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8화
“그, 그, 그럼요. 그래야지요.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제가 눈에 뵈는 게 없어서 고명하신 분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산본의가의 분들에게 해를 끼쳤습니다. 당연히 사과를 드리고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많이 다치지는 않으셨으니 은자, 두…… 냥씩이면 될지…….”
짝눈의 말에, 그동안 혈천방 패거리에게 맞았던 사람들은 이게 웬 횡재냐는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은자 두 냥이면 4인 가족이 한 달 동안 생활할 수 있는 돈이었다.
“사람을 그렇게 때려놓고 너무 하시네.”
이미 몇몇 사람은 고개까지 끄덕이고 있었는데 아진이 말했다.
짝눈은 헛숨을 들이키고 더듬으며 말을 정정했다.
“다, 다…… 다섯 냥이면…… 은자 다섯 냥씩이면 괜찮을…… 까요?”
“그리고요?”
“그리고…….”
짝눈은 아진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몰라 머리를 굴렸다.
“아…… 이분들이 다치셔서 의가의 영업에 손해가 생겼을 테니까 의가에도 따로 은자 열 냐…… 아니, 스무 냥을 드리겠…… 서른 냥요?”
그는 아진의 눈치를 살피면서 아진의 표정이 풀어지기를 바라며 말했다.
이미 그에게 돈의 액수는 상관이 없었다.
눈을 감으면 아진이 자신의 무서운 형님들을 묵사발로 만들어 버린 모습이 떠올라서 어떻게든 해결을 보고 다시는 아진과 부딪히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의가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구경꾼들까지 이게 다 무슨 일인가 하며 눈이 휘둥그레진 채 짝눈을 보고 있었다.
그들은 설마하니 짝눈이 아진이 무서워서 그러고 있는 거라고는 상상을 하지 못했고 누군가에게 험한 꼴을 당해 겁이 나기는 한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그럼…… 저희에게 피해를 입으신 분들께 은자 다섯 냥씩 드리고 산본의가에 마, 쉰 냥을 드리겠습니다.”
그가 아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은자 마흔 냥이라고 하려다가 아진의 미간에 골이 파이는 걸 보고 쉰 냥으로 올렸다는 것을 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해야 마음이 편하시겠다면 그렇게 하세요.”
아진이 활짝 웃자 짝눈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은자 꾸러미를 꺼냈다.
“그, 그러면…… 산본의가 분 중에 저희를 본 적이 있는 분들은 이쪽으로 와 주시겠습니까?”
자기들에게 맞은 적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지는 못하고 완곡하게 말을 하자 의생과 의녀들이 쭈뼛거리며 그에게 다가갔고 하명준도 멋쩍어하며 가더니 은자 다섯 냥을 받았다.
“내 아들도 맞은 적이 있는데.”
“나도 맞았어요.”
“나한테는 돈도 뺏어갔으면서.”
구경꾼들 사이에서 대뜸 그런 소리가 나오자 짝눈의 눈이 무섭게 치켜 올라갔다.
지금 자기가 꼬리를 말고 있다고 호구가 납신 줄 알고 여기저기서 숟가락을 얹으려 하는 모습에 기분이 확 상해 버린 것이다.
그것은 아진도 마찬가지였다.
무임승차를 하려는 사람들은 아진이 가장 혐오하는 부류 중 하나였다.
짝눈의 눈길이 한 번 쓸고 지나가자 사람들은 다시 잠잠해졌다.
“그러면 저는 수레도 돌려주고 해야 해서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퇴원을 할 때쯤 찾아뵙는 것으로. 하하하…….”
그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형님들이 걱정되기는 했지만 아진을 빼고는 전부 다 착해 보여서 어차피 잘 돌봐줄 것 같고, 자기는 아진을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러세요. 소문 좀 많이 내주시고요. 저희 산본의가가 진료를 잘해요.”
