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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26화 (26/470)

제26화

26화

“스승님.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범인을 찾아내야 하는 거예요? 자백을 받지 못했고 증거도 없는 상태라면요.”

그러자 북리의천이 고개를 저었다.

“어려웠겠지. 아주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네가 기특하다는 것이다.”

북리의천이 아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나는 솔직히 지금껏 천의를 믿고 있었다. 그래서 천의가 뒤에서 의원들을 조종하고 있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크게 충격을 받았다. 우리 북리세가는 특히나 의원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곳이었다. 내가 일찍부터 불치병을 진단받다 보니 의원이 늘 우리 주위에 있었지. 북리세가의 의원들은 다른 무가의 어떤 의원들보다도 지위가 높았을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이해가 됐다.

늘 가주와 가주의 측근들과 가까이 지내며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기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천의가 북리의천의 병에 대해 말을 하면 한마디라도 더 듣고 싶어서 사람들은 귀를 기울였을 것이고 천의가 하는 말에 따라서 표정과 감정이 변했을 터였다.

천의는 실력에 비해 좋은 대우와 존경을 받았을 테고 쉽게 북리세가의 수뇌부를 조종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만족감을 느꼈을 수도 있었다.

모든 것을 알고 나서 생각해 보면 전부가 다 아귀가 맞아떨어졌다.

누군가 삶에 대한 의지를 간절히 불태우고 있을 때 다른 누군가는 그것을 권력의 수단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래도 이제 그것이 전부 지난 이야기라서 아진은 안도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여러 대의 마차가 세가를 떠나기 위해 도열했다.

가주가 일찌감치 나와 배웅을 하자 장로들도 그 뒤를 따랐다.

북리의천과 아진이야 곧 돌아올 터였지만 북리소은은 그렇지 않았다.

의가에서의 일이 얼마나 바쁘게 돌아갈지 모르는 일이라 언제 다시 보게 될지 확언을 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가주는 혹시라도 산본의가에 흑도나 무인들이 쳐들어올 것을 대비해 천이재 외에도 그곳에 상주할 무인 두 명을 추가로 보내 주었다.

가주의 명으로만 움직이는 고수들이었는데 가주의 직계를 지키는 것도 그들의 임무에 속하는 거였기에 원래 하게 되어 있던 일을 시킨 것뿐이었다.

아진은 다른 것보다 그 사실이 가장 좋았다.

그런 사람들이 산본의가를 지킨다면 자기는 걱정하지 않고 북리세가로 다시 올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스승님. 정말 좋아요.”

아진은 콧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마음이었다.

온갖 것들로 마음이 설렜다.

“그렇다니 기쁘구나.”

북리의천이 같이 탄 아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행렬이 움직이는 동안 북리의천은 아진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무공이란 무엇인지, 검은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한 것도 알려주고 강호 이야기도 해 주었다.

강호의 유명한 무인들에 대해서도 얘기를 해 주고 비무를 한 적이 있는 상대가 있으면 그 일화도 들려 주었다.

도무지 지루할 틈이 없었다.

북리의천은 생각난 김에 아진에게 심법을 알려 주었다.

“본가에 전해지는 심법이 있다만 아진이 너에게는 다른 심법을 알려 주고 싶구나. 내가 처음부터 너에게 심법을 알려 주지 못한 것은 너에게 이미 단전이 있는 것 같아서였다.”

북리의천은 처음에 아진의 몸을 확인한 후로 고민이 깊어졌다.

자신의 진기를 넣어서 아진의 상태를 확인해 보려고 했는데 진기가 들어가다 막혔던 것이다.

그러면서 아진에게 이미 자신의 내공보다 훨씬 더 정순하고 깊은 내공이 쌓여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섣불리 가르치기가 어려웠다.

북리의천은 혼자서 여러 번 고심을 한 끝에 축기 속도가 느리지만 고강하다고 알려져 있고 특히나 자신의 몸을 지키는 데 유용하다고 알려진 심법을 떠올렸다.

그것은 북리의천의 오랜 친구이자 도괴라 불리던 낭왕이 창안한 심법이었다.

