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12화
“같이 가시자고요. 아저씨. 여기 계신 분들 다 바쁘신 분들이에요. 아저씨들 때문에 잠도 거의 못 주무셨는데 아저씨들 때문에 식사도 못 하시고 환자들 보시게 생겼어요. 나오세요.”
말투는 점점 한계에 치닫는 것 같았고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세상에 이런 구제 불능 양아치 새끼들이 다 있나 해서 너무 깊이 빡치는 바람에 어느덧 아저씨 말투가 나오고 있었지만 아진은 그것도 몰랐고 알았다고 해도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의가 사람들은 혈천방 패거리의 얼굴이 사색이 된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무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꼬…… 꼬마야. 내가 잘못했다. 내가 정말 잘못했다. 내가 돈에 눈이 어두워서 그랬어.”
“아. 이 아저씨가 진짜. 같은 말 여러 번 하게 만드네!”
“미안하다. 꼬마야. 내가 말한 걸 두 배, 아니. 세 배로 돌려줄게. 제발 용서해다오.”
“…….”
“제발 부탁한다. 꼬마야. 정말 잘못 했다.”
“다른 분들도요?”
“그래. 미안하다. 그렇게 말하면 돈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랬어. 정말 잘못했다. 한 번만 용서해 줘.”
“그런 걸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겠어요? 짐승도 아니고 사람인데 자기들 목숨을 살려놓은 사람한테 보퉁이를 내놓으라고 하네? 아아. 정말 이런 일이 있어서 그런 속담이 있는 거구나.”
아진은 정말로 신기하게 여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진아. 이게 다 무슨 소리냐?”
서종욱이 묻자 아진이 씩 웃었다.
“이 아저씨들이 말한 대로인 것 같아요. 원래 그런 돈은 없었는데 거짓말로 돈을 뜯어내려고 그런 거래요.”
“그런데 왜…….”
왜 너한테 사과를 하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자신의 아들이 특별하다는 것은 그도 알 수 있었다.
‘언젠가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오겠지.’
아진이 먼저 말을 해 주지 않으면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겠지만 그래도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아진이 속 시원히 모든 걸 말해 주는 날이 오겠지 하며 서종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혈천방 패거리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돈을 전부 긁어서 철전 하나 남기지 않고 산본의가에 치료비로 냈고 아진에게 말한 대로 보상까지 했다.
그래도 아진은 그걸로 그들을 용서해 줄 생각이 없었다.
그들이 품은 마음이 용서되지 않아서였다.
혈천방 패거리들도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알았다.
돈은 받지만 그렇다고 용서를 한 건 아니라는 것이 아이의 눈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던 것이다.
‘……’
왜 그랬을까.
왜 그랬을까.
그들은 자기들의 입을 찢고 싶을 정도로 후회가 됐다.
그것이 지금껏 그들이 살아온 방식이었지만 아진의 앞에서는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너무 날뛰었던 것이다.
“상태가 나빠지는 것 같습니다. 가주님. 환자들이 단체로 식은땀을 흘리는데요?”
의생 허우천이 말하자 도종이 손가락을 들며 말했다.
“식은땀이 눈에서도 나오고 있어요. 아저씨들이 전부 우네요.”
알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 * *
밖에서 발소리가 들리자 혈천방의 패거리들은 일제히 조용해졌다.
제선문에서 내린 임무를 실패한 후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거기에 대해 얘기를 나누느라고 한참 분주했었는데 밖에 아이들이 온 것 같아서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이윽고 문이 열리더니 아진과 도종이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아저씨들. 오늘은 저희가 회진 왔어요. 히힛.”
아진이 해맑게 웃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듣고 같이 웃을 수 있는 사람은 혈천방 중에 아무도 없었다.
“형님. 형님도 인사해. 우리에게 큰 도움을 주실 분들인데 인사드려야지.”
“응? 응. 으응. 안녕하세요.”
도종이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송효원은 두 아이가 무슨 꿍꿍이로 그러는 건지 알지 못한 채 아진을 주시했다.
