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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11화 (11/470)

제11화

11화

“신의님. 저희를 고쳐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 산본의가는 저희 혈천방에서 책임지고 지킬 것이니 신의님께서는 마음 놓고 의술을 펼쳐 주시기 바랍니다. 의원님이랑 의생님, 의녀님들도 편하게 밤길을 오고 가셔도 되니 걱정하지 마시고 저희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저희 혈천방을 찾아만 주십시오.”

말코의 말에 서종욱은 놀란 눈으로 아진을 보았다.

왠지는 몰라도 이 일에 아진이 연관돼 있을 것 같다는 기이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완쾌해서 의방을 나가시게 되어 우리도 기쁩니다. 앞으로는 본가에 다시 올 일 없도록 사고 없이 건강히 지내십시오. 상처가 도질 수도 있으니 큰 동작은 하지 마시고 당분간은 계속 움직임에 주의하셔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몸이 불편하면 병을 키우지 말고 바로 오셔야 하고 말입니다.”

“예. 신의님.”

그들은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고 의가 사람들에게도 골고루 예의를 차린 후에 쌩하니 떠났다.

머릿속에 할 일이 가득 찬 것 같아 보였다.

“자. 병상도 마련이 됐으니 새로운 환자들을 의방으로 옮기게. 당분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겠어.”

서종욱의 목소리에 의가 사람들이 활기차게 움직였다.

의가에 이렇게 활기가 넘친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를 일이었다.

* * *

의방에서 정신을 차린 혈천방 패거리는 사태를 파악하느라 분주했다.

“으으으…….”

“으윽…….”

통증을 줄이는 약을 처방하고 침을 놨음에도, 간밤에 치명적인 공격을 당한 사람들의 입에서 신음이 줄줄이 흘러나왔다.

“방주님.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어제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눈이 부리부리해서 왕눈이라 불리는 자가 말하자 방주 송효원이 고개를 돌렸다.

널찍한 방에 나무통 여러 개를 가져다 놓고 그 위에 넓은 판자를 붙여 간이 침상을 만든 것 같았다.

그 위에 자신의 부하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렇게 하고도 한 방에 다 눕히지는 못했는데 옆방에서 두런두런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두 방에 나눠 수용을 한 것 같았다.

다들 꼴이 말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늦지 않게 치료를 받아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모습이었다.

‘하마터면 전부 다 죽을 뻔했어. 아니. 죽이려고 했으면 죽일 수도 있었을 거야. 딱 죽지 않을 정도로만 팬 거야.’

송효원은 그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칼이 제 목을 스치고 지나갔을 때 그대로 죽는다고 생각했는데 목에 닿은 것이 칼날이 아닌 등이었던 것이다.

“혹시…… 제가 잘못 들은 건지 모르겠는데 어제 저희를 공격한 게 어린애 같지 않았습니까, 방주님?”

“…….”

송효원도 막 그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그때 밖에서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들리더니 의원 옷을 입은 사람이 의생과 의녀들을 대동하고 들어왔다.

그 옆에는 조그만 아이 둘도 있었다.

“산본의가의 가주 서종욱이라고 합니다. 어제 본가 앞에 쓰러져 계셔서 급히 치료를 했습니다.”

“예…… 고맙습니다.”

상황이 애매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송효원은 일단 예를 차렸다.

누가 봐도 의가를 치려고 하다가 문 앞에서 당한 게 뻔한데도 이렇게 치료를 해 놓은 것을 보니 황당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그에게 은혜를 입은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자상이 심했지만 급한 치료는 끝내놓은 상태입니다. 당분간 의방에서 머물면서 치료를 계속 받는 것이 후유증 없이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긴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혹시 다른 곳에서 치료를 받고 싶다거나 할 수도 있으니 그건 여러분이 결정하시면 됩니다.”

“아닙니다. 가주님이 아니었으면 저희는 죽었을 겁니다. 신속하게 치료해서 목숨을 건지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돈은 걱정하지 마시고 치료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면 말이 나온 김에 치료비를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본가가 운영상 어려움을 겪다 보니 치료비가 일정액 이상을 넘어가면 바로 수납을 하고 있습니다.”

