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22화
매번 자신을 앞서던 천응문 출신의 의원을 독살한 것을 천의가 알고 있었다.
모두의 눈을 완벽하게 속였다고 생각했기에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정진환은 느낀 두려움은 컸다.
지금껏 쌓아왔던 것들이 한꺼번에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잊지 마시게. 정 의원. 이번 일만 해결이 된다면 서문 세가에 정 의원을 천거함세. 이제 정 의원도 남의 밑에서 보조나 할 때는 지나지 않았는가. 그곳의 수석 의원이 건강에 이상이 생겨 시침을 하는 것이 어렵다는 소문이 들려온 지 여러 달이니 곧 새로운 수석 의원이 필요할 걸세. 서문 세가의 수뇌부와는 친분이 두터우니 내가 천거하면 육 할은 성공이라고 봐도 되네.”
다른 때 같았다면 그 말에 눈이 돌아갔겠지만 지금은 눈앞의 일 때문에 좋아할 정신도 없었다.
북리의천에게 올리는 약재를 바꿔치기해서 그를 의식불명에 빠뜨리면 영원히 사지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마비시키는 것은 천의가 하겠다고 했다.
정진환이 할 일은 바꾼 약재로 탕약을 지어 북리의천에게 주는 게 전부였지만 부담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북리세가의 별을 지게 한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은 없었다.
그저, 그런 일에 꼭 자기 손을 대야 하는 건가 해서 그것이 불만일 뿐이었다.
* * *
날이 밝기 전부터 세가의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아진은 일찌감치 잠에서 깨서 밖으로 나가 세가 내부를 구경했다.
북리의천이 아진에게 성을 구경시켜주기로 했고 밖에 나가서 아진이 쓸 수 있는 목검이 있는지 보자고 했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들떠 있었다.
한 가지 색으로 무복을 맞춰 입은 세가의 무인들이 줄을 지어 바쁘게 오가는 모습을 보면 생동감이 넘치고 괜히 자랑스러웠다.
‘역시 우리 무사님들이네.’
아진은 멋대로 소속감을 느끼고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 중 몇 사람이 벌써 아진을 알아보고 아진에게 손을 흔들었다.
대열을 이루어 이동하는 도중에 손을 흔들 정도면 꽤 높은 지위의 사람인 것 같은데 그런 사람이 자기를 알고 인사를 건네주는 게 벅차서 아진도 인사를 했다.
너무 일찍 일어나서 할 일이 없었는데 혼자 세가 내부를 돌아다녀도 될까 하며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겨보았다.
만약 자기가 가면 안 되는 곳에 이른다면 경비 무사들이 제지할 거라고 생각하며, 일단은 갈 수 있는 곳까지 가 보기로 했다.
‘아. 여기가 약방인가 보네.’
아진은 발길이 닿는 대로 가다가 여러 가지 약재 냄새가 나는 곳에서 코를 벌름거렸다.
아침 일찍부터 달이는 탕약은 아마도 북리의천을 위한 것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흐뭇한 표정을 짓던 아진의 고개가 서서히 옆으로 기울었다.
‘뭐지? 이건 내가 처방한 거랑 다른데? 내가 처방한 약재들이 세가 약방에 없었나?’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것은 대체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처방한 것은 상한 혈맥을 보하도록 하는 약인데 지금 그의 코에 감도는 냄새는 약초에 담긴 독성이 강해서 북리의천의 몸 상태에서는 절대 써서는 안 되는 것들이었다.
그 자체로 독초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약초에 담긴 강한 기운 때문에 잘못 쓰면 환자의 상태를 극도로 악화시킬 수 있었다.
그때 누군가 아진을 발견하고 달려왔다.
“여기에서 뭘 하는 것이냐. 여기는 외부인이 함부로 들어오는 곳이 아니다. 누가 너를 여기로 보냈느냐!”
아진은 북리세가에 와서 처음으로 그런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그런 대우를 받아서 서럽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이 무슨 수작인가 하는 의혹이 강하게 들었다.
아진은 평소에 가면처럼 쓰고 다니는 천진한 웃음을 거두고 눈앞의 남자를 쏘아보았다.
그는 의원복을 입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보다 지위가 높은 듯 복색이 조금 달랐다.
총명하고 권위적으로 보이는 인상에 사람들을 다루고 선동하는 일에 능숙해 보였는데 아진이 자신의 말에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빤히 바라보는 것에 놀란 듯했다.
