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러, 의선되다-10화 (10/470)
  • 제10화

    10화

    그렇게 어린아이가 칼을 휘둘러 사람들을 쓰러뜨렸을 거라고 상상을 하는 게 어렵다 보니 어느 고수가 고도의 술법을 펼쳐 어린아이가 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혈천방의 왈패들은 무공을 익힌 자들도 아니었다.

    그런 자들에게는 삼류 무인도 두려운 법이었는데 반로환동을 할 수 있는 고수라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었다.

    “도망쳐라! 상대는 반로환동한 고수다!”

    혈천방의 방주가 소리치기 전부터 이미 대열은 무너졌고 전열을 이탈해 도망치는 자들이 수두룩했다.

    그러나 아진의 주먹은 날카로웠다.

    한 마리의 짐승이 날뛰는 것처럼 신형이 이리저리 날뛰었고 그때마다 어린아이의 주먹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묵직한 쇳덩어리 같은 주먹이 사람들의 옆구리와 몸에 퍽퍽 처박혔다.

    “으아아악!”

    비명은 갈수록 더욱 짙은 비명에 잠겼다.

    아진은 더욱 신이 났다.

    지금의 그는 던전에서 괴수를 위협하던 헌터 서도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가끔은 이런 괴수도 있었다.

    하나의 개체는 작지만 군집을 이루어 던전을 장악하고 있는 괴수들.

    눈앞의 무리를 괴수라고 생각하면 간단했다.

    서도진은 자신의 스탯을 확인하기 위해 몸을 놀리던 때처럼 지금도 자신이 가진 힘을 관조하면서 사용했다.

    마나를 내공으로 바꾸어 주먹을 강화하기는 했지만 그의 움직임은 초식이라고 할 것도 없이 형식이 제멋대로였다.

    ‘아무래도 이걸로는 한계가 있어. 이 자들이 뒷골목 왈패들이라서 통하는 거고 만약에 그게 아니라면 벌써 나는 몇 번이나 위기를 맞았을 거야. 마나가 내공으로 바뀌는 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속도가 느려져. 마나가 정확히 어느 정도나 있는 건지도 살펴봐야 하는데 그것도 잘 안 되고 있고.’

    아진은 싸우는 동안 여러 가지 문제점을 깨달아 갔다.

    ‘그래. 무술 스승을 찾는 걸 계속 미루기만 할 건 아니야. 필요하겠어.’

    그런 생각을 하면서 움직이다 보니 어느덧 주위에서 들리는 소리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아진은 기감을 펼친 채 남아 있는 왈패들의 숫자를 헤아렸다.

    ‘거의 끝난 모양이네.’

    아진이 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산본의가의 문이 열렸다.

    “아진아. 아진아!”

    “아진아. 어디 있니. 아진아!”

    아버지와 어머니였다.

    어쩌다가 아진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린 듯했다.

    ‘이크!’

    아진은 몸을 움직이는 사람이 없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담을 넘어 안으로 조용히 들어갔다.

    “가주님. 여기에 사람들이 쓰러져 있습니다!”

    먼저 혈천방 패거리를 발견한 의생이 소리쳤다.

    “여기에도 있습니다. 가주님. 한두 사람이 아닙니다. 스물, 아니 서른 명도 넘는 것 같습니다.”

    횃불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사람들을 확인하고 의생이 말하자 가주의 충격은 더욱 커졌다.

    “아진이를 찾게. 우리 아진이는 어디에 있는가! 아진이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생겼단 말인가. 아진아. 아진아!”

    서종욱은 아진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의원으로서 언제나 다친 사람이 우선이었던 그에게도 지금 이 순간에는 다른 말이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아진은 안으로 들어갔다가 큰 소리에 잠이 깨서 나온 것처럼 밖으로 걸어나갔다.

    “아버지이이…….”

    아진은 조금 전까지 자고 있었던 것처럼 잠긴 목소리로 서종욱을 불렀다.

    “가주님. 아진이입니다. 아진이가 나왔어요. 안에 있었던 모양입니다.”

    누군가 말하자 양주은이 먼저 아진을 발견하고 달려왔다.

    “아진아. 어디에 있었니. 아가야. 너에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어미가 얼마나 놀란 줄 아느냐.”

    “저는 방에서 자고 있었어요. 어머니. 눈을 떠 보니 침상에서 떨어져 있기는 했는데…….”

    “뭐라고?”

