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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19화 (19/470)
  • 제19화

    19화

    나비가 날아가자 그제야 그가 돌아섰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은 흑단같이 검고 윤기가 흘렀다.

    북리소은을 향해 돌아선 얼굴은 단정하고 남자다웠다.

    혈색은 조금 창백해 보였지만 병약한 느낌은 아니었다.

    나이는 마흔을 막 넘은 것 같았지만 무인의 나이를 짐작하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게다가 병을 앓았다는 것 때문에 더욱 헷갈렸다.

    북리의천은 아끼던 질녀의 옆에 서 있는 조그만 아이를 보았다.

    당연히 질녀에게 더 시선이 갈 거라고 생각했고 질녀가 더 반가울 줄 알았는데 오히려 시선은 자꾸만 옆에 있는 조그만 아이에게로 향했다.

    멍하니 그 아이를 보다가 질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질녀를 보며 많이 배우고 돌아왔느냐고 물었지만 강력한 자력에 이끌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의 시선은 금방 다시 아이에게 머물렀다.

    아이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헤벌쭉하게 웃고 있었다.

    아이 특유의 천진한 웃음이 귀여워서 마음이 편해지는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걸로 치자면 그 아이보다 더 어리고 귀여운 아이도 많이 봐 왔었다.

    그런데 그 아이에게는 희한한 힘이 느껴졌다.

    “너는 누구지?”

    북리의천이 묻자 북리소은이 소개했다.

    “백부님. 이 아이는 제가 앞으로 머물면서 의술을 배우게 될 산본의가의 가주님 아들이에요.”

    북리소은은 더 하려고 준비해둔 말이 있었지만 그 말은 하지 않았다.

    아이가 백부님에게 무술을 배우고 싶어 한다거나 옆에 머물고 싶어 한다거나 하는 말을 굳이 자기 입으로 하지 않아도 두 사람 사이에 서로 이상한 끌림이 느껴져서 그냥 가만히 있어도 백부가 스스로 그 말을 할 것 같았던 것이다.

    “그래. 그렇구나. 오래 있다가 갈 것 같지는 않은데. 언제 돌아가지?”

    북리의천이 북리소은을 잠깐 바라보며 물었다.

    “저는 금방 돌아가지 않아도 돼요.”

    아진이 해맑게 말했다.

    “저는 산본의가의 서도진이라고 합니다. 무영검 대협을 뵙게 돼서 정말 기쁩니다.”

    아이는 감격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또랑또랑하게 말했다.

    무림에서 12명의 가장 뛰어난 고수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그였다.

    강호에 발을 담근 자는 누구든 그를 보고 싶어 열망했다.

    그런 그에게 이런 모습은 신기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아이는 조금 특별했다.

    북리의천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없이, 오로지 자신이 오래 찾던 누군가를 마침내 발견했다는 사실로 인한 충만한 만족감을 느끼는 것처럼 그 감격을 주체하지 못해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아이가 말을 하지 않아도 북리의천은 느꼈을 것이다.

    자기를 보게 돼서 아이가 정말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그래. 그렇게 말해 주니 나도 고맙구나. 나는 대단한 사람도 아닌데 그렇게 말을 해 줘서 고맙다. 정말 귀엽게 생겼구나. 이리 와 보련?”

    그러면서 북리의천이 앉아 아진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북리소은은 그 모습을 보고 희한하다고 생각했다.

    백부는 자기에게도 그런 적이 거의 없었다.

    병자의 기운이 퍼질지도 모른다고 걱정을 하면서 그는 참 고집스럽게도 애정 표현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어린아이를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꼭 어린아이만 좋아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따지고 보면 그는 좋아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았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오직 자신의 앞을 바라보면서 수련에 수련을 거듭했다.

    다른 사람은 조금 쉬어 가고 게으름을 부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도 그는 그러지 않았다.

    세 동이의 물을 가진 사람이 한 모금의 물을 마시는 것과 한 바가지의 물을 가진 사람이 한 모금의 물을 마시는 것은 같을 수가 없는 게 아니냐면서 그는 늘 자신을 학대하는 것처럼 끝없이 달려왔다.