“내가 한 말을 듣지 못했느냐! 당장 나가라고 했다.”
“저도 묻겠습니다. 의원님은 제가 누구인지 모르십니까?”
정진환은 굉장한 이질감을 느꼈다.
어린아이가 할만한 말투도, 어린아이가 지을 법한 표정도 아니었는데 그런 어린 녀석의 말에서 위압감을 느낀다는 게 더 기가 막혔다.
“제가 물었습니다만.”
아진이 다시 한번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너, 너를 어떻게 알겠느냐.”
정진환은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거짓말을 둘러댔다.
“그렇습니까. 다른 분들은 저를 알고 있던데 말입니다. 처방을 내린 사람이 저입니다. 그리고 제가 내린 처방에는 저 약재들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세가의 약방에 약재가 없어서 급히 다른 것으로 대체 한 거라고 생각을 하려고 해도 지금 쓰인 약재는 비슷하지도 않습니다. 의원님이라면 약재를 저것으로 쓰도록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실 것 같은데 저에게 말씀을 해 주셔야겠습니다.”
아진이 말을 하는 동안 정진환의 얼굴에서 서서히 핏기가 가셨다.
북리의천의 병을 고쳤다는 아이였다.
평범한 아이가 아닐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여러 약재의 냄새가 뒤섞인 곳에서 각각의 약재를 구분해 내는 것은 보통의 능력으로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 자신에게 당장 그곳에서 냄새만 맡고 약재를 가려내라고 하면 그는 향이 강하거나 독특한 몇 개의 약재를 제외하고는 구분해 내지 못할 터였다.
그는 아진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헛소리하지 말고 꺼져.”
그는 강한 척했지만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을 감추기가 힘들었다.
“의원님입니까?”
아진은 천천히 말하고 정진환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정진환은 아진의 눈초리를 받으면서 더 이상 깊이 생각을 할 수가 없었고, 자기가 천의와 나눴던 말을 전부 알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아진의 몸을 황급히 둘러멨다.
그리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그대로 아이를 창고로 데려갔다.
약재를 보관하는 곳이었는데 자주 사용되지 않는 약재의 재고를 보관하는 곳이라 웬만해서는 열릴 일이 없었다.
그곳의 열쇠를 가진 사람은 그뿐이었고 창고 자체가 외진 곳에 따로 있어서 이곳에는 순찰을 도는 무사들도 오지 않았다.
갑자기 어두운 곳으로 아진을 데려간 그는 그제야 뒤늦게 이성이 돌아온 듯 머리를 굴렸다.
‘이 자식이 뭘 알고 있는 거지? 아니야. 뭘 안다는 거야? 헛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괜한 짓을 했어. 그냥 잘 타일러서 나가게 했어야 하는 거였는데.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하지?’
정진환은 화가 나서 아진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아진은 바닥을 굴렀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순간적으로 마나가 그의 몸을 보호한 탓이었다.
그것은 던전에서 구르는 동안 저절로 몸에 익은 기술이었다.
정진환은 일을 이렇게까지 만들 생각이 없었다가 갑자기 뒷일을 수습할 생각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상대는 보잘것없는 어린아이였지만 하루 만에 북리세가의 영웅이 되어 버린 아이였다.
보지 못했다고 말한다고 그냥 넘어 가줄 것 같지도 않고 다들 철저히 찾으려 할 텐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젠장!’
정진환은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렇다고 마냥 그곳에만 있을 수는 없었다.
약을 북리의천에게 가져다주는 것도 그가 해야 할 일이었다.
‘그 사이에 이 녀석이 도망치기라도 하면?’
묶어 두고 밖에서 문을 잠가두면 될 것 같기도 했지만 남들이 생각지도 못 하는 일들을 해내는 아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는 몇 번 심호흡을 하다가 품에서 침 기구를 꺼냈다.
“나를 원망하지 마라. 나도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일을 이렇게 만든 건 너야!”
그는 아진의 손을 모아 밧줄로 묶고 저항하지 못하도록 한 후에 머리를 한 손으로 고정한 채 품에 끌어안고 요혈을 노렸다.
“그래도 운이 좋은 줄 알아. 고통 없이 바로 죽을 수 있는 건 아무에게나 주어진 복이 아니다. 이건 제선문에서 전해지는 방법이다. 제선문에서 키우는 살수들이 아무도 모르게 침으로 목숨을 거두는 방법이지.”
