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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20화 (20/470)
  • 제20화

    20화

    북리의천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고 두 사람 사이의 일이 끝났다고 생각한 북리소은이 달려와 깨끗한 천으로 북리의천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그는 그제야 자신의 눈에서 나온 것을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내 몸 안에 이런 것이 있었다는 것이냐.”

    “저도 그건 몰랐어요.”

    아진의 말에 그는 더 놀라고 있었다.

    “우선은 먼저 씻고 와야겠다. 내 제자에게 이렇게 꼬질꼬질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말이다. 아진이가 많이 피곤할 테니 어서 식사를 준비하라고 이르거라. 은아야.”

    북리의천은 아진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 고풍스러운 전각으로 돌아갔다.

    “아진아. 정말 백부님이 다 나으신 거야?”

    북리소은이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아진은 확답을 하지 않았다.

    “그건 저도 몰라요.”

    그러나 아진이 그렇게 말을 해도 북리의천의 곁에서 그를 지켜봐 왔던 의원들은 북리의천이 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했다.

    북리의천이 나았다는 소문은 세가 내에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게 아진 때문이라는 말 역시 따라붙었다.

    세가는 잔치 분위기였고 가주와 장로들은 앞다투어 아진과 얘기를 나누고 싶어 안달이 났다.

    오리고기와 돼지고기, 닭고기, 물고기를 재료로 해서 만든 수십 가지 요리가 올라온 상을 차지하고 앉아서 아진은 쏟아지는 질문 공세에 당황했다.

    “상공. 아진이 식사를 편하게 하지 못하잖아요. 일단 식사를 다 할 때까지는 기다려주세요.”

    가모가 옆에서 말을 해 주었지만 그런 가모도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아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진은 그런 관심이 점점 부담스러워져서 결국 젓가락질을 조금 하다가 내려놓았다.

    “왜? 더 먹지. 벌써 배부르니. 아진아? 그럼 혹시 진맥을 해 줄 수 있을까?”

    가주는 앞의 몇 마디는 그냥 형식적으로 한 거였다는 듯이 곧바로 본론에 진입했다.

    “그다음에는 나도 부탁하겠다. 아진아. 진료비는 섭섭하지 않게 주마.”

    장로들까지 그러고 나서고 있을 때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북리의천이었다.

    “내 제자를 곤란하게 하지 마십시오. 가주님. 장로님들. 내 제자는 앞으로 나에게 배워야 할 게 아주 많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아주 자연스럽게 아진의 옆에 가서 앉더니 좀 더 먹지 그러냐면서 자기도 식사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요 근래 몸이 부쩍 안 좋아지면서 거의 물처럼 생긴 죽이 아니고는 제대로 넘기지도 못하던 북리의천이었다.

    그나마 무공을 익히고 수십 년 동안 축기를 꾸준히 해 와서 내공으로 버텨내는 중이었는데 몸이 다 나은 것 같다고 생각하며 갑자기 딱딱한 음식을 함부로 먹어도 되는 건지 모두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북리의천은 북리세가의 다른 이름과 마찬가지였다.

    북리세가는 북리의천과 흥망성쇠를 함께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북리의천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걱정은 더욱 각별했다.

    “형님. 제가 봐도 혈색이 몰라보게 좋아지고 형님이 정말 건강해지신 것 같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보식을 하시면서 천천히 나아가는 게 낫지 않을지요?”

    가주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북리의천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가주님. 나는 이제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아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스승님은 스승님의 의지로 그렇게 하실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동안 쇠약해져 있던 혈맥이 다시 강해질 때까지 스승님이 조심해 주시는 것이 좋기는 할 거예요. 회복이 되기는 했지만 완전히 나을 때까지 시간을 주고 기다려주시는 게 좋아요.”

    “그렇구나.”

    자신만만하던 북리의천은 바로 꼬리를 내렸다.

