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화
27화
아진은 그런 북리의천을 보며 순진하게 웃고 북리의천이 알려 준 초식을 계속 연습해 나갔다.
한 번 한 번이 계속될 때마다 그것은 북리의천이 처음에 가르쳐 줬던 것에서 점점 달라지고 있었다.
그걸 본 무인들이 이상하게 여기면서 서로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오히려 북리의천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진이 벌써 형에서 자유로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형에 구애받지 않고 초식의 목적을 완전하게 구현해내는 것은 지금 북리세가의 가주도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진은 북리의천이 보여준 초식을 보고 거기에서 북리의천이 이루려고 한 것, 그 정수만을 정확히 골라내서 남겨 두고 나머지는 서서히 털어 내는 중이었다.
아진은 북리의천이 자신을 보고 놀라는 것도 알지 못한 채 그저 그 초식을 이용해 검을 가지고 던전으로 들어가 괴수를 상대하는 것을 상상할 뿐이었다.
괴수 중에는 사람의 육안으로 움직임을 쫓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 빠른 것도 있었다.
SSS급이 되기까지 그가 싸워서 죽인 괴수만 해도 수만 마리였을 것이다.
아진은 가상의 적을 얼마든지 불러낼 수 있었고 특히나 어려웠던 레이드를 떠올리며 검을 휘둘렀다.
북리의천이 알려준 초식을 사용해 그 초식만을 가지고 던전에 들어가 그 괴수를 다시 만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진은 단순히 그 생각을 하면서 검을 휘둘렀던 것이다.
북리의천이 멍하니 바라보는 동안 아진은 몇 번 더 목검을 움직이다가 검을 내렸다.
“히. 재밌다.”
목검을 허리춤에 차고 아진이 혼잣말을 했을 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기함했다.
“가…… 가자. 아진아.”
북리의천은 생각이 복잡해졌다.
처음에는 아진을 가르치게 된 것이 마냥 기뻤는데 이제는 조금씩 두려워지고 있었다.
자기가 정말 그 일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됐던 것이다.
자기가 아진에게 부족한 스승이어서 아진의 발목이나 붙잡고 있는 거라면 아진을 위해 아진에게 맞는 스승을 찾아 줘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북리의천의 입에서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북리의천이 무슨 걱정을 하는지 훤히 들여다보였는데 정작 북리의천의 가슴에 풍파를 일으킨 아진만큼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저 스승님에게 배우는 검술이 너무 재미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 * *
며칠 동안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가는 길에 구경도 많이 하고 맛있는 것도 먹자고 했지만 그것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특별히 갈 길을 서두르느라고 그런 것은 아니었고 북리의천이 아진에 대한 생각으로 정신이 다른데 팔려 있어서 쉬었다 가자는 말을 좀처럼 하지 않은 탓이었다.
북리의천이 그러니 다른 사람들도 먼저 말을 꺼내지 못했고, 그러다 보니 어느덧 그들은 산본에 거의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 사흘 정도만 가면 도착하겠네요. 백부님.”
북리소은이 말하자 북리의천이 그제야 깊은 상념에서 벗어나며 주위를 둘러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생각보다 훨씬 빨리 온 것 같구나.”
그는 그제야 그동안 너무 강행군을 해 왔다는 것을 생각하며 오늘은 객잔에 들어 식사도 푸짐하게 하고 때도 벗기자고 말했다.
북리소은과 무인들은 당장 반겼다.
“언제 그 말씀을 하시나 했어요. 백부님.”
“응?”
북리의천은 그제야 그들이 자기를 따라오느라고 힘들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와 함께 말을 타고 가는 아진을 보면 너무나 편안해 보여서 그런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아진이 너는 이런 게 그냥 체질인 모양이구나.”
북리의천이 말하자 다른 무인들도 웃음을 터뜨렸다.
“아진이와 갈 때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습니다. 아진이도 견디는데 내가 힘든 내색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오다 보니 평소보다 몇 배는 더 힘이 든 것 같습니다. 장로님.”
