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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14화 (14/470)

제14화

14화

“그동안 부족한 사람을 믿고 따라 주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몇 번의 위기가 있었지만 지금까지 잘 이겨냈고 앞으로도 더 잘해 낼 거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힘내 주기를 부탁합니다. 고맙습니다.”

아진은 그 모습을 보면서 몇 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천령상회에 배상을 하느라고 돈을 빌렸다가 그 돈을 일시에 갚아버렸다.

그러면 매달 따박따박 이자를 챙기던 고리대금업자의 기분이 상당히 안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도종에게 물어 보니 돈을 빌려준 곳이 혈천방은 아니라고 했다.

매달 나가는 이자만 은자 스무 냥이 넘었다고 했는데 그 돈줄이 끊어졌으면 애가 타는 것은 당연지사.

그들에게는 원금을 회수하는 것보다 빚을 지우고 이자를 벌어먹는 게 훨씬 더 돈이 될 테니 앞으로 함정을 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천령상회에서 배상금을 뜯어내는 걸 봐 왔다면 그들이 직접 나서서 의료사고를 만들고 돈을 뜯어내려 할 수도 있었다.

‘앞으로 확실하게 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겠는데? 본가 사람들은 치료는 잘 하지만 힘은 없고 싸우지도 못하잖아. 나쁜 놈들이 와서 시비를 걸고 집기를 부수면서 강압을 하면 또 돈을 뜯길 것 같고.’

그 뒤에 제선문이 버티고 있을 거라는 확신은 아직 없지만 그럴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었다.

아진은 술잔을 부딪치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어디에서 자기랑 똑같은 사람들만 모아 뒀을까.

마냥 착하기만 한 사람들을 보면서 아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물을 술처럼 마셨다.

아무런 근심도 없이 웃는 사람들을 보면서 앞이 까마득했는데 웬일인지 웃음이 났다.

신나게 달려볼 생각으로 아진의 가슴이 기분 좋게 뛰기 시작했다.

* * *

“와. 진짜 왔네? 낯짝도 두껍다.”

대기하고 있는 환자들을 보다가 도종이 말했고 아진은 그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돌렸다.

류수영이었다.

그의 다리에는 어제만 해도 볼 수 없던 부목이 대어져 있었고 옆에는 하인이 서 있었다.

“아진아. 내가 어제 한 말 안 잊었지? 아버지가 저 사람 치료하시려고 하면 안 된다고 해. 알았지? 꼭이다. 나도 말씀드릴 거지만 너도 같이 말씀드리는 게 좋을 거야.”

아진은 도종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도종은 설마 아진이 지금 당장 그 말을 하려고 하는 건가 하면서 깜짝 놀랐다.

그건 예상에 없던 일이어서였다.

그러나 아진의 말은 도종이 생각한 것과 전혀 달랐다.

“아버지. 기다리는 사람이 많으니까 제가 먼저 문진(問診)을 하고 그걸 기록해서 가져다드리면 어떨까요? 그러면 환자를 보시기 전에 미리 준비를 하실 수가 있잖아요.”

“그것도 좋겠구나. 그래. 그럼 부탁하마. 아진아.”

서종욱은 아진이 기특하다는 듯이 말했고 아진은 기록지를 들고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갔다.

도종은 아진이 뭘 하려고 하는 건지 모른 채 고개만 갸웃거렸다.

“어디가 아파서 오셨어요?”

아진은 순서에 맞춰서 환자들에게 간단히 문진을 했다.

“언제부터 그러셨어요? 혹시 집에서 다른 조치를 취하셨어요?”

사람들은 아진이 어리다고 무시하지 않았다.

산본의가의 두 공자가 신동이라는 소문이 이미 자자해서였다.

사람들은 아진의 질문에 자세하게 답을 했고 아진은 그것들을 기록해서 의녀들에게 가져다주었다.

의녀들은 그때까지 그런 식으로 일을 한 적이 없었지만 의원이나 의생이 물어야 할 것을 미리 물어서 기록해 두자 확실히 시간이 단축됐고 바로 치료를 시작할 수가 있어서 편했다.

