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7화
혈천방의 막내인 짝눈은 그 상황을 감당할 심력이 없었다.
그는 무릎이 깨지도록 바닥에 주저앉아 두 손을 싹싹 빌었다.
“살려주십시오. 소협. 제발 살려주십시오. 제발 한 번만 살려 주시면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고 착하게 살겠습니다.”
“내가 네 말을 들을 필요는 없고. 너. 여기 있는 사람들 살려야지?”
“……네?”
짝눈은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면서 아진을 바라보았다.
“살려…… 주시겠다는 말씀인가요?”
“그럼. 나 착한 사람이야. 이 사람들 전부 데리고 산본의가로 가. 거기가 치료를 잘한대.”
“……네?”
“바보같이 뭘 자꾸 물어? 수레를 빌려서 거기다 이놈들 다 싣고 앞으로 반 시진 안에 산본의가로 가.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 건데 안 나타나면 대표로 네가 죽는 거다. 알았어?”
“예, 소협.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진을 보지도 않고 곧장 달려갔다.
“수레! 수레 어딨어! 수레 가진 놈 어딨어!”
아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돌아섰다.
“저…….”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혈천방 놈들에게 험한 일을 당할 뻔한 여자였다.
“이름이 뭐니? 어디에 살아? 나중에라도 꼭 은혜를 갚고 싶어.”
처음 보는 사람이 반말을 하자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누가 봐도 어린아이의 몸이라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은혜는 됐고 아픈 사람들 있으면 산본의가에 가서 치료받으라고 그래요.”
아진은 타타타탓 달려서 산본의가로 돌아갔다.
중환자가 셋이고 돈도 많은 놈들이다.
오늘 영업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병 주고 약 준다는 말을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겠는데 망해 가는 의가에서는 해 볼 만한 일인 것 같았다.
의가에 거의 다다르고서야 아진은 자신의 몸을 살펴볼 생각을 했고 온몸이 피에 젖은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어…… 혼나겠는데? 뭐라고 하지?”
그러고 있을 때 의가에서 나오던 의녀 선향화와 눈이 딱 마주쳐버렸다.
“아진아.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다쳤어? 응?”
그녀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달려와서 아진의 몸을 살폈다.
옷을 훌렁 걷고 상처가 없는지 살피는 그녀의 손이 간지러워서 아진이 몸을 배배 꼬았다.
“간지러워요. 그리고 이거 제 피 아니에요.”
“네 피가 아니면?”
“아. 오다가 누가 다쳐서 도와줬어요.”
“그런데 피가 왜 이렇게 튄 건데?”
의녀는 의녀였다.
다친 사람을 한두 번 본 게 아닌데 어린아이가 되는대로 거짓말을 한다고 순순히 넘어가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더군다나 선향화도 혈천방에게 위협을 당한 일이 있었다.
그때는 돈을 주고 도망쳤는데 혹시 그 썩을 놈들이 이 조그만 아이까지 때린 건가 해서 속이 타들어 갔다.
“그건…… 피한테 물어보셔야죠.”
아진은 의녀의 눈치를 보고 슬금슬금 도망치다가 나중에는 전력으로 달렸다.
“정말 괜찮은 거야, 아진아?”
잘 달리는 것을 보니 자기 피가 아니라는 말은 사실인 것 같아 그나마 안심이 됐다.
“가모님은 지금 진료소에 계시니까 바로 내원으로 가. 벗은 옷은 보퉁이에 싸서 진료소 세탁물 바구니에 넣어 두고. 약방에 갔다 와서 내가 빨게.”
“네. 감사합니다.”
잘 됐다고 생각하며 아진은 다다다 달렸다.
일이 술술 풀리는 것 같아 저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나도 빨리 씻고 손님 맞을 준비를 해야지.’
* * *
잠시 한산해진 산본의가에 수레를 끈 혈천방 짝눈이 나타났을 때 산본의가는 한바탕 들썩였다.
“저, 저 사람들이 왜 여기까지 온 거지? 이제는 막 나가기로 작정을 한 건가?”