“저도 그렇습니다. 제가 오면서 중요한 걸 깨달았는데 아진이 정도는 당연히 이기겠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버려야 할 것 같습니다. 괜히 아진이를 만만하게 보고 아진이보다 잘하겠다고 생각하면 몸이 서서히 골로 가는 것 같습니다.”
무인은 말을 해 놓고 나서 북리의천의 앞에서 말실수를 한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북리의천은 큰 소리로 웃어댔다.
그 말의 의미를 정말 잘 알 것 같아서였다.
“아아…… 혹시 오시는데 힘드셨어요?”
아진은 자기가 문제를 만든 것 같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산적을 만난 것도 아니고 왈패와 시비가 붙은 것도 아니고 그냥 마차를 끌고 말을 타고 편안하게 왔는데 뭐가 힘들다고 그러는 건지 잘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자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피곤했던가 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은 객잔으로 가자. 그리고 묵은 피로를 풀고 가도록 하자. 곧 산본의가에 도착하게 될 텐데 이런 몰골로 갈 수는 없지.”
북리의천이 다시 한번 말하자 모두 안도하며 더욱 힘을 냈다.
일행은 어느덧 커다란 객잔 앞에 이르렀다.
북리세가의 세력권에서 멀어지기는 했지만 사람들은 북리세가의 무복을 알아보았고 그들에게 예를 갖췄다.
북리세가의 영향력을 직접 받고 있지는 않았지만 근방에 다른 무가나 무림세력이 없어서 북리세가 무인들을 어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 중 북리의천을 단번에 알아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강호의 소문이 빠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지병으로 강호를 떠난 북리의천이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외유를 즐기는 중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북리소은이 남장을 하지 않고 있어서 겉으로 보기에는 북리세가의 귀한 아가씨를 세가 무인들이 호위하며 함께 가는 것처럼 보였다.
이해되지 않는 것은 함께 있는 남자아이였는데 그렇다고 아이가 누구인지 물을 만큼 간이 큰 사람은 없었다.
“어서들 앉지. 아진아. 너는 뭘 먹고 싶으냐. 뭐든 시키거라.”
북리의천이 말하자 아진이 객잔의 풍경에 압도된 듯 신기해하며 구경을 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음식을 시킬 줄 몰라요. 이런 곳에서 음식을 먹어본 적이 거의 없어서 뭐가 뭔지 잘 모르거든요.”
그러자 북리의천이 웃으면서 점소이를 불렀다.
“이곳에서 가장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요리를 가져오게. 머릿수에 맞추고 거기에 하나를 더 가져다주게. 나는 양이 부족한 것은 질색이라서 말이네. 그리고 술도 여기서 가장 자신 있는 걸로 두 병 가져다주고.”
“예. 나으리. 금방 가지고 오겠습니다.”
점소이는 오랜만에 돈 냄새를 맡은 듯 신나게 움직였다.
“사람들이 급히 먹는 걸 보니 기대가 됩니다.”
북리세가의 무인들이 객잔 안에 있는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냄새도 좋아요.”
군침이 돌게 만드는 음식 냄새를 맡다가 아진이 벽 쪽의 식탁에 앉아 있는 남자를 힐끔 바라보았다.
신기한 것은 북리소은 역시 그를 힐끔거렸다는 것이다.
우연히 그 모습을 본 북리의천이 덩달아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가 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학사였다.
눈길을 끌 이유가 전혀 없는데 아진에 이어 북리소은까지 힐끔거리자 북리의천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아진에게 물으려는 찰나 북리소은이 먼저 일어섰다.
북리의천은 남자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러고 보니 호흡이 거친 것 같기도 했다.
“으으으으…….”
기감을 돋우자 남자의 잇새에서 흘러나오는 신음도 들렸다.
‘병자인가?’
북리소은이 일어났지만 아진은 따라나서지 않고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음식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소면과 만두는 그냥 드리는 것이니 앞으로도 저희 객잔을 많이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평범한 손님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본 듯 대우가 좋았다.
그러나 손님들의 반응이 영 미지근했다.
하다못해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는데 가만 보니 그들의 신경이 온통 다른 식탁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 향해 있었다.
