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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18화 (18/470)
  • 제18화

    18화

    “아진아. 누님이랑 같이 타고 가자. 누님은 아진이가 너무 귀여운데. 누님은 아진이랑 오래 같이 있지도 못하잖아. 아진이는 북리세가에 머물러야 하고 누님은 산본의가로 돌아가야 하니까.”

    어느덧 북리소은도 아진이 백부의 제자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지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말을 하고 있었다.

    나중에는 북리소은의 부탁대로 북리소은의 말을 같이 타고 가면서 혈 자리를 알려 주기도 했다.

    천이재와 타고 갈 때는 천이재의 앞에 탔지만 북리소은과 탈 때는 그녀의 뒤에 타서 혈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미리 알려주면 산본의가에 돌아갔을 때 아버지에게도 도움이 될 테고 북리소은 자신도 미리 알아두어야 당황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제선문에서는 의생들에게 시침을 맡기지 않거든. 의서를 보고 외우기는 했는데 사람 몸에서 직접 찾으라고 하면 아직은 자신이 없어.”

    “맞아요. 그림만 보고 외우기에는 한계가 있어요. 그림은 인체의 비율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거든요. 그래도 어렵지는 않아요. 자신감을 갖는 게 중요하고요. 여러 번 알려 드릴 테니까 기억해 보세요. 여기가 뇌호, 풍부, 아문이고 이렇게 내려와서 여기가 대추, 도도, 신주, 신도.”

    그리고 현주를 지나 명문까지 알려주고 그 아래로는 손을 대는 게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아 거기까지만 반복해서 알려주었다.

    “한 번에 찾으려면 바로 기억이 나지 않을 거예요. 기준 되는 곳을 정하고 그 주변의 것들을 찾아내는 식으로 하세요. 자주 쓰이는 곳은 확실하게 익혀 두고 있다가 바로 대답을 하면 잘 아는 것처럼 보여요.”

    “정말 그렇겠구나.”

    북리소은은 유쾌하게 웃었다.

    혈 자리를 짚어 주고 명칭을 알려준 후에 그 혈이 관장하는 곳을 설명해 주자 북리소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데 너는 그걸 어떻게 다 아는 거야. 아진아? 이제 겨우 다섯 살이라면서.”

    “아…… 저희 집안은 원래 머리가 다 좋은 것 같아요.”

    아진의 말에 천이재도 신기해하며 웃어댔다.

    “누님. 제가 의가에 돌아가면 누님은 계속 저랑 비교될 거니까 어떻게든 저를 북리세가에 떨궈놓고 갈 궁리를 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의가 분들이 모두 좋아서 사람을 놀리거나 하지는 않지만 자꾸 비교되면 누님 스스로 부끄러워질 수는 있잖아요.”

    아진이 조곤조곤 설명하자 북리소은이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듯이 폭소를 터뜨렸다.

    “처음에는 어린 네가 철없이 고집을 부리는 건 줄 알았는데 이제는 아진이 너에게 기대가 돼. 네가 백부님 옆에 있어 드린다면 백부님이 웃는 일도 생기겠구나 하는 생각에.”

    아진은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치유력을 오랜만에 제대로 써 보겠다는 생각에 들뜨기도 했다.

    빨리 북리세가에 도착하기만을 바라는 것은 세 사람의 마음이 모두 똑같았다.

    * * *

    성문을 지나면서 아진은 자기가 누구와 함께 가고 있는 건지 제대로 깨달았다.

    수많은 사람이 성으로 들어가기 위해 길게 줄을 선 채 약간은 긴장한 모습으로 관원들 앞을 지나가는데 북리소은이 북리세가주의 딸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관원들의 표정이 일시에 변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전부터 혹시나 하는 듯이 북리소은을 힐끔거리다가 명패로 확인을 하고 그때부터 굽신거렸다.

    “소저께서 돌아오셔서 가주님이 기쁘시겠습니다. 그런데 마차는 어디에 있는지…….”