    양주은이 아진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그를 빤히 보고는 웃음을 터뜨리고 꼭 끌어안았다.

    “다행이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아가야. 너는 무사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이렇게 어미 품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되는 거야.”

    이럴 때면 서도진은 자기가 포기했던 가족 간의 사랑을 진하게 느끼게 되면서 기분이 묘해졌다.

    “아진아. 이리 와. 사달이 난 모양이야. 너는 형님 옆에 있어. 자객이 들었는지도 몰라. 사람들이 쓰러졌대. 서른 명도 넘는 사람들이. 왜 하필 여기에서 쓰러진 걸까? 다치면 들어와서 치료를 받으려고 의가 앞에 와서 싸운 건가? 이 사람들도 웃긴다. 그치?”

    도종이 옆으로 와서 아진의 손을 꼭 잡으며 말하자 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종욱도 안심한 채 그때부터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다친 사람들을 데려가서 치료를 시작하도록 하지. 모두 서두르게. 횃불을 밝히고 다친 사람들을 빠짐없이 안으로 데리고 들어오게.”

    “예, 가주님.”

    번을 서느라고 의가에 남아 있던 의생과 의녀들이 일제히 말하고 부지런히 움직였다.

    시비와 하인들도 그들을 도왔다.

    밤이라 일손이 부족했고 아진도 그들을 돕고 싶었지만 힘쓰는 일은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괜히 의심을 받을까 봐 그런 거였는데 대신 도종과 함께 아버지가 응급 처치를 하는 것을 지켜보며 필요한 것을 챙겨 주었다.

    아버지는 침을 놓고 지혈을 하고 통증을 완화한 후 상처를 봉합했다.

    “살릴 수 있을까요, 가주님?”

    의생이 조심스럽게 묻자 아버지가 사나운 눈으로 그를 보았다.

    “환자가 듣네. 어디서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인가. 지금 당장 사람들을 보내 하 의원을 불러오도록 하고 다른 의생과 의녀들도 최대한 불러올 수 있도록 하게.”

    “예. 가주님. 송구합니다.”

    아진은 가주가 왈패들을 살릴 수 있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거기에 맞춰서 공격해 두었으니 그러는 게 당연했다.

    내일부터는 다시 병상이 빼곡하게 들어찰 터였다.

    마침 건물 하나를 새로 의방으로 만들고 있었는데 그곳도 빈자리가 없이 다 들어찰 것 같아 아진은 내심 흐뭇했다.

    “도종이도 돕도록 해라.”

    “예. 아버지.”

    도종은 아직 나이가 어렸음에도 제 몫을 다하고 있었다.

    아진은 아버지가 도종에게 일을 맡기는 것을 보면서 도종에게 여러 기술이 숙련되도록 하려는 거라고 생각했다.

    비슷한 상처를 가진 사람을 한꺼번에 이렇게 많이 치료할 수 있는 기회도 흔치 않았다.

    의술을 수련하는 사람에게 이것은 천금과도 같은 기회였다.

    아진은 이것저것 모두 흐뭇해서 어느덧 어깨까지 들썩거렸다.

    그는 돌아다니면서 자기가 너무 심하게 베어 버린 사람들에게는 몰래 마나를 불어넣어 주었다.

    귀한 손님이 죽어 버리면 영 쓸모가 없어져서였다.

    “가주님. 의방에 병상이 부족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하지요?”

    “임시로 자리를 만들어야지 어쩌겠는가.”

    “예. 가주님.”

    원론적인 대답에 의생이 우물쭈물하며 나가는 것을 보고 아진도 조용히 그를 뒤따라 갔다.

    그리고 의방에서 치료를 받던 사람 중에 치료가 거의 끝나가던 사람들로 골라 마나를 불어넣어 몇 사람을 완치시켰다.

    다음날 회진을 돌다 보면 가주도 그들이 더 이상 병상을 차지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터였다.

    가주는 어느 정도 급한 처치가 끝나자 의방에서 환자들을 확인했다.

    서서히 동이 터오고 있었기에 회진을 일찍 하고 의방에서 내보낼 만한 사람들이 있는지 확인하려고 한 거였는데 전날 저녁까지만 해도 며칠은 더 치료가 필요했던 사람들의 맥박과 호흡이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온 것을 확인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서종욱은 희한하다고 생각하면서 환자들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환자들은 스스로도 몸이 나아진 것을 느끼고 있었기에 불만 없이 의방을 비울 준비를 했다.

