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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13화 (13/470)

제13화

13화

“왜…… 왜? 나, 나는 살이 없어서 시침하기가 아주 어려울 텐데. 우선 다른 사람들한테 해 보고 충분히 연습이 되면 나한테는 그때 해 보는 게 어떨까?”

그러자 아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편하기는 저런 아저씨가 편하지만 환자 중에는 아저씨 같은 사람들이 더 많아요. 그러니까 아저씨한테 연습하는 게 더 나아요.”

“얘…… 들아.”

왕눈이는 더 핑계를 대고 싶었지만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막도가 왜 그렇게 얌전했었는지 뒤늦게 깨달아 가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아진이 아혈을 짚었고 소리 없는 비명이 그의 입안을 맴돌다 사라졌다.

* * *

도종은 이제 방에 틀어박혀 공부에 전념하는 일이 많아졌다.

혈천방 패거리들의 몸을 이용해 직접 시침을 해 보면서 자신의 부족한 점을 깨달았던 것이다.

전에는 책에 있는 것을 보고 익히면서 뜬구름 잡는 식이었다면 이제는 집중적으로 실습을 해 보면서 책에 나와 있는 내용이 완전히 다르게 이해가 되었다.

문구 하나하나가 왜 그런 식으로 쓰인 건지도 비로소 깨달았다.

직접 해 보지 않았으면 절대 알 수 없었을 것들이었다.

책에 나온 각종 체질의 환자들에 대한 설명을 보면서 도종은 그때마다 막도와 왕눈이, 방주의 몸을 떠올리며 거기에 대입해서 이해를 해 나갔다.

‘정말 고마운 분들이야.’

도종은 그런 생각을 하며 더욱 공부에 매진했다.

서종욱은 도종이 요즘 부쩍 시침에 대한 질문을 많이 한다고 생각하며 이상하게 여겼다.

그러나 도종과 아진은 자기들이 환자의 몸으로 시침 연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말을 하지 않았다.

매일 진료를 하면서 서종욱은 혈천방 패거리의 몸을 직접 봤지만 그들의 몸에 침을 놓은 자리나 흔한 멍도 없어서 아이들이 그들에게 침놓는 연습을 했다고는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도 아진의 손길이 미쳤다.

시침을 하고 나면 그 자리에 마나를 불어넣어 곧 아무 흔적도 남지 않게 하고 실제로 시침의 효과가 나게 해 주었던 것이다.

혈천방 패거리들은 나이 어린 의생들이 영 실력이 없는 건 아닌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빨리 이곳을 나가면 좋겠다는 생각만 간절히 하고 있었다.

아진도 이제 그들을 어느 정도는 용서해 줄 수 있었다.

소리도 못 지르고 하루에 수십 곳을 침에 찔리는 모습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분이 풀렸던 것이다.

처음에 비해 도종의 시침 실력은 확실히 늘었고 눈을 감고도 자기가 생각한 혈 자리에 정확하게 침을 놓을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아진은 그렇게까지 훈련을 할 필요성도 느끼지 않았고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아서 그냥 도종을 구경했다.

자기는 꼭 필요할 때 나서서 마나로 사람을 치료하고 이제부터는 검술 수련에나 몰두하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혈천방 패거리들이 치료를 마치고 완쾌되어 의가를 떠나게 되었을 때 의가 사람들은 시원섭섭한 기분을 느꼈다.

매일 보면서 치료를 하면서 미운 정도 조금은 든 것 같았고 혈천방의 왈패들이 자기들을 치료해 준 사람을 때리지도 않을 것 같아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산본에서 살면서 혈천방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인생이 펴는 것이다.

치료비까지 두둑하게 받고 서로 인사를 마쳤을 때 아진이 외쳤다.

“아 참. 아버지. 앞으로 산본의가에서 쓰는 약초는 아저씨들이 캐 오겠다고 하셨어요.”

“어?”

그 소리는 송효원에게서 나왔다.

“방주님. 저건 또 무슨 소리…….”

왕눈이가 말하다가 아진의 서슬 퍼런 눈초리를 발견했다.

저절로 마른 침이 꿀꺽 넘어갔고 그는 요란하게 기침을 해댔다.

“아저씨들. 제가 견본으로 약초를 보여 드렸죠? 아. 아직 안 드렸나? 깜빡했네. 내 정신 좀 봐.”

저게 어딜 봐서 다섯 살짜리인가.

