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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16화 (16/470)
  • 제16화

    16화

    회주는 오지 않았다.

    대신 처음에 같이 왔던 하인이 왔다.

    완치가 돼서 의방을 떠난다는 혈판장을 남기고 그들이 떠났을 때 서종욱은 혹을 떼어낸 것처럼 안도했다.

    “저 사람들은 다시는 여기로 안 오면 좋겠어요.”

    하명준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아진만을 제외하고.

    * * *

    천령상회의 회주는 혼자서 기루를 찾았다.

    아들이 다 나아서 돌아왔는데 분을 삭일 방법이 없었다.

    “멍청한 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 그럴 거면 애초에 시작을 하지 말 것이지. 도대체 뭘 한 거냐는 말이야!”

    기녀들은 그날, 회주의 마음을 다독일 방법이 없어서 애를 먹었다.

    회주는 술에 거나하게 취한 채로 집으로 향했다.

    마차가 잠시 멈춰서 무슨 일인가 하고 내다보자 그림자 하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기억하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마차 안에서 들려오는 비명에 마부가 내려 마차 안을 보았을 때 그곳에는 온몸이 기이하게 꺾이고 뒤틀린 회주가 쓰러져 있었다.

    마부는 떨리는 가슴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산본의가로 마차를 몰았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문을 열어 줄 사람이 있을까 했지만 그런 걱정을 한 게 무색하게 아이 하나가 문 앞에 서 있었다.

    마부도 몇 번 본 적이 있는 의가의 아이였다.

    “회주님이…… 회주님이 다치셨다. 웬 자객에게……! 당장 의원님을 불러오너라.”

    아진은 문 앞에 선 채로 심드렁하게 말했다.

    “쓰던 약재가 떨어져서 치료비가 비쌉니다. 그냥 다른 곳으로 가시지요.”

    “천령상회의 회주님이다. 네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천령상회의 회주라면 치료비로 황금 두 관을 낼 수 있답니까? 그렇다고 하면 문을 열어 주겠습니다만 그게 아니면 여기에서 시간 낭비하지 말고 다른 의원을 찾아가세요.”

    “회주님…….”

    그것은 아무리 마부라고 해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마부는 정신을 잃어 가는 회주를 흔들어 아진의 말을 전했다.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회주는 그러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고 아진은 한창 재미를 붙인 혈판장을 내밀었다.

    “너무 아깝게만 생각하지는 마세요. 회주님. 이렇게 해 봐야 회주님이 해먹은 돈이랑 고리대금업자한테 갖다 준 이자를 빼고 나면 얼마 남지도 않아요. 딱 황금 한 관 남네요. 이렇게 들으니까 그동안 얼마나 해 먹었는지 실감이 좀 나죠?”

    금자 한 냥이 은자 이십 냥. 황금 한 관이 금자 백 냥이었다.

    회주는 잠시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만으로도 죽을 것 같았고 눈물을 쏟아 내며 손을 뻗었다.

    “전부 주마. 전부 줄 테니 제발 나를 여기에서 건져다오. 제발 나를 살려달란 말이다……!”

    울부짖는 회주를 보다 아진이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에 의생들이 나와 회주를 데리고 들어갔고 회주는 의방으로 옮겨졌다.

    어긋난 뼈를 맞추고 시침을 해서 통증을 완화시켜 주고 응급조치를 마친 서종욱은 아진이 내민 혈판장을 보고 숨을 급히 들이쉬었다.

    며칠 전의 그였다면 서종욱은 이게 뭐냐면서 소리를 높였을지도 모르지만 이제 그는 그러지 않았다.

    처음에 그 일을 당했을 때 자기가 바로잡았다면 그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나지는 않았을 거라는 것을 깨달은 탓이었다.

    서종욱은 적의 앞에서 자신의 몸을 부풀리는 법을 어린 아들에게서 배우고 있었다.

    자기가 더 이상 호락호락한 먹잇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고 으르렁거리고 헛발질이라도 해 봐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돈 받은 값은 해야겠구나. 뼈를 맞추는 건 아비 전문이다. 이제부터는 내가 하마.”