    “과연 신의님이십니다. 이렇게 나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 했는데 전혀 아프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집으로 뛰어가라고 해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진은 정말로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의방의 인원이 대거 물갈이되면서 먼저 와 있던 혈천방 왈패들도 그날 의방을 떠나게 되었다.

    아진은 그들에게 따로 입단속을 시키지 않았다.

    그동안 자기들이 누구에게 당했는지 말을 할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절대 아진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것은 아진을 위한 게 아니라 자기들을 위한 일이었다.

    뒷골목 패거리들이 고작 다섯 살 난 아이에게 맞았다는 소문이 나면 누구건 그들을 업신여기고 그 자리를 노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 전에 그 말을 믿는 사람들이 있기는 할 것인지도 생각을 해 볼 일이었다.

    “앞으로는 산본의가에 절대 피해가 가지 않도록 얌전히 살겠다.”

    의방을 떠나면서 왈패들이 말했다.

    “혈천방으로 돌아갈 거예요?”

    “그래야지. 방주가 우리를 죽이려고 했다가 저 꼴이 났으니 우리에게는 기회가 아주 좋게 됐지. 앞으로 혈천방은 우리가 장악할 거다. 네가 아니었으면 우리가 죽었을 거다. 이제 제선문과는 손을 떼고 산본의가는 우리가 지키도록 하겠다.”

    말코가 자신 있게 말했다.

    아진이 밖에서 혈천방을 쓸어 버리는 동안 그들 사이에 결단이 내려진 듯했다.

    지금 혈천방의 다른 사람들이 심하게 부상을 당했고 자기들이 전력으로 우위에 있는 것 같다고 생각이 되더라도 어차피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상황은 다시 역전이 될 수도 있었다.

    그것은 오로지 아진에게 달려있다는 것을 알고 미리 아진에게 제안을 한 거였는데 혈천방이 어느 정도나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선문의 뒤에 남궁세가가 있다고는 하지만 안휘성에서 산본까지 그 거리가 얼마인가.

    그리고 정파를 표방하는 남궁세가가 자기들의 실체를 드러내고 손을 쓰기는 어려울 터였다.

    기껏해야 혈천방과 비슷한 규모의 방파를 준동해서 일을 도모할 텐데 그럴 거라면 말코의 제안도 상당히 그럴 듯 했던 것이다.

    “좋아요. 상인들에게도 너무 심하게 굴지 말고 보호세도 좀 내려 주고 행패 부리지 마요. 산본의가와 손을 잡으려면 그 정도는 해야 해요. 본가가 쓰레기와 손을 잡을 수는 없잖아요.”

    “…….”

    말코는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지만 아진의 말이 이어졌다.

    “혈천방의 인원이 많이 줄어서 보호세를 줄인다고 해도 각자한테 돌아가는 돈은 더 많을걸요? 적다고 생각되면 혈천방 인원을 제가 더 줄여줄 수도 있어요. 이 자리에서 바로 줄여줄 수도 있고요.”

    “아, 아니다. 절대 괜찮다. 그렇게까지 수고할 필요 없다. 암.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하겠다.”

    “아저씨들이 무슨 사업을 하는지는 상관하지 않겠지만 자기 발로 찾아오는 사람이 아니면 창루나 기루 같은 곳으로 억지로 끌고 가지 마세요. 사람은 짐승이 아니잖아요. 그러다가 천벌 받아요. 돈을 못 갚으면 차라리 정당한 일을 해서 벌어서 갚게 해요. 산본의가로 사람들을 데려오면 일자리를 만들어 줄 수 있을 거예요.”

    “그, 그래…… 그러자. 그러는 게 좋겠구나.”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에요. 산본의가가 혈천방이랑 손을 잡았는데 그 혈천방이 돈을 안 갚는 사람 가족들을 창루에 팔아버린다는 소문이 돌면 아저씨들을 창루에 확 갖다 그냥!”

    “어허. 안 그런다는데 그러는구나. 알았다. 알았단 말이다.”

    어린애가 못 하는 소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확 감정이 상할 뻔했지만 아진이 방주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고 있어서 인내심이 한없이 늘고 있었다.

    말코는 그 자리에 오래 있으면 각종 제약만 더 늘어나겠다고 생각한 듯 쓰윽 내빼버렸다.

    그래도 가주에게 인사를 하는 것만큼은 잊지 않았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