혈천방 패거리들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아진이 서두르는 것을 보고 의생 허우천이 어떤 걸 말하는지 알려주면 자기가 가져오겠다고 말했고 아진은 냉큼, 의가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약초들을 말해 주었다.

허우천이 약초를 가져오자 송효원은 그것을 받아들며 애써 웃음을 지었다.

“그래. 산에 갈 일이 종종 생기니 그때 가서 뜯어 오면 좋지. 신세도 오래 졌는데 약초 캐오는 게 뭐가 대수겠냐.”

그때 갑자기 도종이 깊이 허리를 숙이더니 말했다.

“아저씨들. 제 좁은 생각으로 아저씨들에 대해 안 좋게 생각했었는데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아저씨들 덕분에 그동안 많은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앞으로도 더욱 정진하도록 하겠습니다.”

도종은 아예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혈천방 사람들은 산본의가 사람들이 참 착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쩌다가 저런 별종이 나왔을까.

그러면서 아진을 힐끔 보자 아진의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어디 한번 지껄여 보라는 것 같았다.

“아저씨들도 이제 착하게 사셔야죠. 언제까지 선량한 사람들을 괴롭히면서 보호세 뜯어 가면서 살려고 그러세요? 본가에는 이제 약초 줄 때만 오고 다시는 오지 마세요.”

아진이 덕담이랍시고 하는 말에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길고 지루한 작별을 마치고 그들이 돌아가자 의가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길게 한숨을 쉬었다.

“모두 고생이 많았습니다. 오늘은 축하도 하고 위로도 할 겸 술과 고기를 먹고 긴장을 풀어 보도록 하죠.”

서종욱의 말에 의가 사람들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역시 가주님이 최고입니다.”

의생들이 돈을 받아 고기와 술을 사러 밖으로 가자 아진과 도종도 그들을 따라 나갔다.

손에는 철전 다섯 개를 소중하게 꼭 쥐고 당과를 사러 가는 거였다.

“야. 아진아. 너. 혹시 당과 맛도 기억이 안 나냐?”

“응?”

아진은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나 하고 잠시 도종을 바라보았다.

사실 그 말이 맞기는 했는데 그렇다고 말하면 이 조그만 형님이 또 걱정할 것 같아서였다.

“하긴. 아무리 머리를 다쳐도 당과 맛은 잊을 수가 없겠지. 말 안 해도 된다.”

도종이 그렇게 말해 줘서 다행이었다.

아진은 당과 말고 술을 마시고 싶었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의젓하게 환자를 보는 도종이었지만 애는 애였고 시장에 가자 흐트러짐도 없이 곧장 당과 파는 가게로 가서 철전을 내밀고 당과를 주문했다.

색색의 동그란 것이 유혹적으로 빛나는 걸 보고 있자니 아진도 입에 침이 고이기는 했다.

“아종아. 아진아. 우리는 고기랑 술을 사 가지고 돌아갈게. 너희는 구경하다가 본가로 돌아가. 알았지?”

의생들이 말을 하고 주루로 급히 걸음을 옮겼다.

신나 보였다.

‘그래. 가끔 이런 낙도 있어야지. 산본의가 사람들은 너무 일만 해.’

아진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면서 당과를 입안에 넣었다.

“어어어?”

도종이 고개를 돌리며 누군가를 보더니 혼자서 버럭 화를 내고 있었다.

“저 사람! 본가에서 치료받고 잘못돼서 몸을 움직이지도 못한다고 하더니 잘만 돌아다니고 있네?”

아진은 도종이 누구를 말하는 건가 하며 도종이 보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열다섯 살 정도 돼 보이는 아이가 좋은 옷을 입고 한껏 거들먹거리며 하인들을 거느리고 지나가고 있었다.

“누군데?”

“아. 생각 안 나? 내가 전에 얘기한 적 있었지? 아버지가 저 사람 때문에 진료를 못 하셨다고. 처음에는 저 사람 아버지가 그러더니 나중에는 저 사람도 그랬고 형이랑 여동생이랑 누나도 그랬고.”

“아아. 그게 저 사람이야?”

“응. 생각해 봐. 우리 의가에 와서 치료를 받을 때마다 이상해지면 다음에는 다른 의원을 찾아가야 하는 거 아니야? 매번 우리 의가로 오고 몸이 이상해졌다면서 배상을 하라고 하잖아.”

