이는데 저기에서 비를 피했다 가면 어떻겠습니까?”

북리세가의 무인이 말했을 때였다.

북리의천의 시야에 이상한 광경이 들어왔다.

무인들이 그들을 발견한 것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였다.

“마두다…….”

북리의천은 갑자기 커진 소음이 천둥 번개의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검기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사람들이 서로 병장기를 휘두르며 생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 주위에 있던 나무와 바위가 터져나가고 바닥에 얕게나마 고랑이 파이는 것을 보며 북리의천은 그들이 그냥 무시할만한 상대들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른 때 같았다면 생각할 것도 없이 몸을 날렸겠지만 지금은 마차 안에 있는 질녀와 제자가 떠올랐다.

위험을 무릅쓰고 강호의 협객 노릇을 하는 것보다는 자기에게 소중한 두 사람을 지키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북리의천은 곁에 있는 무인들을 바라보았다.

이들이 두 사람을 지켜 줄 수 있을까 해서였다.

처음에는 접전을 벌이던 사람들의 형국이 점점 변해 갔다.

피곤죽이 되어 쓰러진 사람은 분명 정파의 무림인 같았다.

느껴지는 정순한 내공이 그랬다.

반면 마기를 뿜어대는 자들의 기세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강하고 난폭해졌다.

‘저러다가는 전부 죽는다.’

북리의천은 결국 마차로 다가갔다.

“아진아. 은아야. 앞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마두 놈들이 정파인들을 습격한 것 같다. 잠시 다녀와도 되겠느냐.”

아진은 북리의천이 왜 망설이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껏 북리의천이 협을 행하면서 다른 사람 때문에 머뭇거린 적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녀오세요. 스승님. 여기는 제가 지킬게요. 누님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할게요.”

그러자 북리의천의 굳어 있던 얼굴에 웃음이 지어졌다.

“그래. 내가 내 제자를 너무 걱정했구나. 무사히 있거라. 곧 돌아오마.”

“예. 스승님.”

북리의천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북리세가의 무인들에게도 눈짓을 보인 후 그대로 말을 달려나갔다.

흑빛 장포를 걸친 마두가 손에서 강기를 뽑아내다가 북리의천을 발견하고 고개를 돌렸다.

“멈추어라!”

북리의천의 노성이 대기를 갈랐다.

내공이 높은 자들은 이미 북리의천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지만 그가 주저하는 것을 보면서 북리의천이 직접 싸움에 끼어들지는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북리의천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자기들끼리 눈빛을 주고받았다.

중원에 나온 것이 처음인 마두들은 북리의천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강호 명숙들의 용모파기집을 가지고 그들에 대해서 깊이 조사를 하고 그들이 사용하는 성명절기에 대해서도 열심히 익혀왔지만 그들이 가진 자료에 북리의천에 대한 것은 들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 자료가 만들어진 것이 북리의천이 은거에 들어간 후의 것이라서 그런 거였는데 그들에게는 큰 불행이었다.

“웬 놈이냐. 이 자리는 네놈이 낄 자리가 아니다. 목숨이 아까운 것을 아는 놈이라면 그냥 네가 갈 길이나 가거라. 괜히 함께 있던 자들까지 사지가 찢겨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으면 말이다.”

핏물이 줄줄 흐르는 검을 든 채, 흰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늙은 마두가 말했다.

“고인이 누구이신지는 모르지만 부디 도와주십시오. 놈들이 독을 써서 내공이 흩어지고 있습니다. 이놈들은 사악한 마두 놈들입니다. 정파의 협객이시라면 부디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바닥에 쓰러진 자가 혼미해져 가는 얼굴로 외쳤다.

목소리도 간신히 내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 잠깐 사이를 기회로 여긴 듯 내공을 회복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쉬고 계시오. 나는 무영검이라 불리는 북리세가의 장로요.”

북리의천의 말에 분위기가 단번에 변했다.

마두들 중에는 북리의천이라는 이름을 듣고도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자가 있었지만 정파 무인들치고 북리의천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무림 십이성이라는 무영검 대협이시라는 말씀입니까. 저희의 운이 다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대협께서 이곳을 지나가시다니. 감사합니다. 대협!”

