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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25화 (25/470)
  • 제25화

    25화

    “그러면 아진이 너는 지금부터 정말 네 처소에 가 있거라.”

    북리의천이 말하자 아진이 불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스승님. 저도 같이 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런 것도 다 나중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제자가 이렇게 말을 안 들어서야.”

    북리의천은 불평하는 것처럼 투덜거리면서도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 지어졌다.

    “가주님. 제자가 말을 안 들어서 어째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자기에게는 제자가 있다고 자랑을 하는 듯한 북리의천이었다.

    “형님께 근심을 끼쳐 드릴 수는 없는 노릇이죠. 그런 제자는 저에게 넘기십시오.”

    가주는 북리의천의 머리 위에 있는 사람이었고 북리의천은 상상하는 것만도 싫은 듯 몸서리를 쳤다.

    “안 됩니다. 저는 처자식도 없이 달랑 제자 하나인데요.”

    신소리를 하면서도 그들은 일을 진행해나가고 있었다.

    함께 있던 무인들이 허리를 숙여 보이고 자리를 떠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 * *

    정진환은 북리세가의 뇌옥으로 옮겨지면서 아진을 바라보았다.

    “서도진이라고 했느냐.”

    “그렇습니다.”

    북리의천은 정진환이 아진에게 말을 거는 것조차 불쾌한 듯 그를 노려보았다.

    “허튼수작하지 말고 가거라.”

    “장로님. 나쁜 뜻으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정진환은 뭔가 묻고 싶은 게 있는 듯했지만 결국 그 말을 하지 못했다.

    어떻게 자기를 살린 건지 묻고 싶은 것 같았는데 어차피 묻는다고 해서 대답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라 아진은 그냥 모른 체해 버렸다.

    “내일은 산본의가로 출발을 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하루 정도 더 미뤄지게 되겠구나.”

    “저는 괜찮습니다. 스승님. 배우는 게 많아서 오히려 좋습니다. 본가에서는 이런 일을 구경하기가 어렵거든요.”

    “그렇지. 이런 구경은 아무 데서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란다.”

    북리의천이 자랑스럽게 말을 하다가 이게 지금 자랑할 일이 맞는 건가 하는 듯 한숨을 쉬었다.

    이윽고 북리세가의 무력 부대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세가를 나섰다.

    그들에게는 아진이 사라졌다는 소식과 함께 아진을 찾으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천의를 완벽히 속이기 위해 가주는 무인들에게도 아진이 진짜 사라진 것처럼 말했고 세가의 무인들은 크게 걱정을 하며 급히 움직였다.

    아진은 그 많은 무인이 자기를 찾아 급하게 움직인다는 것에 묘한 기분을 느꼈다.

    “세가 사람들이 모두 너를 좋아한다. 아진아. 아. 모두는 아니구나.”

    북리의천의 말에 아진이 웃었다.

    북리의천은 절대 아진의 웃음을 전부 이해하지는 못할 터였다.

    아진은 자기가 검술을 배워서 그들과 함께 전투하는 것을 상상했다.

    ‘동료. 나를 위해서 싸우는 동료. 그리고 내가 지켜 줘야 할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생겼다는 게 얼마나 흐뭇한지 몰랐다.

    북리의천은 정진환이 갇힌 뇌옥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3층짜리 전각보다 높이 자란 나무 위였는데 북리의천은 한쪽 팔로 아진을 안고 땅을 한 번 박차고 그곳까지 올라가 버렸다.

    아진은 그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스승님. 저도 나중에는 이걸 할 수 있게 돼요?”

    “물론이다. 너는 후기지수 중에서도 금방 두각을 나타내게 될 거다. 북리의천의 제자라는 소문이 나면 예쁜 소저들이 아진이 너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난리가 날 거란다.”

    북리의천이 재미있겠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내 친우들이 그렇게 제자 자랑을 해댔었는데. 산본의가에 다녀온 후에 강호 주유를 한 번 하기는 해야겠다. 내 제자 자랑을 하려면 다닐 곳이 많겠다. 이제 그 치들의 제자들은 다 늙었고 네가 제일 어린데 아…… 그러고 보니 그러면 배분 문제가 생길 수가 있겠구나.”

    “배분 문제요?”

    “그래. 나와 호형호제하는 사람들의 제자들은 이미 나이가 많고 그들에게도 제자가 있지. 그 제자들도 너보다 나이가 많을 거다. 그래도 나이가 많다고 너에게 함부로 하지는 못할 거다. 좋지?”