처음에는 뇌종양에 걸린 서종욱이 시침을 잘못해서 그렇게 된 듯한데 쉽게 돈이 벌리는 것을 알고 나중에는 아예 온 가족을 동원해서 자해 공갈을 한 것 같았다.

“그 돈을 이제야 겨우 다 갚았는데 저 얼굴을 보니까 열 받잖아. 그동안 이자 내느라고 아버지가 고생하신 걸 생각하면. 아오!”

도종은 부글부글 끓는 듯 화를 냈다.

“그런데 요즘에는 왜 안 왔지?”

“몰라. 혈천방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혈천방이 버티고 있으니까 겁이 났겠지.”

“그러면 혈천방이 의방에서 나간 걸 알면 다시 올 수도 있을까?”

“그럴 수도 있겠지? 아진아. 이번에는 네가 아버지 좀 막아 봐. 나는 정말 아버지를 존경하지만 그럴 때는 너무 답답해서 죽겠어. 아버지가 치료해 주면 뭐하냐는 말이야. 내 생각에는 그 인간들이 집으로 돌아가서 상처에 오물 같은 걸 쏟아부어서 일부러 덧나게 하는 것 같아. 돈을 뜯어내려고. 그게 아니면 저 집 사람들만 매번 상처가 악화하는 게 이상해.”

아진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사례에 대해서 들어 본 적도 있었다.

서도진이 살던 세계에는 자해 공갈단도 극성을 부렸고 다른 이유로 자신의 상처를 들쑤시는 사람도 있었다.

남에게 동정받는 게 좋아서 상처를 일부러 덧나게 하고 몸이 회복되는 걸 막으려고 하는 정신질환도 있었다.

‘맞아. 우리 아버지는 호구 기질이 다분하지.’

아진은 당과를 빨면서 그 아이를 지켜보았다.

‘그런데 집안에 호구가 있는 게 꼭 나쁘기만 한 건 아니야. 호구한테 빨대 꽂으려는 인간에게 내가 빨대를 꽂으면 되니까.’

아진은 재미있는 일이 생기겠다고 생각하며 도종의 옆으로 갔다.

“그런데 쟤는 뭐 하는 애야?”

“쟤라니? 그래도 너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데. 천령상회 둘째 아들이잖아. 이름이 아마 류수영일걸?”

“못 걷는다고 하고 지금 걸어 다니고 있는 거야?”

“응. 일어나지도 못하고 돌아다니지도 못한다고 했었거든. 그러고 시간이 흐르기는 했지만 그때 상태를 생각하면 지금 저러고 다닌다는 건 말이 안 돼.”

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자기들이 먼저 오겠네.”

“내 말이 그 말이야. 그러니까 아진이 네가 아버지한테 이번에는 절대 저 사람들 받지 말자고 꼭 말씀드려. 알았지?”

아진은 고개를 살랑살랑 끄덕였다.

뭔가 깊이 생각하는 눈치라서 도종도 더 이상은 얘기를 하지 않았다.

“상회라고 했지? 상회면 우리도 저기에서 물건을 사기도 해?”

“응. 그런데 우리한테는 물건을 비싸게 팔아. 아무리 많이 사도 깎아주지 않아. 시침 같은 건 어쩔 수 없이 저기에서 사야 하는데 바가지를 씌우고.”

“그러면 다른 곳에 가서 사 오면 되잖아.”

“그래도 그 비용보다는 천령상회에서 사는 게 싸니까 그렇지. 너 같으면 철전으로 몇 문 아끼자고 은자 두 냥에 사람을 사서 다른 성까지 가서 침을 사 오겠냐?”

아진은 어떤 상황인지 알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는 일이 끊이지 않고 생겨서 재미있네.’

아진은 혼자 웃음을 지었다.

그날 저녁, 산본의가에서는 드물게 술판이 벌어졌다.

사람들이 원래 성격이 차분한 것도 있겠지만 비상사태를 염두에 두는 것이 습관이 돼서 그런 건지 술을 과하게 마시는 사람도 없었고 술에 취해도 얌전했다.

술동이가 꽤 많이 바닥을 드러냈는데도 고성을 내는 사람도 없고 싸움도 나지 않았다.

아진과 도종도 옆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함께 고기를 먹었다.

“가주님. 이제 본가도 잘 될 일만 남은 것 같습니다. 안 좋은 일은 전부 다 잊어버리고 이제 좋은 일만 올 거라고 생각하겠습니다. 한 잔 받으십시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의원 하명준이 술을 따라주며 말하자 서종욱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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