낭왕은 낭인이었고 낭인은 무가의 사람처럼 어려서부터 체계적으로 무공을 배우지는 못하고 그때그때 실전적인 무공을 스스로 습득해서 살아남다가 결국 그 자리에 이르게 되는 일이 많았다.

낭왕 역시 그런 사람이었다.

순전히 살아남기 위한 무공을 터득하며 마침내 낭왕의 자리에 오르고 무림에서 도괴라는 이름을 얻어낸 자였다.

북리의천은 낭왕에 대해서, 그리고 낭왕이 창안한 심법에 대해서 말을 해 주었다.

“네가 그것을 익히고 싶다면 내가 알려 주마.”

“익히고 싶어요. 스승님.”

아진은 그 말을 듣자마자 마음에 들었다.

가장 아진의 마음을 끈 것은 그 심법을 익히는 것이 복잡하지만 일단 익히고 나면 다른 무공을 하는 데도 거리낌이 없다는 대목이었다.

심법이 달라서 내공의 운용을 하지 못해 다른 문파의 무공을 하지 못 하는 일이 잦았는데 낭왕의 심법을 익히면 적어도 그 문제만큼은 저절로 해결이 될 거라는 말을 듣고 아진은 두말할 것 없이 그것을 익히겠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숙련되는 것이 어려울 거다. 다른 심법들은 초반에는 성취가 빠르고 결과가 보이지만 이건 그렇질 않거든. 1성에서 2성에 오르는 시간이 아마, 내가 아는 심법 중에 가장 오래 걸릴 것이다. 12성까지 있는데 12성에 이르는 것이 가능은 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건 그것을 창안한 낭왕이 직접 한 말이란다.”

“낭왕 대협은 지금 몇 성인데요?”

“그 친구는 8성이라고 들었다. 마지막에 본 게 지난 겨울이었는데 그때 드디어 8성에 이르렀다면서 축하를 해 달라고 찾아왔더구나. 함께 사흘 동안 술을 마셨지. 그러고 보니 낭왕도 찾아가 보기는 해야겠구나. 낭왕에게는 제자가 여럿이 있고 그 제자가 다시 제자를 키웠지. 낭왕이 직접 키운 제자만 해도 네 명이다. 나를 볼 때마다 제자를 들이라면서 자랑을 했었는데.”

북리의천은 그냥 단순히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조만간 낭왕을 찾아가서 아진을 자랑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북리의천은 자신에게 팔불출 기미가 그렇게 다분하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아진과 같은 제자를 두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것이 이럴 때 쓰는 말이리라.

그는 아진이 심심할까 하며 시험 삼아 기본 검법의 구결을 알려 주었는데 의술을 배운 아이라 내공이 움직이는 길을 이해하는 것도 빠르고 외우는 것도 빨리 외웠다.

그러나 무공을 익히는 것이 구결을 외운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라서 북리의천은 크게 기대는 하지 않은 채 우선은 그냥 구결을 알려주기만 했던 것뿐이었다.

폭포 아래에 아진을 집어넣고, 거대한 폭포를 느끼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는 무공의 깊은 세계를 알게 하려고 한 것뿐이었지 설마하니 아진이 그 물을 전부 다 받아 마실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북리의천이 알려준 구결이 속속 아진의 몸속에 체득이 되고 있었다.

그들을 함께 따라나선 무인들은 북리세가에서도 큰 복을 받은 것에 속했다.

북리의천이 수시로 아진에게 검술의 묘리를 설명하고 초식을 선보일 때마다 그것을 함께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원래는 그런 것을 보는 것이 절대로 허락되지 않았지만 북리의천은 그것을 감추지 않았다.

먼 타지에서 산본의가를 지켜야 할 그들에게 비장의 한 수를 가르쳐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 자리에서 북리의천이 가르쳐주는 것은 북리세가의 가주와 장자에게만 전해지는 비전은 아니지만 그래도 북리세가의 방계는 되어야 익힐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그곳에 있는 무인들에게는 가르치지 않는 것들이었지만 그 두 사람에게는 특별히 견식을 허락한 것이다.