“예. 당연히 그러셔야지요. 저희에게 돈을 쓰셨는데 당연히 받으셔야지요. 얼마인지 말씀만 해 주십시오.”

송효원은 꽤 많은 돈이 나올 거라고 생각하면서 답을 기다렸다.

죽어 가는 사람을 살려놨으니 돈이 얼마가 들었다고 해도 줄 참이었다.

혈천방의 자세와는 조금 거리가 있었지만 이번에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불안 증세와 통증을 심하게 겪는 분들이 있어서 본가의 비약과 약제를 처방했습니다.”

서종욱은 조곤조곤 설명을 하고 은자 스물여덟 냥을 불렀다.

다 죽어 가던 사람이 서른 명이 넘었는데 그들을 전부 다 살려 놓고 은자 스물여덟 냥이라고 하면 결코 많은 금액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오늘까지의 치료비가 그 정도고 의방에서 계속 치료를 받으시면 더 추가될 겁니다.”

그런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면 조금도 부담되는 액수가 아니었다.

잘 나가는 기루에서 한 달에 받는 보호세가 은자 쉰 냥이었으니 이건 공짜나 다름이 없었다.

치료를 잘 받고 활동을 계속해나가면 그 정도 돈은 한 달도 안 돼서 충당하고도 남았다.

“바로 드리겠습니다.”

방주가 옆을 돌아보자 시선을 받은 왕눈이가 즉각 품 안을 뒤지다가 품속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알고 서종욱을 바라보았다.

“아. 소지품은 저희가 보관하고 있었는데 돌려드리겠습니다.”

“예.”

‘소지품을 저희가 보관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그 자리에 있던 혈천방의 머리가 전부 비슷하게 돌아갔다.

원래 그보다 돈이 더 많이 있었다고 하면서 깽판을 치면 오히려 돈을 벌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들은 뼛속까지 흑도였고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왕눈이는 일단 방주가 허락하기만 하면 그렇게 하려고 생각하며 송효원의 눈치를 살폈다.

송효원도 왕눈이가 왜 자기를 보고 있는지 알았고 생각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임무도 실패했고 앞으로 제선문이 어떻게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시킨 일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며 손을 끊으려 할 수도 있는데 그때를 위해 크게 한탕 한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래. 혈천방이 돈을 내고 치료를 받다니. 이런 소문이 나면 사람들이 우리를 뭐라고 생각하겠어? 다른 곳에서 지금까지 돈을 내고 나온 적이 없었는데 여기서만 치료비를 내면 형평성에 어긋나지.’

그러면서 송효원은 자기가 어젯밤에 너무 심한 일을 당해서 잠시 흑도의 본분을 망각했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왕눈이의 얼굴에 웃음이 지어졌다.

왕눈이는 기고만장했다.

지난밤의 설욕을 만회할 기회였다.

어차피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한주먹거리도 되지 않을 것 같았고 지금 상태로도 그들 정도는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듯했다.

잠시 후에 의녀 몇 사람이 소지품을 가지고 돌아와서 한 곳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각자 와서 자기들 물건을 가져갔고 그러는 동안 왕눈이가 그들 각자와 눈을 마주쳤다.

그런 짓을 지금까지 밥 먹듯이 해 오다 보니 눈빛만 주고받아도 통하는 게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역할 분담이 어느 정도 끝나 있었다.

“이게 전부입니까? 제 보퉁이는 없는 것 같은데요?”

그들 사이에서 막도라고 불리는 이가 흑도 특유의 건들거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서종욱의 얼굴에 긴장이 서렸다.

설마 했는데 정말 이런 일이 생기는 건가 하는 생각에 순간적으로 정신이 멍해졌다.

곁에 있던 의가 사람들도 긴장하는 빛이 역력했다.

“신의님. 제 보퉁이 어디 있냐는 말입니다. 거기에 은자 쉰 냥씩 묶어놓은 꾸러미가 여섯 개가 있었는데요. 마침 어제 수금을 하는 날이어서 가지고 있었는데. 아이고. 산본의가는 장사를 이렇게 하시나 보네.”