“아아. 전시를 치르러 황도로 간다는 사람인데 며칠 동안 저희 객잔에 머물렀거든요. 어디가 아픈지 방에서 꼼짝을 하지 않더니 오늘은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면서 나오더라고요. 방에 들어갔다가 토할 뻔했어요. 방에서 변소 냄새가 나지 뭔가요? 양심은 있는지 청소비까지 주기는 하더라고요.”
점소이는 할 말이 생긴 것이 신난 듯 말을 해댔지만 오랫동안 병을 앓았던 북리의천은 안색이 좋지 않았다.
어디가 아파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그 통증을 견뎌낸 사람도 있는데 밉살스럽게도 말한다는 생각이 들어 괜히 화가 나고 서운했던 것이다.
“알았으니 가 보게.”
북리세가의 무인은 북리의천의 그런 의중을 알아차린 듯 점소이를 보냈다.
점소이는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알아차리지 못한 채 샐쭉한 얼굴로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그런데 아가씨께서는 어떻게 아신 걸까요?”
무인이 묻자 아진이 웃음을 지었다.
“특유의 냄새를 맡아서 그러셨을 거예요. 내장병을 앓고 있는 것 같은데 시험을 보러 가는 길이라는 말을 들으니 더 이해가 가네요. 부담감이 심해졌다면 평소보다 더 장이 제 기능을 하지 못했을 거고 원래도 약한 몸이 문제를 일으킨 것 같아요. 치료법은 간단하지만 그 치료를 하지 않으면 고생을 많이 할 겁니다.”
“우리 은아가 고칠 수 있는가.”
북리의천은 마냥 어리게만 보이던 질녀가 정말 환자를 보는 건가 하며 눈을 빛냈다.
“예. 스승님. 누님은 제선문에서 오랫동안 수련을 한 의생이니 할 수 있을 거예요.”
정확한 혈에 침을 놓는 것만으로 증세를 완화할 수 있을 터였다.
그래서 아진은 편안한 마음으로 소은을 지켜보고 있었다.
소은이 다가가자 젊은 남자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눈만 들어 올렸다.
고통이 심한지 주먹을 쥔 채 힘을 주고 몸을 잔뜩 말고 있었다.
“으으으…….”
이제는 신음을 참는 것도 어려워진 듯했다.
“혹시 몸이 불편하십니까? 저는 제선…… 아니, 산본의가의 의생입니다.”
북리소은이 말하자 그가 반색을 했다.
다 죽어 가던 얼굴로 그가 북리소은을 금방이라도 붙잡을 듯이 몸을 내밀며 말했다.
“저 좀…… 저 좀 살려주십시오. 부탁입니다. 창자가 꼬이는 것처럼 아파서 죽겠습니다.”
‘창자가?’
아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진은 환자의 겉모습과 그에게서 나는 냄새를 근거로 판단을 내린 거였는데 원인이 그것 하나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으어어어……!”
남자는 그대로 배를 움켜쥐고 식탁에 머리를 찧기 시작했다.
‘혹시 충수염?’
그게 복합적이라면 북리소은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진이 벌떡 일어나 그곳으로 가자 북리소은이 아진을 바라보았다.
“이러면 시침도 못 하겠어.”
환자가 발작을 일으킨 것처럼 버둥거리자 소은이 말했다.
“아저씨. 조금 힘을 내보세요. 버티셔야 해요. 이분은 산본의가에서도 아주 유명한 의생님이세요. 지금까지 이분이 치료해서 낫지 못한 사람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저희 의생님이 치료를 할 수 있도록 버텨보세요. 이렇게 발버둥을 치면 치료를 할 수가 없어요.”
아진이 남자의 팔을 잡고 말했다.
객잔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진이 그의 팔을 잡은 것만 보였지만 아진은 다른 손을 움직여 그의 복부를 만졌다.
그러자 마나가 빠른 속도로 빨려들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마나를 불어넣는 것이 아니라 마나가 빨려들어 가는 느낌이 드는 것은 아진에게도 신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