“그런데 정말 그래도 되는 거야?”
도종은 여전히 걱정된다는 듯 조심스럽게 아진에게 물었다.
“응. 그럼. 이 아저씨들이 먼저 말한 거야. 지난번에 거짓말해서 우리 돈을 뺏으려고 한 게 아무래도 너무 부끄럽다면서 여기에 있는 동안 도움이 될 방법을 찾아보고 싶다고 하잖아?”
아진이 어찌나 자연스럽게 그 이야기를 했는지, 혈천방의 사람들은 자기들이 모르는 일이 또 있는 건가 했다.
“저게…… 무슨 말입니까, 방주님?”
왕눈이가 묻자 송효원보다 더 빠르게 아진의 눈이 움직였다.
도종에게는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혈천방은 금방이라도 피부를 찌를 것 같은 날카로운 감각을 느꼈다.
“맞죠. 아저씨들?”
아진이 환하게 웃으며 말하자 혈천방은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럼. 당연하지. 우리도 사람인데 당연히 잘못한 건 책임을 진다.”
“거봐. 형님. 그러니까 이 아저씨들을 눕혀 놓고 시침 연습을 해.”
“시…… 시침?”
막도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지만 아진은 모르는 척 도종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 아저씨가 좋아 보이네. 살에 기름기도 별로 없는 것 같고. 아저씨. 누워 보세요.”
아진은 미리 정해둔 것처럼 막도를 향해 다가왔다.
막도는 그 일이 조용히 지나가기에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혼자서 마음을 놓고 있었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서 오히려 돈을 뜯겼지만 사업을 하다 보면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할 수 있었다.
방주도 아진의 정체를 알고 너무 놀라서 그랬는지 막도를 따로 야단치지도 않았고 몇몇 사람은 막도의 순발력을 칭찬하기도 했고 아진만 아니었으면 산본의가의 기둥을 제대로 뽑을 수 있었는데 아까웠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른들끼리 계산이 다 끝난 후에 갑자기 조무래기들이 들어와서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침이라니.
그것도 콕 집어서 자기를 보고 그랬다.
“혈 자리는 다 외우고 있지. 형님?”
“그럼. 그건 다 외우지. 눈 감고도 짚을 수 있어.”
“그래. 그럼 됐어. 이제는 실전 경험만 쌓으면 되겠네. 이 아저씨들이 다 나아서 의방을 떠날 때까지 계속 시침을 해. 처음에는 이 아저씨한테 집중적으로 하고 나중에는 다른 사람들한테도 해 봐. 우선 이 아저씨한테 하는 게 숙달되면 저기 있는 기름진 아저씨한테도 할 수 있겠네.”
“그래. 아진아. 고맙다.”
“고맙긴. 고마운 건 이 아저씨들이지.”
“정말 고맙습니다. 아저씨들.”
도종은 진심으로 감격한 얼굴로 다시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 꾸벅 인사를 했다.
“형님. 세혈도 전부 다 알아?”
“세, 세혈까지? 그건 책을 봐야 하는데. 대혈은 다 외우는데…….”
“그래? 그럼 책 보면서 하면 되지. 내가 책 들고 있을게.”
“그래. 고맙다. 아진아.”
이게 뭔가……
혈천방의 패거리들은 아주 희한한 위험을 느끼고 있었다.
차라리 무림 고수가 검이나 무구를 들고 와서 살기를 피우며 죽인다고 하면 이제 죽었구나 하고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침을 들고 발발 떠는 어린 애를 보면서는 무슨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침통 꺼내. 형님.”
“응. 아이코.”
긴장했는지 도종은 침통을 떨어뜨렸고 그 바람에 거기에 있던 침이 와르르 쏟아졌다.
도종은 혈천방이 무서웠는지 그들의 눈치를 보며 덜덜거리며 침을 침통에 담았다.
“이건 못 쓰겠다.”
“그럼 내 거 써. 형님.”
그러면서 자기 침통을 내미는데 침들이 하나같이 다 두꺼웠다.