눈에 다 보이는 거짓말을 들으면서도 반박을 할 수 없는 것이 힘을 갖지 못한 자들의 처지였다.

“산본의가 장사 잘 하시네?”

왕눈이가 이죽거리자 기가 산 막도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협박을 하려 들었다.

“이 사람들. 영 못 쓰겠네. 이렇게 해서 다친 사람 등쳐먹고 사는 모양이네. 여기 와서 죽은 사람들 돈은 그대로 먹어 버리는 거 아니우? 아아. 돈이 많은 사람은 멀쩡하게 들어왔다가 죽어 나갈 수도 있겠네. 그런 사람이 온 적 없다고 이 작자들이 입을 맞추면 누가 알겠어? 이야아. 이거. 떼돈 버는 장사네. 나도 의가나 차릴까?”

“말씀이 심하시오!”

그것은 서종욱의 신념을 조롱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서종욱이 도발에 넘어가자 그들은 더욱 신이 나서 이죽거렸다.

누군가 자기 주머니를 가져가서 열어 보더니 화들짝 놀라듯 말했다.

“어? 왜 여기에 돈이 하나도 없지요? 어제 급봉을 받는 날이어서 은자 스무 냥이 있었는데.”

뒷골목 패거리 급봉이 은자 스무 냥이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낄낄거리자 다른 놈들이 자기들도 확인을 해 봐야겠다면서 저마다 은자 스무 냥을 내놓으라고 했고 그중에 몇 놈은 한술 더 떠서 원래 가지고 있던 돈이 더 있었으니 그것까지 토해내라고 성화였다.

송효원은 그 상황을 묵인했다.

의가 사람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는 가운데 오직 아진의 얼굴에만 웃음이 지어졌다.

“아아. 그거. 제가 깜빡하고 말씀을 안 드렸는데 돈이 너무 많아 한 곳에 잘 보관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제가 따로 넣어 놨어요. 어른들이 모두 아저씨들을 치료하느라고 바쁘셔서 나중에 말씀드려야지 하고 있다가 잊어버렸어요. 저를 따라오세요. 제가 드릴게요.”

갑자기 아진이 말하자 혈천방의 패거리들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창백해졌다.

분명 지난 밤에 들었던 그 목소리였다.

“은자 삼백 냥 아저씨. 아저씨부터 따라오세요. 돈이 지금 내원에 있는데 아저씨들이 한꺼번에 들어가면 내원에 계신 분들이 놀라시니까 한 분씩 오세요. 어서 오세요. 아저씨.”

아진이 막도의 눈을 보며 씽긋 웃자 막도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자기가 자기 몸의 절반도 안 되는 꼬마와 눈이 마주쳤다고 오줌을 지릴 거라고는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지만 그것이 그 순간 그에게 일어난 현실이었다.

“아…… 그, 그게…… 지금 생각하니까 아닌 것도 같다. 꼬마야. 그래. 맞아. 여기에 와야 한다는 말을 듣고 다른 곳에 두고 온 것 같아.”

“아니에요. 아저씨. 계속 헷갈리시나 본데 은자 쉰 냥짜리 꾸러미가 들어 있는 보퉁이가 있었어요. 아저씨가 또 헷갈리신 것 같아요. 싸우다가 머리를 심하게 맞으면 그럴 수도 있어요. 저랑 같이 가세요.”

“아니야. 아니다. 얘야. 분명히 기억난다. 어디에 뒀는지 정확히 기억이 난다.”

“아니라니까요. 저랑 같이 가서 그 보퉁이를 보시면 기억이 확실히 날 거예요.”

“내가 잘못했다. 꼬마야. 내가 거짓말을 했어. 돈을 뜯어 내보려고. 정말 잘못했다.”

막도는 그 자리에서 무릎까지 꿇었다.

의가의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서로 어안이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혈천방 패거리들은 그 마음을 너무나 잘 이해했다.

그들은 악귀의 목소리를 그 자리에서 다시 듣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아이가 가주의 아들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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