하명준이 말하자 다른 의생과 의녀 중에도 짝눈을 알아보고 겁을 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진은 그 모습을 보고 자기가 제대로 먹잇감을 찾아낸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도대체 저 사람들 뭐죠? 자기들끼리 싸운 걸까요? 혼자서 세 사람을 저렇게 만들었으면…… 저 사람은 무림 고수 수준인 거예요?”
의녀들이 잔뜩 겁을 먹고 소리를 죽인 채 물었다.
처음에는 짝눈을 보고 그들이 산본의가를 뒤집어엎으려고 온 건 줄 알았다가 나중에 수레에 실린 이들의 상태를 알아보았다.
서종욱은 근엄한 표정을 짓고 짝눈을 기다렸다.
사람들의 말을 듣고 그는 수레를 끌고 온 자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마음 같아서는 그들이 죽어 가도록 내버려 두고 싶었지만 사람을 살리기 위해 의술을 배웠고 그 의술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시행해야 한다고 가르침을 받았다.
서종욱은 얼굴이 찌푸려지는 것까지는 어쩌지 못한 채 짝눈을 맞았다.
“의, 의원님…… 의원님. 제발 저희 형님들을 살려 주십시오.”
짝눈은 벌벌 떨리는 음성으로 서종욱의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눈물까지 글썽이며 말했다.
서종욱은 짙은 혈향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지린내를 맡았다.
슬쩍 짝눈의 바짓가랑이를 보자 오줌을 지린 자국이 있었다.
처음에는 그자가 수레에 실린 사람들을 그 지경으로 만든 거라고 생각했다가, 시간이 지나며 그들을 그렇게 만든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상에 천을 깔고 환자를 눕혀라.”
이미 와서 진료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 중 누구도 갑자기 들어온 자들만큼 급하거나 위중하지는 않았기에 서종욱의 처분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저 사람들 혈천방 아니야?”
“그러게. 어제도 보호세를 내라고 객잔 집기를 때려 부수는 걸 봤는데. 어쩌다가 저렇게 된 거래?”
“어느 고인(高人)이 우리 마을에 오신 걸까? 살다 보니 이런 일도 다 생기네?”
“쉿. 조용히 해. 저 사람이 듣고 있잖아.”
“저 사람도 정신이 반쯤 나간 것 같은데? 바지가 저런 걸 보니 오줌을 지린 것 같은데.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설치더니 벌 받은 거지.”
“그런데 저런 사람들을 꼭 살려야 하는 건가? 그냥 죽게 내버려 두는 게 더 좋은 것 아니야?”
“조용히 하래도 그러네. 지금은 저러고 있다가도 나중에 정신 들면 누가 그런 소리를 했냐고 하면서 뒤지고 다닐지 몰라.”
사람들은 목소리를 낮춘 채 불만을 이어갔다.
진료를 받으러 온 사람들이 평상 주위로 둥그렇게 모여 떠들어대는 동안 서종욱은 의원과 의생들에게 부지런히 지시를 내렸다.
환단 몇 개가 각자의 입 속으로 들어갔고 의녀들은 신선한 약초를 가져와 그것을 빻아서 상처에 붙였다.
서종욱은 맥을 짚고 각자의 상태에 따라 시침을 했고 그러는 동안 하명준이 계속 그를 보조했다.
자신을 죽일 듯이 때린 사람들을 치료하는 것이 유쾌하지는 않을 것 같았지만 그는 서종욱의 가르침을 충실히 행했다.
의술을 베푸는데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아진은 이해가 안 간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그들을 좋아했다.
도종은 어른들 틈새에 끼어서 아버지가 상처를 치료하는 모습을 열심히 바라보았다.
자기가 장차 산본의가를 물려받아 그런 일들을 해내야 한다고 생각해선지, 눈살이 찌푸려지는 광경을 보고서도 침착하게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진은 의녀들이 빻은 약초를 세 사람 머리맡에 나눠서 가져다 두기도 하고 필요한 천을 옆에 놔 주기도 하면서 부지런히 환자들 사이를 오갔다.