    서종욱의 말에 아진이 웃었다.

    회주가 산본의가의 의방에 실려 간 다음 날, 한 고리대금업자가 산본의가를 상대로 의료사고 하나를 기획했다가 조용히 덮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산본의가가 더 이상 예전의 그 만만한 호구가 아니라는 소문이 어둠의 조직들 사이에서 부지런히 전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 * *

    아진이 그곳에 온 지도 여러 달이 지나고 있었다.

    의가의 하루는 단조로웠지만 지루하다고 느낄 틈이 없었다.

    배워야 할 것은 끝도 없었고 아진과 도종은 웬만한 의원들보다 더 숙달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산본의가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환자들과 함께 들어왔지만 그들 세 사람에게서는 이질적인 분위기가 짙게 풍겼다.

    무언가 따로 볼 일이 있는 것처럼 주위를 살피는 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왔던 것이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의생 허우천이 묻자 그중 유달리 피부가 곱고 뽀얀 사람이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가주님을 뵐 수 있었으면 합니다. 자세한 말씀은 가주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목소리도 그렇고, 체구가 작고 선이 가는 것이 분명 여자였는데 남장을 하고 있었다.

    나이는 아홉 살 정도로 보였는데 함께 온 어른들을 두고 그 아이가 대표로 말했다.

    허우천이 서종욱을 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가주요. 무슨 일인지 말해 보시오.”

    그러자 세 사람이 한달음에 달려와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초면에 송구한 부탁입니다만 잠시 조용한 곳으로 가서 말씀을 드릴 수 있었으면 합니다.”

    서종욱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들을 집무실로 데려갔다.

    다른 사람들은 감히 따라올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도종과 아진은 자기들이 가주와 불가분의 관계라고 호소라도 하듯 그들을 따라왔다.

    “저는 천소은이라고 합니다. 제선문 산본지부에서 의생으로 일했으며 곧 의원이 될 터인데 일단 의원이 되고 나서는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할 것 같아 먼저 몸을 뺐습니다. 저희는 산본의가의 명성을 익히 들어왔고 특히 신의님의 놀라운 의술을 흠모해 왔습니다. 해서 가주님께 저희를 받아주시기를 간청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

    서종욱은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한 채 그들을 바라보았다.

    쉽지 않은 문제였다.

    그렇지 않아도 제선문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제선문의 의생이 여기에서 가르침을 받겠다고 오다니.

    그것은 제선문 입장에서 배신행위와 다름이 없었고 산본의가가 제선문보다 낫다고 공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한편으로는, 갑자기 나타난 세 사람을 호락호락 믿어도 되는 것인지 그것 역시 애매했다.

    제선문이 간자를 보내 다시 한번 산본의가를 흔들어대려 하는 것일 수도 있었던 것이다.

    아진은 혼자서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특히나 천소은이라는 자는 어설프게 남장을 하고 있었지만 누가 보더라도 상당히 수준 높은 미모를 가진 소녀였다.

    ‘어쩌면 본가의 의술을 훔쳐가려고 하는 걸 수도 있고.’

    아진이 혼자 여러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천소은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남장을 한 것은 감히 가주님을 속이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에 오는 동안 혹시라도 제선문에서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있을까 해서 그런 것입니다. 산본의가와 제선문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갑자기 와서 이런 말씀을 드릴 때 의심이 들 거라는 것도 잘 이해합니다.”

    천소은은 현명한 사람이었다.

    이미 다 들켜놓고 끝까지 아닌 것처럼 우기기보다는, 인정할 건 그냥 인정하자고 생각하는 듯했던 것이다.

    “사실 저는 북리세가의 장녀입니다. 그리고 이 두 분은 세가에서부터 함께 오신 분들로 제 호위들입니다. 제선문에서 3년이 넘게 있었지만 제선문에서도 제 신분을 알지 못합니다. 저에 대해 확인하고 싶으시다면 북리세가의 직계만 가질 수 있는 명패를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

    아진은 두말할 것도 없이 다가가 북리소은의 손을 꼭 잡았다.

    “누님!”

    ‘찾았다. 나를 내 무공 스승님에게 데려다주실 분.’