    “네. 스승님. 스승님을 찾아오길 정말 잘 한 것 같아요. 저는 그런 걸 전혀 몰랐는데. 저는 운이 정말 좋아요. 아버지랑 어머니도 좋으신 분으로 잘 만났고요.”

    “응?”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났다는 말이 그에게는 이상하게 들린 모양이었다.

    아진도 자기 실수를 깨닫고 그냥 활짝 웃는 것으로 넘어갔다.

    아진에게는 이곳에서의 삶이 보상처럼 느껴졌다.

    진짜 가족, 진짜 친구들에게서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들을 여기에서는 마음껏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오는구나.”

    북리의천의 말에 내려다보니 천의가 아닌 다른 사람이 뇌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가 사라지자 몇 명의 무인들이 그 뒤를 따라갔다.

    “우리도 가 보자.”

    “네. 스승님.”

    북리의천이 아진을 안고 가볍게 바닥에 내려섰다.

    상당히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바닥에 내려설 때 소리도 거의 나지 않고 바닥에 충격도 거의 전해지지 않았다.

    “이게 내공의 차이란다. 이렇게 떨어지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북리의천이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고 아진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저도 다 가르쳐 주세요.”

    “물론이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너도 전부 할 수 있게 될 거다. 게다가 너는 암기도 잘 다룰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여러모로 이 스승을 뛰어넘게 될 거다. 나는 12명의 고수에 이름을 올렸지만 아진이 너는 천하 제일인이 될 수도 있을 거다.”

    “제가 천하 제일인이 되면 좋으시겠어요. 스승님?”

    북리의천은 이 귀여운 제자를 어쩌면 좋을까 하는 표정으로 아진을 바라보았다.

    “아니다. 아진아. 이 스승은 아진이 네가 그저 행복하고 건강하게만 자라면 더 바랄 게 없겠다. 네가 되고 싶은 게 되어라. 네가 어떤 모습이건 이 스승은 너를 늘 자랑스러워할 거다. 그럴 수밖에 없지. 지금도 이렇게 자랑스러운데.”

    북리의천을 아는 사람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기함하면서 쓰러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언제나 냉기가 뚝뚝 떨어지던 염세적인 북리의천이 제자를 보고 웃느라고 눈가에 접힌 주름이 펴질 줄을 몰랐던 것이다.

    어느새 그들은 뇌옥으로 들어갔고 그곳을 지키고 있던 무인들이 북리의천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자는 어찌 됐느냐.”

    “잡아두었습니다. 장로님.”

    “그래. 수고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정진환이 갇혀 있던 곳에 새로운 의원이 함께 갇혀 있었다.

    그는 북리의천을 발견하고 사신이라도 본 것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얼굴 꼴이 왜 그러는 것이냐. 누가 보면 귀신이라도 본 줄 알겠구나.”

    북리의천이 차갑게 말하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왜 이곳에 온 것인지 솔직히 말해라. 조금이라도 거짓을 고하면 너는 이 자리에서 목을 잃을 것이다.”

    “예, 장로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한 것과 다를 것이 거의 없었다.

    정진환이 살아 있다는 말을 듣고 놀란 천의가 그를 불러 정진환을 처리하게 했던 것이다.

    “이제부터 할 일이 있다. 천의를 찾아가서 네가 맡은 일을 완수했다고 하여라.”

    “장로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래. 맞다. 네놈은 죽을죄를 지었고 이제 그 죗값을 치르게 될 거다. 네놈이 천의의 앞에서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서 네놈에 대한 처분이 달라질 것이다. 알겠느냐.”

    “예. 장로님.”

    그는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그렇게 담력이 약한 사람이 뭘 하겠다고 그런 일에 나선 건지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떨어서야 천의를 속일 수도 없겠다고 생각하며 아진은 평소에 비상용으로 가지고 다니던 안심환을 그에게 먹였다.

    세가의 의방에도 안심환이 있겠지만 산본의가에서 만든 것에 비할 바가 아닐 터였다.

    안심환을 먹고 나서 의원의 몸이 눈에 띄게 달라지는 것을 보고 북리의천은 신기해했다.

    안심환에 대해서는 그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효과가 빠르고 강하게 나타나는 것은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럼 이제 가 보도록 하자.”