아진이 활짝 웃으며 말하자 짝눈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앞으로 혈천방에서 칼빵 맞은 사람들은 무조건 여기에 와서 치료를 받으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더니 수레를 끌고 날 듯이 가버렸다.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이 사람들을 이렇게 만든 고인이 어느 분이신지는 몰라도 그분을 만나면 감사하다고 인사를 해야겠는데요?”
하명준이 말하자 다른 사람들도 이구동성으로 정말 그렇다고 했다.
“어느 분이신지는 몰라도 그분 덕에 은자 다섯 냥이 갑자기 생겨버렸네. 돈도 돈이지만 이제부터는 우리를 건드리지 않겠죠? 안심하고 다닐 수 있을 거라는 것만 해도 정말 좋아요.”
산본의가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진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서종욱만큼은 그들의 기쁨에 동참하지 못하고 아진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뒷골목 왈패들이라고는 하지만 그들이 피투성이가 돼서 실려 온 것을 봤으면 놀라는 것이 당연했다.
그 정도의 모습을 보면 어른이라고 하더라도 토악질을 할 수도 있었다.
아종은 억지로 버티는 모습이었지만 아진은 무서운 것을 참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게다가 혈천방의 왈패와 흥정을 했고 그러는 동안 왈패가 계속 아진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서종욱은 그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 이 녀석이 무슨 짓을 한 거지?’
서종욱은 아진이 제발 위험한 일에 휘말리지 않기만을 바랐다.
* * *
아진은 몰래 의방에 들어가 사람들이 누워있는 침상 사이를 다니며 그들의 상태를 살피면서 적절히 마나를 불어넣었다.
특히나 혈천방 왈패들은 특별히 관리를 했다.
그중 한 사람이 잠에서 깨어 있다가 아진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비명을 지르고 기절을 해 버렸는데 비명을 듣고 의생과 의녀들이 달려오는 바람에 아진은 침상 아래에 숨어 있다가 나와야 했다.
“앞으로 나를 아주 자주 보고 싶은가 봐요?”
의생과 의녀들이 돌아가고 침상 밑에서 나온 아진이 말했다.
“아니,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면 그렇게 반가워하지 마요. 못 본 척하라고요. 모르는 척하고.”
“네…… 명심하겠습니다. 반드시 그러겠습니다.”
아진은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리고 방을 나왔다.
아진은 의가의 살림살이가 조금은 편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그가 처소로 돌아가려 할 때 어디선가 도종이 달려왔다.
“아진이 너 약초 수업에 왜 빠졌어?”
도종이 아진의 어깨에 팔을 척 걸치며 물었다.
“아아. 약초 수업 있었어?”
“응. 너. 잘 한다고 자만하다가는 금방 실력이 뒤떨어지게 돼 있어. 그럴 때일수록 더 열심히 해야 해.”
“응. 형님.”
“아버지께서 너에게 무술 스승을 구해 주실 모양이야. 무술 스승이 구해지면 그때부터는 수련하느라 의술을 배울 시간이 없어질 테니까 시간이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배워 둬. 아진아.”
“무술 스승을 구해 주신대?”
“응. 혈천방에서 받은 돈이 있잖아. 그래서 의가의 호위 무인 겸 네 무술 스승을 구하실 거래.”
아진은 그 말이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고작 은자 쉰 냥 정도로 구하려면 삼류 무인 이상은 어려울 텐데 삼류 무인에게 배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아진 자신이 이미 SSS급의 힐러이자 딜러였고 누구도 범접하지 못하는 공격력으로 숱한 괴수를 쓰러뜨리던 사람이었는데 삼류 무인에게 배우려면 차라리 그 시간에 무공서를 독파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건 별로인 것 같은데.”
“왜? 삼류라고 해서 무시하는 거야?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아진아.”
도종은 의젓하게 아진을 나무랐지만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형님. 그러니까 형님이 좀 도와줘. 지금 당장 혈천방이 우리를 괴롭힐 것 같지도 않으니까 돈을 좀 더 모아서 더 나은 사람으로 구하면 어떻겠냐고 말씀드려줘. 나는 기왕이면 실력 있는 스승님에게서 배우고 싶어.”