그는 아진이 살아남을 수 없을 거라고 확신한 듯 말을 하며 아진의 머리에 동시에 침을 놓았다.
가운뎃손가락의 두 배 만하고 굵기도 일반적인 침에 비해 훨씬 굵은 특별한 침이 곳곳에 깊이 파고들었다.
아진은 정신이 말짱했다.
지금껏 아버지가 침을 놓는 것을 수도 없이 봐 왔지만 이런 식으로 침을 놓는 건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정진환이 침을 놓는 곳은 아버지가 전부터 주의를 당부하던 곳들이었다.
‘제선문의 살수? 그렇구나.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기술을 가진 자들이면 죽이는 방법에도 능통하고 이 사람들이야말로 남의 눈에 쉽게 들키지 않고 살행을 펼칠 수 있는 거야…….’
아진은 정진환이 침을 놓는 자리를 기억했다.
정진환은 회심의 미소를 짓더니 아진의 옷을 끌어 올리고 명문혈을 손가락으로 짚더니 그 자리에 깊이 침을 찔러 넣었다.
“생명의 문이라고 하는 곳이지만 이 상태에서는 너에게 죽음을 안겨다 주게 되지.”
‘아하.’
아진은 그 모든 것들이 신기했다.
정진환은 자기가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을 지체했다고 생각하며 아진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살아날 수는 없는 거라는 생각이 들자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후련했다.
‘어차피 북리의천이 죽으면 이런 아이가 와서 죽은 건 사람들 기억 속에서도 금방 사라질 거다.’
아이가 어리니 시신을 처리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그는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지 못했다.
사람을 죽였는데 그의 옷에는 피 한 방울도 튀지 않았다.
제선문에서 배운 후에 그 방법을 직접 사용해 본 적은 없었지만 처음부터 그는 자신이 있었다.
언젠가 제선문을 이어나갈 후계자로까지 거론되던 자기가 아니었던가.
창고 문을 잠그고 정진환은 주위를 살핀 후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탕약을 북리의천에게 올리기 위해서였다.
* * *
‘오. 신기하네.’
아진은 한동안 시침의 효과가 몸에서 제대로 돌게 놔두었다.
정진환이 뭘 하려고 한 건지 알아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그가 어떤 식으로 사람을 죽이려 한 건지 깨닫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이런 식으로 작용을 하는 거구나. 신기해. 정말 신기해. 응용해 보면 많은 도움이 되겠어. 제선문 침술의 정수인 것 같아. 아.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그 후로는 마나를 움직여 기혈을 정상적으로 순환시켰다.
‘스승님을 죽이려고 그러는 것 같은데 네 마음대로 되게 하지는 않을 거다.’
아진은 그대로 일어나 문을 향해 달려가 어깨로 문을 부쉈다.
밖에 누가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라 보통은 그런 식으로 신력(身力)을 드러내지 않지만 지금은 북리의천이 약을 먹기 전에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이런 것 저런 것을 따질 틈이 없었다.
우지끈 소리를 내며 문이 요란하게 부서졌다.
손이 뒤로 묶여있는 상태라는 것도 잊은 채 아진은 밖으로 달려나갔다.
“서……, 서 공자……!”
얼마쯤 달려가자 아진을 본 사람들이 아진의 상태를 보고 깜짝 놀라 달려왔지만 아진은 북리의천의 처소로 달려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서 공자.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누가 이랬다는 말인가!”
경악한 얼굴로 무인이 소리치자 아진이 다급히 말했다.
“의방의 의원이 스승님께 탕약을 올리는 걸 막아야 합니다. 그 사람이 저를 창고에 가두고 침을 꽂아서 죽이려고 했어요. 먼저 스승님께 가서 탕약을 드시지 말라고 해 주세요.”
아진이 외치자 아진에게 오던 사람들이 놀란 얼굴을 하더니 이내 북리의천의 처소로 달려갔다.
경공을 펼친 그들의 신형이 빠르게 사라졌다.
아진은 그나마 안심을 하면서 달렸다.
‘무공은 꼭 익혀야겠어. 무공만 익히면 나도 저렇게 빨리 달릴 수 있는 거잖아.’
그로써 무공을 배울 이유가 또 하나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