    의원은 천의를 속이기 위해 앞장을 섰다.

    북리의천은 끝까지 따라가지 않고 천의의 모습이 보이는 곳에 숨어서 기다렸다.

    그러자 의원이 천의를 불렀고 천의가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온 천의는 주위를 둘러보며 다른 사람이 따라붙지는 않았는지 조바심 나는 얼굴을 하고 눈앞의 의원에게 버럭 화를 냈다.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뭘 하는 것이냐!”

    “보고만 드리고 돌아가려고 합니다. 함께 있는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봐야 좋지도 않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걸 아는 사람이 나를 여기로 불러낸다는 것이냐!”

    “그리 화를 내지 마십시오. 시키신 일은 잘 처리했습니다. 정 의원은 이제 확실히 죽었습니다. 숨이 멎은 것을 확인하고 왔습니다.”

    “…….”

    천의는 호락호락한 자가 아니었다.

    혹시라도 함정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듯 계속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만약 그게 자신의 지시로 된 일이 아니었다면 그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고함을 치기라도 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보니 그런 것들을 놓친 채 눈만 굴리고 있었다.

    북리의천은 그만하면 증거는 충분하다고 생각한 듯 아진을 바라보았다.

    “너는 여기에 있거라.”

    “예. 스승님.”

    “대답만 하고 이번에도 다른 곳으로 가 버리면 안 된다.”

    “예. 스승님.”

    북리의천은 믿어도 되나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천의를 향해 걸어갔다.

    북리의천을 본 천의의 얼굴은 안타까울 정도로 창백해졌다.

    “자, 장로님. 장로님께서 여기에는 어찌…….”

    “천의. 북리세가의 수석 의원이라는 자가 남의 목숨을 그렇게 가볍게 여기는 자라는 것을 내가 미처 몰랐구나. 내가 목숨을 부지한 것이 그렇게나 마음에 들지 않더냐.”

    “자…… 장로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제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품겠습니까. 장로님의 병이 나았다는 말에 제가 얼마나 기뻐했는데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제 실력이 부족해서 제 손으로 고쳐 드리지는 못했지만 다른 사람이 장로님의 병을 고쳤다고 그자를 질투하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북리의천은 뻔한 얘기는 듣지 않겠다는 듯 뒤를 돌아보았고 이미 와서 대기 중이던 무인들을 불러들였다.

    “장로님. 오해입니다. 저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무고합니다. 저에게 이러실 수는 없는 일입니다. 뭘 하고 있느냐! 네가 알지 않느냐? 나는 이 일과 아무 관계도 없다고 어서 말씀을 드리거라.”

    천의가 의원에게 소리쳤지만 이내 무인들에게 제압되었다.

    북리의천은 무인들에게 아진을 찾았다고 말했다.

    무인들은 헛고생을 했다고 불평하는 대신 아진이 무사히 돌아온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다행입니다. 장로님. 아진이는 무사한 것인지요.”

    “그렇다네. 방에서 혼자 잠을 자고 있었던 모양이네.”

    “다행입니다. 하긴 곤하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아진이를 찾았다고 어서 소식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다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멀리서 무인들의 말을 들으면서 아진은 웅장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북리의천도 아진의 기분을 아는 듯 웃으며 아진에게 돌아왔다.

    “이제 남은 일은 가주님과 다른 장로님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산본의가로 떠나도록 하자. 아진아. 원래 세가라는 곳이 일이 끝도 없이 생겨나는 곳이란다. 남은 사람들의 힘으로 충분히 지금의 일을 처리할 수 있을 테니 이대로 떠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준비가 안 된 것이 있으면 그것은 가면서 차차 준비하는 것으로 하고 말이다.”

    북리의천은 서둘렀고 아진도 그의 말이 맞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세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다른 곳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는 했지만 한 번 일어나면 그 규모가 정말 커서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웠다.

    이번 일만 해도 만약 아진이 아니었다면 전모를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진이 아니었다면 정진환이 침을 놓아 살해하려 했을 때 그냥 죽었을 것이고, 정진환이 죽었을 때 그를 살리지 못했을 터였다.

    ‘운이 좋았지. 조금만 늦었으면 정진환을 살리지도 못했을 테고.’

    만약 정진환을 살리지 못했다면 그의 배후에 천의가 있었고 천의가 모든 일의 핵심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아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아진이 북리의천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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