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러, 의선되다-23화 (23/470)

제23화

23화

정진환은 북리의천에게 막 탕약을 올린 참이었다.

북리의천은 의원이 그렇게 일찍부터 탕약을 가져와 재촉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가 아직 잠이 덜 깬 모습으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진한 약재 냄새가 코끝을 파고들어 역한 기분이 들었지만 정진환은 옆에서 거기에 들어간 약재 특유의 냄새 때문에 그런 것이니 참고 드셔야 한다고 설명을 해 주었다.

그 방면의 권위자로부터, 원래 그런 거라는 말을 들으면 그런가 보다 하고 순순히 수긍이 되기 마련이었다.

“혈맥을 보하는 약재를 섞어 달인 것이니 아침저녁으로 꾸준히 드시면 효과를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수고가 많네. 정 의원. 나 때문에 새벽같이 일어났겠군.”

“장로님께서 쾌차하셨는데 그것이 어렵겠습니까. 어서 드시지요.”

“아직은 좀 뜨겁군.”

“뜨거울 때 드셔야 약효가 좋습니다.”

“그러다가 혀가 까지면 고생이지 않은가. 무림 고수라도 혀가 까지면 아픈 법이네. 조금만 식혔다가 먹겠네.”

“하지만…….”

“아힛. 뜨거워라. 그릇을 들고 있는데도 뜨거운데 이게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다고 생각해 보게. 내 생각에는 식도가 다 탈 것 같아.”

북리의천은 정말 뜨거운 듯 얼굴까지 찡그리고 그릇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정진환은 기가 막혔다.

천하에 무서울 게 없어 보이는 무영검이 뜨거운 탕약을 이렇게 못 마실 줄 누가 알았겠는가.

“장로님. 가지고 오는 동안 이미 많이 식었습니다. 어서 드시지요.”

“온도에 따라서 탕약의 효능에 차이가 나는가?”

“……예?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뜨거울 때 마시는 것이…….”

“아니야. 아니야. 안 해도 되는 고생은 안 하는 게 좋아.”

“그러면 제가 식혀 드리겠습니다.”

“놔두면 곧 식을 텐데 뭘 그러나. 이건 내가 책임지고 전부 다 마실 테니 정 의원은 이제 가서 쉬도록 하게. 나 때문에 일찍 일어나고 지금까지 쉬지도 못했을 테니 말이네.”

“하지만 저는 장로님께서 그것을 모두 드시는 것을 보고 확인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약이 쓰다고 안 먹고 몰래 버릴까 봐 그러는가. 나도 이 약재가 얼마나 귀하고 비싼 것인지 다 알고 있네. 세가의 자산은 귀한 것인데 내가 그렇게 생각 없이 굴까. 걱정하지 말고 돌아가게.”

다 된 일이었다.

지금이면 이미 탕약을 다 마셨어야 옳았다.

그런데 무슨 말이 그렇게 많은지.

“밖에 누가 있는가.”

북리의천이 말을 하자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무사가 들어왔다.

북리의천이 병을 앓을 때부터 유사시를 대비해 늘 그의 문밖에는 그곳을 지키는 무사들이 있었다.

“찾으셨습니까. 장로님.”

밖에 있던 무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정 의원을 묶도록 하라.”

“……예?”

그의 말에 놀라기는 무사나 정진환이나 모두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조곤조곤 말을 잘 들어 주던 북리의천이 갑자기 토라진 아이처럼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장로님. 그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정진환이 동그래진 눈으로 묻자 북리의천이 웃었다.

“정 의원. 네가 아직 모르는 것이 있다. 사람의 몸에서는 자기가 의도하지 않아도 기운이 흘러나가곤 한다. 평범한 감정을 갖고 있을 때라면 모르겠지만 살심을 품고 긴장을 하면 그 감정이 기운을 타고 흘러나가지. 무인들은 그것을 키워서 상대를 위협하기도 하는데 정 의원은 제 몸에서 살기가 흘러나는 것도 알지 못한 채 살행을 하려 한 것이구나.”

북리의천은 재미있다는 듯이 조곤조곤 이야기를 해 주었다.

“장로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무사가 말하자 북리의천이 탕약 그릇을 옆으로 밀며 말했다.