아진은 드디어 류수영의 앞에 섰다.

“어디가 아프세요?”

“보면 모르느냐?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다리를 다쳤으니 부목을 한 게 아니냐.”

“부목을 잘못 하면 오히려 뼈가 어긋나기도 합니다. 부목은 먼저 풀도록 하겠습니다.”

“네가 뭔데 그러느냐! 나는 의원에게 치료를 받을 것이다.”

“예. 의원님께 치료를 받으시게 될 겁니다. 그런데 그 전에 제가 문진을 먼저 할 테니 정확히 대답해 주세요.”

“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왜 이런다는 말이냐!”

류수영은 짜증스럽게 말했지만 아진은 신경 쓰지 않고 부목을 풀었다.

가만 보니 정말 뼈가 부러져 있었다.

말만 해서는 의원의 눈을 속일 수 없다고 생각해서 실제로 뼈를 부러뜨린 것 같은데 마음이 약해서 그랬는지 너무 아파서 그랬는지 살짝 금이 가는 정도로만 해 놓은 상태였다.

“여기입니까?”

아진은 정강이뼈를 가만히 만졌다.

“아아악! 만지지 말거라!!”

류수영의 하인은 그가 연기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사실과 달랐다.

실금이 갔던 뼈가 아진의 손가락에 눌려 제대로 부러졌던 것이다.

“아이고. 많이 다치셨나 보네. 여기는 괜찮으세요?”

아진은 종아리뼈를 만지며 말했고 류수영은 금방이라도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아이고. 조심하시지. 도대체 어쩌다가 이러셨어요? 이쪽은 괜찮으신 거예요? 가만 보니까 환자분이 통증을 제대로 느끼질 못하시네. 이 모양을 해 가지고 걸어온 거예요? 나라면 서 있지도 못했을 텐데. 여기는 괜찮은지 한번 잘 느껴보시고 대답을 하세요.”

아진이 다른 다리의 정강이뼈를 손가락 두 개로 누르자 류수영은 피를 토할 듯이 소리를 질렀다.

순식간에 그들 주위로 구경꾼들이 모여들었다.

다들 옆에서 같이 봤지만 조그만 아이가 고작 손가락 두 개로 류수영의 뼈를 부러뜨렸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만……! 그만해라. 그만해! 여기에 올 때까지는 이러지 않았단 말이다! 지금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이놈!!”

류수영이 소리치자 자리에 주저앉았다.

너무 아파서 그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어디서 뼈가 부러진 채로 와서 나한테 뒤집어씌우려고 하는 거예요?”

아진이 빤히 바라보며 말하자 류수영은 얼굴에서 땀을 뻘뻘 흘렸다.

어느 정도 참을만한 고통이어야 얘기를 할 텐데 이것은 도저히 참을 수 있는 수준의 고통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를 부축하고 온 하인은 속으로 혀를 찼다.

오기 전에 정강이뼈를 세게 차라고 해서 찼는데 맞지도 않은 곳까지 아프다고 하면서 주저앉는 걸 보니 무슨 이런 사람이 다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이고오. 피도 나네요. 뼈가 살을 찢고 나와서 근육이 찢어졌어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일단 치료를 개시하고 나면 완치가 될 때까지 본가 의방에서 치료를 끝까지 받으셔야 해요. 하루 이틀 받고 나가서 본가에서 치료를 제대로 안 했다고 하면 안 되니까요. 본가에서 치료를 받을 생각이면 혈판장을 쓰시고요.”

류수영은 아진이 하는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몸을 하고 부목 하나만 하고 여기까지 온 거지? 통증을 못 느끼는 사람이 있다고 책에서 보기는 했는데 이 분이 그런 사람인가 보네. 여기는 괜찮아요?”

이번에는 류수영의 팔을 가만히 붙잡아 보면서 말을 했고 그는 벌벌 떨면서 눈물 콧물로 범벅된 얼굴을 마구 저었다.

“소, 소, 손대지 마라. 내 몸에 손대지 마라. 으허어어엉!!”