    그들은 북리세가의 소저가 마차와 수행원도 없이 호위 무사 한 사람과 어린아이만을 대동하고 온 것이 이상했던 모양이었다.

    “그럴 일이 있었습니다. 괜찮다면 지나가겠습니다.”

    “아. 예. 그럼요. 어서 가십시오.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일행이 지나가자 관원들의 표정은 다시 변했다.

    아진은 그 모습을 보면서 그게 북리세가의 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부터는 마음을 놔도 된다. 아진아. 여기부터는 북리세가가 주인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말이다. 앞으로 여기를 누비게 될 테니까 주의 깊게 봐 두어라.”

    천이재는 이제 아진이 그곳에서 머물게 될 거라고 확신하는 것처럼 말했다.

    북리소은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아진을 보고 웃어 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별생각이 없던 아진은 그때부터 갑자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이제야말로 무공을 배우는 거다. 진짜 무공. 진짜 무림에 발을 들인 거야.’

    뒤늦게 그 생각이 들었다.

    북리세가라는 무가에 와서야 비로소 무림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말을 타고 가는 동안 북리소은을 알아본 북리세가 무인들이 순찰을 돌다가 깜짝 놀라며 달려와 부복을 했다.

    세가주의 직계가 갖는 위엄은 대단했다.

    천이재도 북리세가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결코 낮지 않아 사람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가 가볍지 않았다.

    그런 두 사람이 아진을 아끼고 자랑하자 아진은 이내 북리세가 최고의 인기남으로 등극해 버렸다.

    북리소은이 돌아왔다는 소문은 금세 퍼졌고 북리세가의 정문을 지날 때는 위사들이 이미 소식을 알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라면 성문을 지키는 관원들보다도 더 서릿발 같은 얼굴을 하고 엄중하게 문을 지켰을 사람들이 북리소은을 보고 반가움과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

    “아가씨. 대체 얼마 만입니까. 오신다는 소식도 없이 갑자기 어떻게 된 일입니까? 혹시 어디가 편찮으신 것은 아니시지요?”

    그러는 동안 안에서 북리세가주와 장로들까지 우르르 달려 나왔다.

    “은아야. 우리 은아가 왔다는 것이 정말이냐.”

    아진은 은아라는 말을 듣고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북리소은도 이곳에서는 마냥 사랑스러운 어린 딸일 뿐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버님. 어머님. 장로님들. 그동안 무탈하셨는지요?”

    북리소은은 환한 얼굴로 그들에게 인사를 했다.

    천이재도 마찬가지였다.

    아진은 그 모습을 보면서 괜히 흐뭇했다.

    이곳에 오기 전 서도진이 가족을 포기해 버려서 그런지 그런 모습을 보면 울컥하고 감격스러웠다.

    가족과 재회한 것은 북리소은인데 괜히 아진이 울고 있었더니 북리세가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진을 바라보았다.

    “저는 산본의가의 둘째인 서도진이라고 합니다. 여러 어른께 인사드립니다.”

    산본의가라는 말에 의혹을 보이는 이들이 생겼다.

    “산본의가라고 했느냐. 산본의가라면…… 제선문과는 척을 진 곳이 아니냐. 그런데 어떻게 산본의가의 아이와 함께 온 것이냐.”

    질문은 끝도 없이 이어졌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가모가 겨우 수습에 나섰다.

    “이럴 게 아닙니다. 먼 길 오느라 피곤할 텐데 모두 들어가도록 하지요.”

    아진은 모두의 시선이 자기에게 향한 것을 보며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자신은 여기에 스승님을 찾으러 온 것이지 다른 사람들에게 귀여움을 받으려고 온 것도 아니고 어차피 의문은 북리소은이 풀어 주면 될 일이었다.

    “누님.”

    아진이 북리소은의 옷자락을 잡고 흔들자 그녀가 아진을 바라보다가 아아 하고 작게 소리를 냈다.

    “아버지. 아진은 앞으로 제가 의술을 배우고 싶어 하는 산본의가 가주님의 아들인데 백부님을 뵙고 싶어 해요. 지금 백부님은 어디에 계신가요?”