“만약 내가 잘못 안 거라면 그때는 사과하도록 하지. 나는 내 제자가 와서 이걸 먹어도 된다고 할 때 먹을 것이다. 어서 묶지 않고 뭘 하는가.”

“존명!”

무사는 뒤늦게 정신이 든 듯 정 의원을 포박했다.

그리고 그때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장로님. 탕약을 드시면 안 됩니다. 독이라 합니다!”

여러 사람이 한목소리로 외치며 경공을 펼쳐 달려왔다.

문을 부술 듯 들어온 이들은 모두 북리의천을 바라보았다.

그가 탕약을 먹은 게 아닌지 걱정이 되어 불안한 얼굴이었다.

“서 공자가 그걸 드시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장로님.”

가장 먼저 온 자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렇군. 내 제자가 그랬군. 그러면 내가 사과할 일은 없을 것 같구나. 정 의원.”

“서 공자가 묶여 있었습니다. 어딘가에 갇혀있다가 도망 나온 것 같았는데 저희에게 빨리 가서 장로님이 탕약을 드시지 못하도록 막으라고 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내 제자가 묶이다니. 아진이가 갇히다니?”

목소리는 북리의천이 있던 자리에서 들렸는데 그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다만 그 자리에 서 있던 사람들의 옷자락이 거센 바람에 펄럭일 뿐이었다.

북리의천은 아진을 찾아 멀리 갈 것도 없었다.

아진은 스스로 밧줄을 풀 수 있었지만 손이 묶인 채로 가는 게 증거가 될 것 같아 계속 그러고 가는 중이었다.

“앗, 스승님!”

북리의천을 보자 그가 탕약을 먹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어서 마음이 놓였다.

“이게……! 이게 무슨 일이냐. 아진아! 누가 내 제자에게. 감히! 정 의원 그놈이냐!”

북리의천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났고 그의 몸에서 아지랑이 같은 것이 뿜어지는 것이 육안으로 보일 정도였다.

정진환은 아마도 살아날 수 없을 듯했고 아진도 북리의천을 막을 생각이 없었다.

북리의천은 아진의 뒤로 가서 밧줄을 끊어 버렸다.

묶은 매듭을 풀 정신도, 인내심도 없어서 단숨에 끊어 버리고 아진의 손목에 난 붉은 자국을 보면서 울분을 참지 못했다.

“저런,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놈! 아진아. 너는 여기에 있거라. 아니지. 앞으로는 내 옆에서 조금도 떨어지지 말거라. 다른 곳에 가고 싶거든 말을 하고 가야 한다.”

“변소에 갈 때도요?”

“그래. 변소에 갈 때도 스승님이 지켜주마!”

아진은 장난으로 한 말이었는데 그는 장난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다친 데는 없느냐. 아진아. 숨기지 말고 말을 해야 한다.”

“네. 스승님. 그 의원님은 제선문의 사람이었나 봐요. 제선문에서는 살수를 키운대요. 그리고 거기에서 배운 방법으로 저를 죽이려고 했는데 안 죽었어요.”

“그래. 고맙다. 그리고 장하다. 역시 내 제자다. 정말 고맙다. 앞으로도 절대 죽으면 안 된다. 아진아.”

북리의천이 아진을 꼭 끌어안았다.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했다는 생각에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였다.

아진은 북리의천에게 안긴 채로 재잘재잘, 자기가 들은 얘기를 전부 해 주었다.

정진환이 제선문과 연관된 사람이라는 것은 아진에게 정말 즐거운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눈엣가시 같던 제선문이었는데 잘 하면 이번 기회에 치명타를 안길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지금 당장 가주님을 뵙도록 하자. 그자들을 그냥 둘 것이 아니다.”

북리의천이 아진을 데리고 가주전으로 향하는 동안 소문을 들은 무인들이 주위로 몰려들었다.

북리의천의 기세가 워낙 등등해서 섣불리 다가오거나 묻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아진이 북리의천을 살렸다는 이야기를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북리세가처럼 소문이 빨리 퍼지는 곳도 드물었다.

북리의천은 아진이 아직 어려서 잘 따라오지 못하는 것 같아 보이자 아예 안아 들고 경공을 펼쳤다.