    아진은 그동안 그가 어떤 식사를 했는지 묻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보다는 낫게 드셔도 될 거예요. 제가 어떻게 조리를 하면 될지 알려드릴게요. 그리고 제가 말씀드리는 약재를 구해다 주시면 그걸로 탕약을 만들어 드릴게요. 그거랑 함께 드시면 혈맥도 금방 강해질 거예요.”

    사람들은 신통하다는 듯이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진은 상에 차려진 음식 중에 북리의천이 먹을 수 있는 것을 골라서 그의 앞에 끌어다 주었다.

    “이건 지금도 드셔도 돼요. 숙수님에게 이런 식으로 음식을 준비하라고 하시면 되겠네요.”

    아진이 북리의천에게 준 것은 깨가 많이 들어간 탕 종류의 음식이었는데 북리의천은 즐거운 마음으로 그것들을 먹었다.

    사람들은 숨소리마저 죽인 채 북리의천이 그것을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전에는 그 정도의 음식을 삼키지도 못하던 사람이 후루룩 먹는 것을 보면서 모두 신기한 마음과 감격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스승님. 그만큼만 드시고 이제 이걸 드세요. 양을 조금씩 늘리셔야지 한 번에 갑자기 늘리면 부담이 가요.”

    “그래. 아진아.”

    북리의천은 아진의 말이라면 뭐든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가주는 그 모습을 보면서 연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걱정하는 마음은 다 같겠지만 누구도 그렇게 단호하게 북리의천의 행동을 통제하지는 못했는데 아진이 너무 자연스럽게 그 일을 해 내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홍복이로다. 홍복이야. 어디에서 이런 아이가 왔을꼬. 은아야. 네가 큰일을 한 것 같구나. 이럴 것이 아니다. 은아 네가 돌아갈 때 산본의가에 큰 선물을 보내야겠다. 아진아. 의가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가주가 묻자 아진은 산본의가에 필요한 것을 줄줄 읊었다.

    산본의가에서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어서 의학당을 만들어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면 좋겠고 그 사람들이 의술을 수련할 수 있도록 침 기구가 있었으면 좋겠고 깨끗한 천이 아주 많이 필요한데 그걸 산본의가에서 계속 대기에는 재정적으로 어려움이 있다는 등의 얘기가 한동안 길게 이어졌다.

    가주는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라면서 그 자리에서 총관을 불러 필요한 지시를 내렸다.

    “은아는 언제 떠날 생각이냐. 배움에 뜻을 뒀으면 속히 떠나는 게 좋을 것 같다만. 선물이 준비되는 대로 떠나도록 해라. 나도 함께 가서 산본의가의 가주님을 뵙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구나.”

    그는 아진을 보고 그 실력이 너무 탐이 나서 소은이 빨리 그런 실력을 갖추게 되기를 바랐다.

    이대로 자라기만 한다면 신의라는 소리를 듣게 될 게 분명할 아진이 웬일인지 의술에는 더 이상 뜻을 두지 않고 무공을 배우겠다고 하는데 그것도 그에게는 희소식이었다.

    그만한 아이가 북리세가의 제자가 되어 무공을 익힌다면 앞으로 세가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 상상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모두에게 사랑받는 사람이란 있을 수가 없는 듯, 아진에게도 질시의 시선을 보내는 자들이 있었다.

    그동안 북리의천의 병 치료를 전담해오던 북리세가의 의원들에게는 아진의 출현이 달갑지 않았다.

    세가가 잔치 분위기로 떠들썩한 가운데, 세가 의원의 처소로 몇몇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다.

    * * *

    “천의 어르신.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지금까지 안 써 본 약재가 없고 시도해 보지 않은 치료법이 없질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동안은 조금도 호전되지 않던 병세가 갑자기 나아진 것을 보면 이건 사술이 분명합니다. 세가 내에서 무영검 장로님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인 것을 알고 누군가 간계를 꾸민 것이 아닙니까.”