“……그럴까, 그럼?”
아진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라 도종은 금세 흔들렸다.
당분간은 혈천방이 괴롭히지 않을 거라 의가에 무인이 급하게 필요할 것 같지 않다는 말도 맞는 것 같아서 도종은 결국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런데 내 동생이 언제부터 이렇게 말을 잘했지? 아까만 해도 혈천방 왈패에게 순식간에 돈을 뜯어내고.’
약초제서를 다 외운 것도 그렇더니 산본의가의 진짜 신동은 아진인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조용히 감탄하는 도종이었다.
* * *
짝눈과 함께 온 왈패들은 혈천방의 중간급이었고 그들이 입원해 있는 동안 또 다른 혈천방 왈패들이 병문안이랍시고 산본의가에 자주 드나들었다.
덕분에 산본의가는 특수를 누렸다.
나이가 들면 아픈 곳 없는 사람이 없는 법인데 특히나 그들처럼 몸을 험하게 굴린 사람들은 쑤시고 쓰린 곳을 달고 살았다.
싸우다 생긴 상처를 바쁘다고 방치한 사람도 한 둘이 아니었는데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의가에 온 김에 진료를 받으려는 사람이 늘었다.
시원찮은 의원이라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겠지만 다 죽어 가는 사람들을 살려놨다는 말을 듣자 이런 기회를 그냥 놓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가주가 진료를 하는 동안 도종과 아진은 그 옆에 나란히 앉아서 지켜보았는데 따로 의서를 읽는 것보다 그렇게 하는 게 훨씬 좋은 공부가 되었다.
아진은 그들 중에 큰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일찌감치 파악해 놓고 그때부터는 그들의 실력을 가늠해 보았다.
혈천방의 규모가 작지 않으니 그래도 전부 다 모아놓으면 그중에 무위가 괜찮은 사람이 하나쯤은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했지만 수확은 없었다.
거의 다 고만고만했고 아진이 탐낼만한 무위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아진은 혈천방이 제선문의 사주를 받고 움직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그들이 어떤 상황인지 궁금했다.
만약 아진이 어른이었다면 그러지 못했겠지만 지금은 고작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였다.
서도진은 마침 잘됐다고 생각하며 아진의 어린 모습을 이용해 뻔뻔하게 굴기로 했다.
“그런데 혈천방은 제선문과 손을 잡았다면서 여기에 오셔도 되는 거예요?”
아진이 묻자 혈천방 패거리들은 동시에 움찔했다.
“아진아. 그런 질문을 하면 여기에 계신 분들이 곤란하시지 않으냐.”
아진의 말이 당황스럽기는 서종욱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알고 있기는 했지만 이렇게 직접 물을 얘기는 아니라고 여겼다.
그러나 아진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아버지. 저는 이분들이 의심스러워서 그래요. 가만 보니까 이분들 중에는 특별히 큰 병을 가진 분은 없는 것 같은데 여기에 온 게 좀 이상하기도 하고요. 제선문에서 기회가 좋다고 생각하면서 병문안을 간 것처럼 꾸미고 산본의가 사람들을 해치라고 했을 수도 있을 것 같고 그게 아니면 입원해 있는 환자들을 다치게 하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아진아. 그건 도가 심하구나. 내가 너를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는데 그게 무슨 소리냐!”
서종욱이 냉정하게 꾸짖자 아진도 입을 다물었다.
“아진아. 아버지 말씀을 들어. 이러는 건 실례야.”
도종도 어른스럽게 아진을 나무랐다.
그러나 아진은 자기가 괜한 말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눈앞에는 혈천방의 능구렁이들이 앉아 있었지만 서도진이 살아온 생은 그들에 비해서도 결코 짧지 않았다.
아진은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고 그들 중 몇 사람이 아진의 시선을 제대로 받아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