가주전이 대단히 멀리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마음이 급해서 그냥 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가주는 그때까지 소식을 모르고 있다가 북리의천이 아침 댓바람부터 아진을 안고 나타나는 걸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형님. 느지막이 제자를 보시더니 제자가 그렇게 예쁘십니까. 설마 어젯밤부터 계속 그렇게 안고 계신 것은 아니겠지요? 발에 흙이 닿을까 봐 애가 타는 모습입니다.”

가주가 북리의천에게 농을 건넸지만 북리의천은 심각했다.

“가주님. 의방의 정진환이 저를 독살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아차린 제 제자를 가두고 죽이려고 했고 말입니다. 제선문의 살수였다고 합니다. 당장 세가 내에 있는 제선문의 의원들을 구금해 주십시오.”

북리의천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가주는 자기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건가 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형님…… 그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정진환은 지금 제가 붙잡아 두었습니다. 가주님께서 직접 심문을 하시고 명백히 밝히시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가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복리의천을 따라 나왔다.

“아진아. 너는 괜찮은 것이냐.”

“네. 가주님. 저는 괜찮습니다.”

“아진이가 아니었으면 무슨 일이 생겼을지 모릅니다.”

복리의천은 그 사이에 깨알 같은 자랑을 늘어놓았다.

어차피 자기가 먼저 정진환에게서 살기를 느껴 탕약을 먹지 않았을 거였지만 제자의 자랑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너무 놀란 가주에게는 그런 이야기가 귀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그가 나가자 가주의 명에만 움직이는 무력 부대가 동시에 움직였다.

가주의 전음을 받은 듯 그들은 먼저 의방으로 향했다.

그래서 아진 일행이 의방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제선문 출신의 의원들이 모두 잡혀 있는 상태였다.

천의는 놀란 얼굴로 그들 앞에 나왔다.

“가주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가주는 천의에게 그간의 일들을 모두 말해 주었다.

천의가 제선문이나 천응문 출신이 아니라 파벌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해서였다.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저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 동안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제 죄가 작지 않으니 저를 벌해 주십시오.”

그가 바닥에 엎드려 이마를 찧었다.

어찌나 세게 찧었는지 머리에서 피가 났고 가주가 무인들을 시켜 그를 일으키게 했다.

“천의의 잘못이 아니오. 모두 들어라. 정진환은 이미 잡혀 있다. 그자를 심문해서 명백히 진실을 밝힐 것이나 이 자리에서 자백을 하는 자가 있으면 정상은 참작해 줄 것이다. 제선문에서 밀명을 받고 살행을 하려고 잠입한 자들이 있으면 지금 자백을 해야 할 것이다!”

가주의 목소리가 엄하게 울려 퍼지는 동안 아진은 슬그머니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북리소은이 곧 산본의가로 떠나기로 하고 산본의가에 같이 보낼 물건들을 준비하고 있을 텐데 그것을 구경하고 싶어서였다.

총관이 물건을 확인하며 각자 여러 번 검수하고 마차에 싣는 동안 장로 몇 명과 북리소은도 그것을 꼼꼼히 챙겼다.

“수량을 맞춘다고 하품(下品)까지 끼워 넣지 말고 정성을 들이도록 하게.”

“예. 장로님.”

“마음 같아서는 나도 함께 가고 싶구나.”

“조만간 오세요. 장로님.”

“그래. 은아는 그때까지 수련을 잘 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꼭 아진이처럼 훌륭한 의원이 되거라.”

“아진이처럼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수련은 잘하고 있을게요.”

북리소은이 일찌감치 포기하는 듯이 말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진이 멀리서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는데 어느새 북리의천이 옆으로 다가왔다.

“스승님이랑 같이 다니라고 했더니 그사이에 사라져버린 것이냐.”

“아. 잠깐만 보려고요. 헤헤.”

아진이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본격적으로 무공 수련을 시작하게 되면 앞으로 본가에 갈 일이 많지 않을 테니 이번에 나와 함께 다녀오자꾸나. 나도 인사를 드려야 하지 않겠느냐.”

“정말요. 스승님?”

“그래. 그래야지.”

아진은 무심한 척하고 있어도 벌써 가족 생각이 나던 참이라 그 말이 반가웠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녀석. 가고 싶은데 참은 거였구나. 그래. 준비를 마치고 다녀오도록 하자.”

북리의천은 기분이 좋았다.

가문의 비전을 아진에게 전수하는 것을 가주에게 허락을 받아서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