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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9화 (9/470)

제9화

9화

제선문과 손을 잡고 그들의 지원을 받고 있는 혈천방이라면 이 상황이 상당히 난처하고 애매하기는 했을 터였다.

그냥 독자적으로 왈패로서 뒷골목을 장악하고 거기에서 나오는 이익에만 만족했다면 모를까, 제선문에게 돈을 받아먹으면서 동시에 산본의가와도 잘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 아하하하…… 가주님의 아이들이 모두 신동이라고 하더니 상상력이 뛰어납니다.”

아진은 이제 비장의 무기를 꺼낼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우리 산본의가는 산본에서 제일가는 의가가 될 거예요. 제선문도 그걸 알 걸요? 제선문은 우리보다 앞서고 싶겠지만 의술로는 따라잡을 수 없다는 걸 알 거예요. 그러면 쉬우면서 악랄한 방법을 쓰려고 하겠죠. 의가 사람들을 다치게 하는 것 말이에요. 그러면 아저씨들에게 그 일을 시킬 텐데 만약에 아저씨들이 그 일을 맡으면 아저씨들도 우리 의방에 입원한 사람들처럼 될 거예요.”

아진의 말에 혈천방 왈패들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꼬마야. 귀엽다 귀엽다 했더니 네가 정도를 모르고 떠들어대는구나.”

그들 중 가장 연장자인 말코가 말하자 다른 사람들도 기세를 떨쳤다.

그러자 아진이 귀엽게 웃고는 그들 모두를 압도하는 살기를 순간적으로 방출했다.

온몸에서 솟구쳐나가는 매서운 살기는 극도로 광포해서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들로서는 참아낼 수가 없었다.

아진은 그 자리에 서종욱과 도종이 같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살기를 폭사한 후에 금방 거두어들였는데 그것만으로도 후유증이 남았다.

서종욱과 도종의 입에서 곧바로 피가 쏟아져나왔고 혈천방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모두가 내상을 입었지만 아진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아버지와 형이 입은 내상은 자신이 고쳐주면 되어서였다.

혈천방의 왈패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에 깜짝 놀라 서로를 바라보았다.

‘무형지기!’

정식으로 무공을 배우지 못한 그들은 그것이 말로만 듣던 무형지기인 것 같다고 생각하며 더욱 충격을 받았다.

아무리 그래도 무형지기를 뿜어낸 것이 고작 다섯 살짜리 아이일 거라고는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들의 지식으로 그 정도의 무형지기를 방출하려면 일갑자의 내공은 족히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무가의 아이도 아닌 의가의 아이가 그 나이에 그만한 내공을 갖고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서종욱도 그것이 아진이 벌인 짓이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혈천방이 검은 속셈을 가지고 온 거라고 생각하며 뒤늦게 그들을 경계했다.

말코는 그 자리에 계속 있다가는 결코 좋은 꼴을 보지 못하겠다고 생각하며 일어섰다.

그러고는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신경 쓰면서 진료실을 떠났다.

“아진아. 나는 네가 정말 걱정되는구나. 너는 너무 순진해서 네가 생각하는 걸 전부 다 말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만 세상에는 좋지 않은 사람이 정말 많단다. 이런 일이 계속된다면 나는 너를 진료실이나 의방에 들어오게 할 수가 없다.”

서종욱이 심각한 표정을 하고 말했다.

“죄송해요. 아버지.”

아진은 쪼르르 달려가 아버지에게 매달리며 말했다.

애교를 부려서 잘못을 용서받으려고 한 것은 아니고 그의 내상을 치료하기 위해 마나를 불어넣기 위해서 그런 거였는데 서종욱의 마음은 눈 녹듯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래. 우리 아진이는 아버지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지.”

아진은 아버지의 내상을 치유하고 내려와서 도종의 손을 잡았다.

마나가 손을 통해 도종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가요. 형님.”

“그래. 그런데 아버지가 하신 말씀은 꼭 새겨들어야 한다.”

“응. 알았어.”