그들은 이미 싸움이 끝난 것처럼 말했고 마두들도 그 말을 들으며 조금씩 위축되었다.

그들이 위축된 것은 단순히 감정적인 변화 때문만이 아니었다.

북리의천이 공력을 발산해 그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는데 그 기세를 감당해 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으으으으!”

그의 몸에서 새하얀 물안개 같은 것이 피어나는 듯했다.

북리의천은 검에 내공을 밀어 넣고 가장 익숙하고 편안한 검술을 펼쳤다.

마차에 제자와 질녀가 있어 이곳에서 오래 시간을 끌 이유가 없어서였다.

마두들도 북리의천의 생각을 알아차린 듯 서로 눈짓을 교환했다.

이대로 도망치자는 것 같았는데 강한 살기를 뿜어대는 그들을 그냥 보냈다가는 이들 때문에 백성들이 어떤 고초를 치르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북리의천은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았다.

“너희를 용서할 수는 없을 것 같구나.”

북리의천은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마두들은 북리의천이 설마하니 한 번에 여러 개의 검영을 만들어 내 자기들을 동시에 공격할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일단 누군가를 공격하면 그 틈을 노려 도망치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다가 북리의천의 검에서 강기를 덧입은 검영이 쏟아져 나오자 비명을 질렀다.

북리의천의 검격은 단호하고 자비가 없었다.

그러나 그 반경에서 가까스로 피해 나간 자들이 있었다.

그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패도검은 생각을 깊이 할 틈도 없이 마차를 향해 몸을 날렸다.

북리의천이 동행한 사람들이라면 그에게 의미가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그들을 이용해 북리의천의 손발을 묶어둘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른 마두들도 그것을 알아차리고 북리의천의 시야를 가리며 그 작전이 성공할 수 있도록 했다.

북리의천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모든 것을 포기한 것 같던 사람들이 갑자기 힘을 다해 덤벼드는 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됐다.’

패도검은 그대로 마차를 향해 달려갔다.

마차를 지키고 있던 북리세가의 무인들은 패도검이 무시무시한 극성의 경공을 펼치는 것을 보았지만 이내 검을 들고 협격을 펼치려 했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날아온 정체불명의 적색 가루에 움직임이 둔화하였다.

‘산공독?’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거였다.

그러나 지금은 자기들의 목숨을 내던져서라도 마차 안의 두 사람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들은 굳어 가는 몸을 억지로 움직였다.

‘그래 봤자다.’

패도검은 이미 마차 안의 인질들을 잡은 것처럼 의기양양해진 채 문을 열었다.

“네놈들은 나와 같이 가줘야…….”

‘겠다’라는 말이 아직 남았지만 그는 코끝에 작렬하는 통증에 거친 숨을 급하게 들이켰다.

눈알이 터져나간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안면의 뼈가 그대로 부서져 함몰되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어찌나 통증이 거셌는지 숨을 쉬는 것이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그가 통증의 강렬한 인상을 다 분석하기도 전에 다시 타격이 이루어졌다.

“우으!”

처음에는 정면에서 정통으로 꽂히더니 그다음부터는 목이 돌아갈 만큼 세게 옆에서 손바닥이 날아왔다.

생전 그렇게 매서운 손바닥은 처음이었다.

그의 몸통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동안 주먹이 턱밑으로 들어가는 것 같더니 그대로 고개를 뒤로 꺾어 버릴 듯한 기세로 날아들었다.

패도검은 아무런 반격도 해 보지 못한 채 바닥에 나가떨어졌다.

순전히 주먹에만 맞고 쓰러지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그 일이 벌어졌다.

초식이라고 할 것도 없고 권법이라고 이름 붙일 것도 없는, 그저 마구잡이 주먹질이었다.

그런데 왜 손을 쓸 수가 없었던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형이 없는 주먹질에 내공을 움직여 보호를 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어느 정도 움직임이 가늠돼야 그렇게 할 텐데 그걸 알아차리는 것이 어려워서였다.

아무리 내공이 남아돈다고 해도 매번 몸 전체를 보호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무공을 제대로 배워 본 적도 없는 것 같은 마구잡이식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나가떨어졌던 것이다.

“아저씨. 많이 다치셨네요. 우리도 지금 의가에 가는 길인데 모셔다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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