    북리소은이 말하자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얼굴이 의아하다는 듯이 변했다.

    “백부님이 어떠신 것을 네가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런 말을 하는구나.”

    북리소은의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무영검이 괴질 때문에 강호를 떠났다는 소문이 났다고는 해도 그것은 공식적으로 공표된 사실이 아니었다.

    그것을 가주의 딸인 북리소은이 외부에서 밝혔다는 것은 상당히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북리세가가 지금 이 정도의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데에는 무영검의 이름값이 컸던 것인데 그가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이 알려진다면 그것은 세가 전체에 상당히 안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미 난 소문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북리소은이 공공연히 밝히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 가주를 비롯한 여러 장로가 질책하려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천이재가 나섰다.

    “아진은 산본에서 신동으로 자자합니다. 그리고 산본의가의 가주님은 산본에서 신의라고 불리는 분입니다. 다 죽어 가던 사람들이 산본의가에서 치료를 받고 완쾌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일은 아주 흔합니다. 그래서 아가씨가 장로님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아진을 데려온 것입니다. 가주님.”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천 대주. 설마하니 이 아이가 형님의 병을 고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동안 제선문과 천응문의 문주와 장로들이 은밀히 형님을 진료했지만 그들도 방법을 찾지 못했네. 그런데 고작 예닐곱 살 정도나 돼 보이는 이 아이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그런 말을 한다는 건가.”

    가주는 적잖이 노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리소은도 거기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아버지. 아진을 위해서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라도 아진이 백부님을 뵐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저는 앞으로 산본의가에서 신세를 져야 해요. 이 정도는 어렵지 않잖아요. 그리고 아진은 착하고 현명해요. 같이 있으면 즐겁고요. 의술을 행하지 못한다고 해도 옆에 있으면 백부님의 말벗이 될 수도 있을 거예요.”

    “은아야. 네가 그리 경솔한 아이가 아니었거늘 이게 다 무슨 말이냐.”

    가주는 그 말에 진심으로 놀랐고 한편으로는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북리소은도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지금까지 아버지를 실망시켜 드린 적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백부님을 위해서 세상이 천시하는 의술을 배우겠다고 나선 저예요. 그러면 백부님을 걱정하고 존경하는 제 마음이 어떻다는 건 아버지도 아시잖아요. 제 진심을 아신다면 허락해 주세요.”

    가주는 뭔가 더 말을 하려고 했지만 가모가 그의 손등에 손을 얹었다.

    “상공. 은아가 이렇게까지 말을 하는데 허락해 주시지요. 은아가 언제 생각 없이 말을 하는 아이이던가요.”

    북리소은이 평소에 세가 내에서 해 온 행실 덕분에 아진의 일이 잘 풀렸다.

    가주는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이었지만 별수 없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이 너를 어려서부터 친딸처럼 아끼셨으니 네가 돌아온 것을 알면 기뻐하실 거다. 네가 아이를 데리고 가서 인사를 드리고 오너라.”

    “감사해요. 아버지.”

    북리소은이 말하고 아진을 바라보자 아진이 가주의 앞에서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어려운 부탁을 드려서 송구하고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진은 자기를 믿어 달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참았다.

    어차피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가 알게 될 텐데 조급하게 생각할 것이 없었다.

    * * *

    하얀 비단 장포를 입은 남자가 후원에서 햇볕을 쬐며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기척을 느꼈을 텐데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앞쪽에서 나비 한 쌍이 장난을 치는 것처럼 나는 것이 보였는데 그 모습을 놓치고 싶지 않아 돌아서지 않는 듯했다.

    아진은 제 스승을 보고 감격스러워서 웃음을 지었다.

    “백부님. 은아예요. 돌아왔어요.”

    그러자 그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그래. 은아야. 조금만 기다려 주련? 나비가 노니는 것을 언제까지 볼 수 있을지 몰라서 지금은 저 모습을 놓치고 싶지 않구나.”

    그 말이 가슴을 저미는 것 같았는지 북리소은의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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