    젊은 의원 정진환의 말은 다소 과격했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비단 그만이 아니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을 두고 의원들은 그것이 마교나 사파의 사술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사라졌다고 하는 혈교에서는 주술로 사람의 사체를 사용해 강시를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 자들이라면 괴질을 고치는 것은 어렵지도 않을 듯했다.

    겉으로만 그렇게 보이고 실제로는 몸이 더 썩어들어 가며 혼이 술자의 조종을 당하게 되겠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병이 나은 것처럼 보일 거라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북리세가의 의원이 되는 길은 아무에게나 열려있는 게 아니었다.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전국 각지에 지부를 세우고 확장해 나가며 이름을 날리는 제선문과 중원 제일 의문이라 불리는 천응문.

    천하는 지금 그 두 의문이 양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북리세가의 의원들도 거의 제선문과 천응문 출신이었다.

    특히나 정진환은 제선문의 촉망받던 제자로, 중원에서는 아직 천응문에 비해 세력이 미약한 제선문의 힘을 키우도록 계획적으로 육성해 북리세가에 들어온 이였다.

    그런데 제선문과 산본에서 치열하게 다투고 있는 작은 의가의 아이가 와서 북리세가 최고의 고수를 고쳤다고 하니 속이 쓰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모두가 처음에 그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두 손을 놓고 있을 때 정진환이 가장 빠르게 머리를 굴려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혈교에서 주술로 그런 일을 했다는 말은 나도 들은 적이 있소. 지금은 혈교가 사라졌다고 하지만 잔당들이 남아 있다가 주술을 행하고 있을 수도 있고 말이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이것은 도저히 의술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의술로 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지금껏 어떤 의원도 무영검 장로님의 병을 고치지 못한 것이 말이 되지 않습니다.”

    “맞소. 아무도 하지 못하던 일을 고작 다섯 살짜리 아이가 치료를 한다니. 그건 속임수나 사술이오. 눈에서 검은 물이 나온 것을 보지 않았습니까. 세상에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가 있다는 말이오?”

    “다섯 살이라는 것도 믿을 수 없는 일일지 모릅니다. 마교의 무공 중에는 어린아이의 몸으로 다시 사는 대법도 있다고 하질 않습니까.”

    그들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진을 성토했다.

    “그러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습니까. 지금은 모두가 무영검 장로님이 나았다고 생각하며 들떠있는데 우리가 섣부르게 말을 하면 그 아이를 질시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잘못 하면 우리의 입지만 좁아질 거라서 이걸 어찌해야 할지…….”

    여러 이야기가 오고 가는 동안 수석 의원인 천의가 입을 열었다.

    “당분간은 지켜보도록 합시다. 누가 보면 우리가 무영검 장로님의 병세가 다시 악화하기를 바란다고 생각하겠소. 무영검 장로님의 병이 나아 다시 북리세가가 옛 명성을 되찾게 된다면 우리에게도 좋은 일이 아닙니까.”

    정진환은 천의가 자신의 말에 찬물을 끼얹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천의가 눈짓으로 정진환을 불렀다.

    정진환은 다른 이들이 나가는 동안 굼뜨게 움직이다가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

    “두 시진이 지난 후에 은밀히 내 처소로 오게. 아무도 알아서는 안 될 것이네.”

    “예. 천의 어르신.”

    정진환은 희색이 만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조용히 나오던 정진환은 혼자서 웃음을 지었다.

    천응문에도, 제선문에도 치우치지 않고 오로지 의도만을 따라가는 것처럼 하지만 어느 누구도 자신을 앞서 나가는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바로 천의라는 것을 그는 모르지 않았다.

    ‘잘하면 늙은이의 아집을 이용해서 일을 쉽게 해결할 수도 있겠군.’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몰랐다.

    이참에 천의와 산본의가를 같이 날린다면 북리세가에서 제선문 의원의 입지는 더욱 확고해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제선문의 중원 진출에 단단한 교두보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그는 표정이 관리되지 않았다.

    혼자 웃음을 삼키는 정진환의 주위로 북리세가의 경내에 조용히 어둠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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