    그런 백부가 아진의 앞에서 온전히 마음을 열고 있다는 것을 북리소은은 느끼고 있었다.

    아니.

    열고 있다는 것도 맞는 말은 아닐 것이다.

    열리고 있다고 해야 할 터다.

    아진은 다다다닷 북리의천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와락 목을 끌어안았다.

    그건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렇게 어려운 사람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아이가 있을 거라고는 감히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사리 분별을 못 하는 아주 어린아이라면 혹시 몰라도 아진은 그 정도로 어리지는 않았던 것이다.

    북리의천은 아진이 적당히 가까운 곳에서 멈출 줄 알았다가 우다다다 달려와 계속 가까워지는 바람에 눈이 동그래진 채 자기도 모르게 팔을 더욱 활짝 펴고 자기 몸으로 들어오는 아진을 안았다.

    마치 강에서 커다란 물고기가 튀어나와 멋대로 품에 안겨 저도 모르게 그걸 안고 나뒹구는 것 같은 형국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청량하고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습한 곳에서 쉬지 못하고 꼬박 사흘을 싸우다가 폭포 속으로 들어가 몸의 열기를 식히는 것처럼 개운하고 행복했다.

    이제 살 것 같은 느낌.

    ‘그래. 정말 그런 느낌이네.’

    살 것 같다.

    살 것 같다.

    그 생각을 하면서 북리의천은 희한하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드는 걸까 했다.

    그런데 그게 그의 진심이었다.

    남들은 그 말을 그런 식으로 쓰지 않을 텐데 병을 가지고 살아온 북리의천에게는 그 말이 남달랐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에게는 그동안 쓸 일이 없는 말이었던 것이다.

    늘 죽음이 자신의 옆에 바짝 서서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기에 별 탈 없이 하루가 지나가면 그 하루를 번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 그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거대한 생명의 기운이 제 품으로 와락 뛰어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안긴 것이 의가의 아이가 아니라 거대한 생명력 같다고 생각하면서 북리의천은 아이를 꼭 안았다.

    놓치면 안 될 것 같고 놔주고 싶지 않았다.

    아이가 놀라면 안 되겠지만 아이가 싫어하면서 버둥거리지만 않는다면 조금 더 그 생명력을 느끼고 싶었다.

    그런데 아이는 조금도 불편해하지 않고 계속 북리의천을 안고 있었다.

    ‘언젠가 이런 비슷한 기분을 느꼈던 것 같기도 한데.’

    북리의천은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북리세가의 가주가 된 동생이 어디서 귀한 영약을 구해다 주었을 때, 가문의 장로가 진기도인을 해 주며 영약의 복용을 도와주었는데 그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는 자신의 혈도를 타고 시원하고 청량한 기분이 퍼져 나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현실적이고 상당히 비관적인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그가 꿀 수 있는 가장 좋은 꿈을 압축해서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엄청난 고양감.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고 새로 태어난 것 같은 기분.

    그러면서도 이건 전부 다 꿈일 거라는 슬픈 마음도 들었지만 꿈에서라도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두 사람은 그 시간이 꼬박 이각이나 계속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북리의천은 저도 모르게 울고 있었다.

    북리소은은 백부가 흘리는 눈물을 보고 놀라서 혼자 입을 가렸다.

    북리의천의 눈에서 탁하고 짙은 먹빛의 농 같은 눈물이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 빛깔만 아니었다면 피를 흘리고 있는 게 아닌가 했을 것이다.

    북리소은은 백부에게 다가가 그것을 닦아주어야 하나 고민을 했지만 왠지 지금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면 안 될 것 같았다.

    북리소은 자신은 무공을 익히지 않았지만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러 무아지경에 빠지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종종 들었다.

    그리고 지금 백부가 그것을 경험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눈에서 흐르는 것의 먹빛은 점점 더 짙어졌다.

    수십 권의 의서를 독파한 북리소은이었지만 그런 일에 대해서는 그동안 읽어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기사(奇事)다.’