직접 가르치지는 못하고 견식을 허락하는 것이 한계였지만 그것만 하더라도 두 무인에게는 대단한 기연이었다.

북리의천은 초식 하나하나를 느리고 정확하게 펼쳐 보였다.

아진은 다른 이들이 검술을 가르칠 때 스스로 깨달으라며 불친절하게 가르쳐 준다는 말을 들은 적이 많았다.

그래서 북리의천이 자신에게 가르쳐 주는 방식이 얼마나 자상한 것인지 알고 있었다.

“딱 세 번만 보여줄 것이다. 세 번이 지나면 다시 한번 더 보여달라고 해도 보여 주지 않을 것이야.”

그 말을 들으면서 아진은 고개를 끄덕였고 북리의천은 성심을 다해 초식을 펼쳤다.

그렇지 않아도 교본과 같다는 말을 듣는 그였지만 제자가 맑은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자신이 하는 것은 작은 실수까지도 전부 다 따라 할 거라는 생각에 더욱 열심히 펼쳐 보였다.

복잡하지 않은 초식이었는데도 그것을 세 번 연달아 펼쳤을 때는 몸에서 땀이 줄줄 흐를 정도였다.

북리의천은 이 어린 제자가 그것을 한 번에 익히는 것은 무리일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두 번을 더 해 보였다.

“스승님. 검을 사선으로 올릴 때 어떻게 하는 게 맞아요? 처음 두 번과 마지막의 각도는 같았는데 그 사이의 두 번은 각기 다 달라서요.”

북리의천은 아진의 말을 듣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 아진아?”

아진은 북리의천이 마련해 주었던 목검을 들고 북리의천이 해 보인 초식을 따라 하며 검로를 정확히 복기해 냈다.

“…….”

북리의천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사실 검을 들어 올려 사선으로 벨 때의 각도야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다섯 차례 보여 준 각각의 동작을 정확히 눈에 담아 두었다는 것이 믿기질 않았던 것이다.

“아진아…….”

북리의천은 그를 불렀지만 말을 하지는 못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산본의가의 신동은 의술 신동이 아니라 검술 천재였던 것인가.’

순간적으로 그의 마음에 욕심이 생겼다.

이 아이라면 중원 제일의 검제가 될 거라는 생각에 탐욕이 마음에 휘몰아쳤다.

천재 야장이 어느 날, 보검을 만들 수 있는 귀한 만년한철 덩어리를 얻었다면 지금의 그가 어떤 심정인지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북리의천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이들이 북리의천을 이해했다.

북리의천이 펼친 초식은 정말 기본적인 거였는데도 북리의천이 펼치자 기본 초식도 완전히 다르게 보인다고 생각하던 무인들도 아진을 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자기들이 못하는 게 아니라 아진이 이상한 거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들은 서로를 부지런히 바라보았다.

“아진아. 너는…… 너는 정말 괴물이구나. 이 스승이 반드시 너를 중원 최고로 만들어 주마. 반드시 그리 할 것이다.”

북리의천이 아진의 조그만 두 어깨에 손을 얹고 말하자 아진이 씩 웃었다.

“최고는 귀찮아요. 스승님. 저는 그냥 다른 사람들이 제 주위에서 함부로 설치지 못하게 할 수만 있으면 돼요. 최고가 되면 정말 귀찮아져요.”

아진의 말에 북리의천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것은 이미 최고가 되어 봤던 사람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말 같았는데 아진이 이미 최고였었다는 것을 모르는 북리의천에게는 그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

북리의천은 잠시 그렇게 아진을 보더니 폭소를 터뜨렸다.

“그래. 아진아. 내가 잠깐 머리가 이상해졌나 보다. 네 말이 맞다. 최고가 되면 여러모로 귀찮아지지. 이놈 저놈 나타나서 비무를 청하고 여기저기서 와서 자기들을 도와달라고 하고 말이다. 싸움은 자기들이 일으키고 나서 자기들 편이 돼서 도와달라고 하지. 아진이가 이 스승보다 더 현명하구나.”

북리의천은 못내 기분이 좋은 듯 한참을 웃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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