중증의 응급 환자 세 사람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손이 부족하기도 했지만 그 틈을 노려 혈천방 패거리들의 몸에 손을 대고 슬쩍슬쩍 마나를 밀어 넣었다.
처음에 맥박과 호흡이 불안정하던 사람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맥이 잡혔는데 그것은 전부 아진의 덕분이었다.
그러나 구경하던 사람들은 그게 서종욱의 치료 덕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다 죽어서 온 사람들을 살려내시네. 신의님이 여기에 계셨어.”
“나도 꼼짝없이 죽겠다고 생각했는데 혈색 돌아오는 것 좀 봐. 뼈가 부서져서 움푹 꺼졌는데도 아프지 않은 모양이야. 사람들이 산본의가, 산본의가 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사람들은 진심으로 경악하고 있었다.
그것은 의가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가주의 실력이 그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연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짝눈은 그때까지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훌쩍거리고 있다가 사람들 틈새에서 부지런히 오가는 아진을 발견했다.
“헙!”
그는 사신을 발견한 것처럼 부들부들 떨었다.
도중에 아진과 눈이 마주쳤는데 아진은 짝눈을 보고 귀엽게 웃었다.
의가에 찾아온 환자에게 보이는 직업적인 미소였는데 짝눈은 줄줄 싸는 것도 모르고 다시 한번 바지를 적셨다.
자기 손으로 세 사람을 거의 시체로 만들어 놓고 그 사람들을 치료하며 웃는 걸 보니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치료가 끝나자 서종욱이 짝눈을 불렀다.
그의 손에는 처방전과 청구서가 같이 들려 있었다.
“위중한 상태로 와서 급히 치료하느라 일일이 설명을 하지는 못했소. 허나 반드시 살려달라고 해서 그에 따라 치료했고 과다하게 진료를 하지는 않았소. 이해가 되지 않는 게 있으면 지금 말 하시오.”
“저는 불만이 없습니다. 대인. 돈은 바로 지불하겠습니다. 모자라는 것은 지금 가서 가져올 것이니 치료만 잘해 주십시오.”
짝눈은 청구서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말했다.
그는 서종욱의 옆에 붙어 서 있는 아진이 신경 쓰여서 죽을 것만 같았다.
“전부 해서 은자 서른 냥이오. 완치를 위해서는 입원 치료를 받는 것을 권하오. 정확한 진료비는 퇴원할 때 나오겠지만 은자 스무 냥은 더 나온다고 봐야 할 거요.”
“예. 지금 은자 쉰 냥을 드리겠습니다. 대인.”
혈천방은 혈천방이었다.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은 빈말이 아니었고 혈천방에게 은자 쉰 냥은 점포 몇 군데에서 보호세를 뜯으면 다 충당이 되고도 남는 돈이었다.
그는 곧바로 전낭에서 은자 꾸러미를 꺼내 서종욱에게 내밀었다.
서종욱이 허우천을 바라보자 그가 돈을 받았다.
“저 돈이 다 어디에서 나왔겠어? 상인들에게서 보호비라며 뺏은 거잖아?”
몇몇 사람들이 불만 섞인 소리를 했지만 짝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즉각 눈에 불을 켜고 욕설을 퍼붓거나 멱살잡이를 했을 테지만 그는 계속해서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
오늘 안에 정신이 다시 돌아오기는 할지 그것도 의문이었다.
“그런데 아저씨. 진료비는 진료비고 혈천방 사람들이 저희 의가의 의원님을 때리셨다는데 그 손해 배상은 따로 하셔야 하지 않아요?”
계산이 끝나갈 즈음 아진이 말하자 짝눈은 다리에서 힘이 풀려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뻔했다.
하명준은 깜짝 놀라서 아진을 바라보았다.
혈천방에 이 사람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사람들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는 모르지만 혈천방을 너무 건드리는 건 좋지 않았다.
그런데 아진이 혈천방 패거리를 보고 화가 나서 그런 거라는 생각이 들자 걱정이 된 것이다.
하명준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하려 할 때 아진이 표정을 지운 채 짝눈을 바라보았고 짝눈은 입을 벌린 채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