류수영은 아진의 손이 닿기만 하면 뼈가 부러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세상에. 어떻게 저런 게 가능하지? 두 다리가 다 부러지고 팔도 부러졌는데 여기에 올 때까지는 자기가 다리 하나만 부러진 줄 알았다는 거잖아? 세상에. 저런 건 부러워해야 하는 건지 안 됐다고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네.”

“부럽기는 뭐가 부러워? 저 정도면 천치 아닌가? 사람이 아무리 멍청하다고 자기 다리랑 팔이 부러진 것도 몰라? 그러면 천치지?”

사람들은 별꼴을 다 봤다는 듯이 턱을 문질러 가면서 열변을 토했다.

류수영은 이곳에 올 때까지만 해도 이런 일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산본의가 의방에 있던 혈천방 패거리들이 떠났다고 하니 산본의가에 가서 용돈 벌이를 해야 하지 않겠냐고 먼저 말한 것은 류수영이었다.

그러면서 호기롭게 하인을 시켜 정강이뼈를 차게 했고 실금이 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부목을 하고 이곳으로 온 것이다.

한두 번 해 본 게 아니라서 어려울 것도 없었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여기는 괜찮으세요? 하고 아진의 손길이 지나갈 때마다 뼈가 부러져서 온몸에서 움직일 수 있는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사람들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면서 자리를 떠나더니 구름떼같이 많은 구경꾼을 이끌고 나타났다.

“천령상회 아들 아녀?”

“응. 그런데 천령상회 아들이 천치래.”

“천치? 무슨 소리야? 아버지 도와서 일도 잘하고 그러는 사람인데?”

“그러면 뭐해? 다리가 다 부러지고도 자기 다리가 부러진 것도 모르고 걸어왔다가 저 지경이 됐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아. 묻지만 말고 직접 봐. 저기 뼈가 살 뚫고 나온 거 안 보여? 저러고도 그냥 걸어온 거 아니냔 말이야.”

“어어?”

환자들이 대기하는 곳이 워낙 소란스러워서 결국 서종욱과 다른 사람들도 나와서 그 모습을 보고 기함했는데 아진은 어서 의방으로 옮기라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고개를 저었다.

“이 사람은 전에도 이런 전적이 많습니다. 이 사람만 그런 것도 아니고 이 사람의 집안사람이 전부 다 그랬지요. 이런 몸을 하고 와서 하루 이틀만 치료를 받고 돌아가서 나중에 우리가 치료를 제대로 안 해 줘서 상처가 도졌다면서 배상을 받아가지 않았습니까, 아버지.”

아진이 사람들 앞에서 얘기하자 그 일을 알고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를 해 주었다.

“나도 천령상회 회주가 그런 말 하는 거 들은 적이 있었는데 지금 보니까 그게 다 그렇게 된 일이었던 건가 보네!”

서종욱은 아진이 왜 그러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아진이 류수영에게 혈판장을 들이미는 것을 보고 차라리 그렇게 하는 게 낫겠다고 여겼다.

입원을 시켜놓고 치료를 시작해도 도중에 나가겠다고 하면 막을 방법이 없는데 혈판장을 받아놓으면 그걸 들이밀고 치료를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서종욱은 이 꼴을 하고서 그냥 나가게 놔두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고 완치가 될 때까지 충분히 치료할 방법이 담보됐다는 사실에 마음을 놓은 거였지만 정작 아진의 꿍꿍이는 따로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 후로 류수영은 지옥을 경험했다.

눈을 감으면 아진의 얼굴이 떠오르고 환청이 들렸다.

-여기는 괜찮으세요?

그러면 류수영은 경기를 일으키고 비명을 질렀다.

벌떡 일어나려고 하다가 비명을 지르고 다시 누워 눈물을 흘린 것만 해도 지금까지 몇 번인지 몰랐다.

류수영의 하인은 일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하고 천령상회로 달려가 회주를 불러왔다.

회주는 하인의 말을 듣고도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를 하지 못하다가 산본의가에 와서 아들을 보고서야 그 말뜻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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