서종욱은 나란히 나가는 두 아들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산본의가에 거대한 변화의 바람이 불어닥치려 하고 있었지만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를 세상에서 가장 용기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줄 아이들이 자박자박 걸어가는 것을 보며 서종욱은 기꺼이 변하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 * *

아진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잠자리에 와서 잘 자라고 인사를 해 주고 간 후에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산본의가에 대한 얘기가 이 정도로 흘러갔으면 제선문에서 손을 쓸 때가 됐지. 갑자기 돈줄이 끊기면 혈천방은 아쉬운 게 많아질 테니까 제선문에서 하라는 대로 할 거고.’

아진은 그들이 혈천방의 세 입원 환자를 노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들로 인해 요즘 산본의가에 신의가 있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고 있었고 환자들이 급속히 늘어나는 추세였다.

수많은 사람이 산본의가의 의생이 되고 싶다고 몰려드는 판국이라 제선문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그들이 눈엣가시일 터였다.

‘오늘쯤 오겠지.’

퇴원이 며칠 남지 않았으니 마음이 급할 것이다.

퇴원한 후에 다치거나 죽으면 왈패들이 왈패 짓을 하다 그런 거라고 소문이 날 테니 그들이 의방에 있는 동안 일을 벌여야 했던 것이다.

아진은 조용히 의방으로 향했다.

혈천방의 패거리들은 방 하나를 차지하고 그들끼리만 지냈다.

병문안을 온 자들이 돈을 더 줄 테니 그렇게 하게 해 달라고 해서 취해진 조치였다.

아진이 들어가자 그들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아진에게 죽을 정도로 맞아서 함부로 말을 놓지도 못하는데 어린아이에게 존대를 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제선문이 그동안 우리 산본의가에 대해서 내린 지시가 있을 텐데 그게 뭔지 말해 보세요. 이유도 없이 본가 사람들을 괴롭힌 건 아니잖아요? 본가 분들에게 산본의가를 떠나라고 말한 것도 이유가 있을 테고요.”

아진이 말하자 혈천방의 패거리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세 사람 모두에게 대답하도록 해 놓으면 서로 책임을 떠넘기며 대답을 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아진은 그중 한 사람을 콕 집어서 다시 말했다.

“염소수염 아저씨가 말해 보세요.”

지목당한 사람은 얼굴이 찡그려졌지만 일단 그렇게 된 이상 그냥 넘어갈 수는 없겠다고 생각한 듯 입을 열었다.

“내가 말했다는 건 절대 아무에게도 말해선 안 된다. 꼬마야.”

“알았으니까 말해 보세요. 시간이 없을 수도 있어요.”

그는 아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얘기를 시작했다.

“제선문의 뒤에는 남궁세가가 있는데 남궁세가는 산본에 상단 지부를 하나 내고 싶어 한다. 그렇게 해서 세가의 상단을 오대 상단의 반열에 올리겠다는 게 계획이래. 그러기 위해서 자금이 필요한데 제선문이 그 돈을 대주기로 한 모양이야. 너도 의가 아이니까 알겠지만 의료원만큼 돈을 벌기가 쉬운 곳이 없지 않으냐. 사기 치기도 쉽고. 산본의가가 그런다는 건 전혀 아니고…….”

그는 말을 하면서도 아진의 눈치를 보았다.

“그래서 제선문은 각 지부를 그 지역에서 제일가는 의가로 만들고 싶어 하는데 다른 곳에서는 이미 성공해 가고 있고 산본에서도 거의 성공해 가는 것 같았는데 산본의가가 계속 버틴 거야.”

그 말을 듣자 모든 것이 아귀가 맞아떨어지며 이해가 됐다.

그러나 혈천방 같은 작은 방파에서 남궁세가나 제선문의 세세한 사정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것은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러자 염소수염이 먼저 나서서 설명했다.

“다른 곳은 이런 세부적인 사정까지는 모르고 있을 거야. 우리가 알고 있는 건 우리 방주님의 누님이 하오문에서 높은 위치에 있어서야. 혈천방 내에서도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고.”

그제야 모든 것이 명쾌하게 맞아떨어졌다.