사람에게 놓는 침이 맞는 건가 싶을 정도였는데 저 자식은 어디서 저런 침을 가지고 다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저 혼자만 소한테 침을 놓고 다니는 건지.
도종은 그것을 받아들고도 발발 떨었다.
“아저씨. 누우세요.”
아진이 막도에게 와서 활달하게 말했다.
“통증을 반감시켜드리는 침을 놔드릴 거예요. 아주 편안해지실 거예요.”
거짓말하지 마라, 이놈!
사천 당문 놈들이 의료 기기를 무기로 사용한다더니 네가 바로 사천 당문의 놈 같구나!
막도는 차마 소리 내서 말하지는 못했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우선 맥을 짚어 보고 침을 놓을 수 있는 혈에는 다 놔 봐. 형님.”
침을 놓을 수 있는 혈에는 다 놔 보라니.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막도는 그나마 온전해 보이는 형이라는 아이가 안 된다고 해 주기를 바랐지만 그의 희망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무너졌다.
“응. 그래. 고마워.”
맥을 짚는 것도 영 어설펐다.
맥을 잡은 채 썩은 명태 같은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이 어디가 안 좋은 건지 영 감을 못 잡는 것 같았다.
“어디가 안 좋은 것 같아, 형님?”
“위장이랑 간이 다 안 좋은 것 같은데? 속이 안 좋으세요? 더부룩하고 답답하고, 누우면 불편해서 자꾸 다시 앉게 되세요?”
도종이 조곤조곤 묻자 막도는 신통하다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혈천방 패거리들의 상태는 모두 그랬다.
한 마디로, 살아 있어도 산 것 같지 않은 상태.
이 두 어린 의생들이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활기가 넘쳤는데 둘이 들어와서 시침을 하겠다고 한 순간부터 속이 콱 막혔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조금 따끔합니다.”
“형님. 어디에다 놓을 건데?”
“어…… 임읍, 전곡, 후계, 통곡?”
“임읍이랑 통곡은 아는데 전곡이랑 후계는 어디야?”
“나도 전곡은 아는데. 후계는…… 책 펴봐.”
“어. 잠깐만.”
조막만 한 머리통 두 개가 나란히 붙어서 책장을 급히 넘겼다.
저걸 시원하게 쥐어박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안 하는 사람이 없었다.
“아아. 임읍이 여기야? 나는 잘못 알고 있었네.”
도종의 말에, 시침을 기다리며 누워있는 막도의 몸에서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어어. 후계가 여기네. 주먹 쥐면 볼록 나오는 곳. 형님은 알고 있었어?”
“거기가 후계야? 그렇구나.”
도종은 혈 자리를 입으로 되뇌더니 다시 한번 막도에게 인사를 했다.
잘 부탁드리며 조금만 참으시라고.
침이 꽂혔다.
막도는 단순히 ‘따끔’한 수준을 넘어선 통증에 비명을 지르려 했다.
그러다가 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새 아혈을 짚인 것이다.
다른 혈 자리는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아혈은 잘도 아는 모양이라는 생각에 더 화가 났다.
“잘못 찔렀나? 여기가 아닌가?”
어린 도종은 과감한 맛이 없었다.
침을 놓고도 확신이 들지 않는지 다시 뺐다가 쑤셔 넣기를 여러 번 하다 보니 막도는 죽을 맛이었다.
곧 자기들 차례가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며 막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혈천방 패거리들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가시다 못해 곧 죽을 사람처럼 백지처럼 되어 가고 있었다.
“아…… 어렵네.”
도종은 막도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수시로 그의 얼굴을 보았는데 막도는 자기 얼굴이 찡그려져 있으면 도종이 자신 없어 하며 침을 슬그머니 다시 뺀다는 걸 알아차리고 필사적으로 웃었다.
다 나은 것 같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아혈을 짚여서 소리를 내지는 못했다.
그게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뭘 했다고 도종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아. 힘드네.”
“수고했어. 형님.”
그들의 시선이 왕눈이에게 향했다.
왕눈이는 헛바람을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