    괴질이라는 것이 그랬다.

    원인을 알지 못하는 병의 통칭.

    북리소은은 백부의 눈에서 나오는 것이 그동안 그의 몸을 갉아 먹고 있던 탁기는 아니었을까 하면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만약을 대비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세가의 의원들을 불러 대기를 시켜놓으려고 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움직임이 두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시간을 들여 조심스럽게 발을 떼서 그곳을 떠났다.

    의원들과 함께 돌아왔을 때도 두 사람이 보이는 곳에서 대기만 하고 있었다.

    아진은 북리소은이 조용히 사라졌다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돌아오는 것을 전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북리소은 때문에 자신의 치료가 방해를 받을까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북리소은이 다른 사람들을 통제해 주고 지켜만 봐서 마나로 치료를 계속해 나갈 수가 있었다.

    마나가 광풍처럼 밀려가 북리의천의 기혈에 맺힌 것을 거칠게 깎아나갔을 때 아진은 혈맥까지 같이 상하는 것을 느끼고 그것을 회복시키는 힘을 다시 불어넣어 주었다.

    상반된 두 힘을 계속 밀어 넣어 세심하게 고쳐야 해서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했고 마나의 소진은 지금껏 그가 경험했던 최고치를 훨씬 뛰어넘었다.

    그러나 지금이 아니면 다시 이런 기회를 만들기도 쉽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계속해서 치료를 해 나갔다.

    북리의천이야말로 정말 황당한 상황에서도 아진이 하는 대로 놔두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내공이 이리저리 떠밀리는 것을 경험했다.

    분명히 아진에게서 내공과 다른 이질적인 기운이 들어오고 있었는데 그것은 북리의천의 머리로 도무지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내공을 삼갑자 이상 가진 내공 고수라고 하더라도 이런 일이 가능할까 하겠는데 이 아이는 이제 겨우 다섯 살 정도밖에 돼 보이지 않는 어린아이가 아닌가.

    그러나 자신이 직접 느끼고 있었기에 불신이나 의혹은 오래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몸의 불편한 기운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힘겹던 호흡이 편안해지고 모든 활동이 정상적으로, 아니 정상보다 더 나은 수준으로 돌아온 듯했다.

    북리의천은 눈을 뜨고 아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진의 이마며 얼굴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것을 보았다.

    ‘신의로구나. 이 아이야말로 신의로구나. 하늘이 나에게 신의를 보내 주었구나.’

    북리의천은 숨소리도 내지 못하며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아진이 눈을 떴다.

    아진이 말을 하기 전에 북리의천은 자신의 몸이 완전히 나았다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런 상태였던 적이 없었는데 몸이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다.

    아진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북리의천의 눈에서 흐른 검은 눈물 때문에 조금 놀랐지만 그게 뭔지 알 것 같아서 혼자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의 몸으로 깨어난 게 상당히 유용하네. 그게 아니었으면 이렇게 오래 끌어안고 있는 것 자체가 이상했을 텐데.’

    서종욱을 고친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환부가 협소해서 두 손으로 감싼 채 마나를 밀어 넣으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북리의천은 괴질이 워낙 광범위하게 혈맥마다 퍼져있어서 이렇게 하지 않고는 마나를 고루 불어넣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아진아. 네가 나를 낫게 해 준 것 같구나. 맞지?”

    “네. 그런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저를 제자로 받아들이시고 무공을 가르쳐 주세요.”

    “무공?”

    북리의천은 아진이 귀여워서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무공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어 주고 싶었다.

    태어나서 이런 기분을 느껴본 것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래. 그러자. 그렇게 하자.”

    “와. 정말요?”

    “그럼. 내가 너에게 뭘 아끼겠느냐. 아무것도 아깝지 않다. 그런데 네가 몇 살이지?”

    “다섯 살요. 스승님.”

    마침 아진의 나이도 적당했다.

    대뜸 스승님이라고 말한 아진이, 스승에 대한 예를 올린다고 법석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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