    북리소은은 갑자기 조그만 아이가 와서 자기를 누님이라고 부르자 무슨 일인가 하며 아진을 바라보았다.

    “아진아. 소저를 난처하게 하지 말거라.”

    서종욱이 말하자 북리소은이 혹시나 하며 아진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서종욱이 어색한 말투로 말했다.

    “내 아들이오. 여기 이 녀석이 장남이고 그 아이가 둘째라오. 그런데 천소은이라는 이름은.”

    “예. 가주님. 실은 북리소은입니다. 북리소은이라는 이름을 쓰면 바로 의심을 사게 될 것 같아 천소은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북리세가라면 혹시 북리의천 대협이 계신 그 가문인지……. 무림 십이성에 든 무영검 북리의천 대협에 대해서는 나도 들은 이야기가 있소.”

    “예. 가주님. 그분은 제 백부님이십니다. 그분이 가주가 되셨어야 하나 지병으로 인해 제 부친께서 가주가 되셨지요. 백부님은 괴질을 앓고 계시는데 영약과 의지로 지금까지 버텨오셨습니다. 살아계신 동안 가문을 중원 제일의 무가로 일구겠다고 하시며 부단히 수련을 하신 결과 지금의 북리세가를 만든 분이기도 합니다.”

    “소저가 의술을 배우기로 한 이유도 백부님의 병을 고치고 싶어서였나 보구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백부님을 잃을 수는 없었습니다. 실력이 미천하여 아직 이룬 것이 없지만 그래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 결례인 것을 알면서도 가주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면 두 분도 무인이신 거지요?”

    아진의 관심이 북리소은의 옆에 서 있던 이들에게 향하자 그들이 북리소은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거기까지 말을 했는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감출 것도 없었다.

    “그래. 그렇단다.”

    그러자 아진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러면 저는 이제 걱정 없이 제 길을 가도 되겠어요.”

    “음…… 아진아. 이 아비가 뭔가 놓친 게 있는 것 같구나. 아버지는 아진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만.”

    서종욱이 난처한 듯이 묻자 아진이 그를 보고 활짝 웃었다.

    “아버지. 저에게 무술 스승님을 붙여 주고 싶어 하셨잖아요? 소은 누님이 제 얘기를 잘 해 주시면 소은 누님의 백부님이 저를 제자로 받아주실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저는 늘 아버지, 어머니와 본가 분들이 걱정돼서 본가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소은 누님의 호위분들이 와 계시니 이제 그 걱정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고요. 아버지가 소은 누님을 잘 가르쳐 주시면 저도 부담 없이 저희 스승님께 무술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아요.”

    “…….”

    서종욱은 민망해서 얼굴이 확 달아올랐는데 북리소은은 재미있다는 듯이 아진의 앞에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이름이 뭐니?”

    “저요? 서도진요. 본가에서는 모두 저를 아진이라고 불러요.”

    “그렇구나. 그럼 나도 아진이라고 불러도 될까?”

    “네. 스승님의 질녀시니까 그러셔도 돼요.”

    벌써 제자가 된 것처럼 하는 말에 북리소은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아진아. 내 백부님에 대해서 좋게 생각해 준 건 정말 고맙구나. 그런데 아까도 말했지만 내 백부님은 괴질에 걸리셨단다. 계속 몸이 약하셨는데 병에 지지 않겠다고 하시면서 믿기지 않는 의지로 지금껏 버티셨지. 지금은 물러나서 쉬고 계시는데 거동도 쉽지 않을 정도로 많이 편찮으시단다. 이건 우리 집안 사람 중에도 몇 명만 아는 얘기야.”

    “누님. 그러면 저 같은 아이를 옆에 두고 보살핌을 받으시면 좋지 않을까요? 저도 의생이거든요. 처방전을 볼 줄도 알고 약초도 잘 알고 위급할 때 시침도 해요.”

    제발 부탁을 들어달라는 듯이 아진이 두 손을 꼼지락거리며 불쌍하게 바라보자 북리소은이 두 호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호위들은 아무래도 어렵지 않겠냐는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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