“저는 오늘 혈천방에서 여기를 공격할 거라고 생각해요. 오늘이 아니면 내일이나 모레가 되겠죠. 퇴원하기 전에 아저씨들을 죽이고 싶을 거예요. 그러는 게 맞고요.”

“그게…… 무슨 소리냐? 네 눈에는 우리가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우리는 가족보다 더 끈끈하게 맺어져 있다. 우리는 혈판장으로 서로 신의를 배반하지 않기로 약속을 한 사이라는 말이다.”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장한이 말하자 다른 사람들도 일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제선문에서 명령이 떨어져도 그 사람들이 혈판장 운운하면서 안 된다고 할 것 같냐고요.”

“……하지만.”

아진은 길게 설명하지 않은 채 창밖을 내다보다가 돌아왔다.

“칼은 가지고 계시죠?”

“물론이다.”

“저한테 빌려 주세요.”

“정말 우리 형제들이 우리를 죽일 거라고 생각하냐?”

“아저씨들은 어쩔 건데요? 제선문에서 특별히 다른 말로 협박을 하지도 않고 은자 몇 냥만 더 주겠다고 하면서 그러라고 명령을 내려도 할 것 같은데. 아닌가요?”

그들은 고민이 깊어지는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들이 어떻게 생각을 하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알게 될 터였다.

아진은 장한이 준 도를 가지고 방을 나왔다.

혈천방 놈들이 의방까지 돌아오고 나면 그때는 환자들에게도 피해가 갈 수밖에 없겠기에 그들이 산본의가 내부에 침입하기 전에 모두 해치우기로 했다.

바닥을 차고 도약해 담장 위로 올라간 아진은 그곳에서 놈들을 기다렸다.

기다란 구름이 느리게 흘러가다 마침내 달을 가린 순간, 어디선가 낮은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지금인가 보군.’

아진은 제 몸보다 훨씬 커다란 도를 어깨에 걸쳤다.

몸에 비해 큰 것이 조금 불편하기는 했지만 레이드를 하는 동안 늘 검을 갖고 다녔기에 칼이 있는 것이 훨씬 안심이 되었다.

아진은 어둠 속에서 집중했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바람을 가르며 몸을 날리는 것을 느꼈다.

마나를 내공으로 바꾸자 어둠 속에서 그들을 식별하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해졌다.

그들이 뿜어대는 살기를 느끼며 아진은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 너희가 그렇게 나와 줘야 나도 싸울 맛이 나지.’

일방적인 학살은 영 개운치가 않았다.

어차피 결과는 그렇게 되겠지만 그래도 방어를 하다 시작된 일인 것이 그나마 마음은 편할 터였다.

아진은 일어서서 그들을 기다렸다.

어둠 속에서 그의 안광이 번뜩였지만 혈천방에는 아진의 기세를 느낄 수 있는 정도의 수준에 이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동안 그들을 쓸어 버리려는 사람들이 나타나지 않았기에 지금까지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었을 뿐 조금만 큰 규모의 무림 세력이 작정을 하고 들이쳤다면 반나절도 되지 않아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곳이 혈천방이었다.

광풍에 휩쓸리는 낙엽처럼 그들이 몰려드는 것을 보고 드디어 아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신형이 도와 함께 날았다.

“웬 놈이냐!”

선두에서 지휘하던 자가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그러나 그 소리는 끔찍한 비명에 파묻혔다.

“으아악!”

“아악!”

바람을 가르는 파공성.

서걱-.

피가 사방에 흩뿌려지는 소리.

어둠이 내려앉은 곳에서 시야를 뺏긴 채 귀에 들려오는 생생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두려움이 시시각각 찾아왔다.

오금이 저려와서 왈패들은 더는 전진하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비명과 피가 비산하는 소리는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들려왔다.

“에이. 너무 무겁네. 그냥 주먹으로 하는 게 낫겠어.”

그것은 어린아이의 목소리였다.

아진이 그것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느낀 두려움은 그 순간 극에 달했다.

설마하니 지금까지 그런 일을 벌인 사람이 그렇게 어린 꼬마일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반로환동?’

아진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그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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