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6화
환자 중에 통원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전각 하나를 비워 입원 치료를 시작한 이후 산본의가를 찾는 환자는 비약적으로 늘었다.
서종욱은 전부터 입원 치료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몸 상태가 나빠지며 그 일을 추진할 수 없어 포기하고 있었는데 머리가 맑아지고 시력도 회복이 된 후 과감하게 그 일을 시도했다.
그는 의원과 의생들을 데리고 정기적으로 회진을 했고 산본의가의 아침은 이제 회진으로 시작이 되었다.
“하 의원은 아직인가?”
회진 준비가 끝나도록 의원 하명준이 보이지 않자 서종욱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예. 가주님. 하 의원님이 늦을 사람이 아닌데 이상합니다.”
“나도 그게 걱정이 되는군.”
서종욱은 일단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과 함께 회진을 돌았다.
그는 회진을 다 돌기 전 하명준이 헐레벌떡 뛰어들어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하명준은 회진이 끝나도록 의가에 나타나지 않았다.
서종욱은 사람들을 모아두고 물었다.
“혹시 요새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왈패들의 습격을 당한 사람이 있었는가.”
그러자 의생 두 사람이 천천히 손을 들었다.
서종욱의 입에서 침음성이 나왔다.
“혹시 그자들이 제선문의 사주를 받은 것 같던가.”
“산본의가에서 나오라고 말하면서 그러지 않으면 며칠 내에 다시 보게 될 거고 그때는 손을 못 쓰게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혼자 다니지 않고 꼭 여럿이 함께 다니고 있습니다. 가주님. 가능한 주변에 사람들이 많을 때 다니려고 하고 있고요.”
서종욱은 설마하니 그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 충격 어린 모습이었다.
“하 의원의 집에 가 봐야겠군.”
서종욱이 서두르는 동안 문이 열리고 옷 여기저기에 피가 묻은 채로 하명준이 들어왔다.
“늦었습니다. 가주님. 죄송합니다.”
그는 오는 길에 무슨 일을 당했는지 뻔했는데도 그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은 듯 급히 달려와 서종욱의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하 의원. 무슨 일인가. 습격을 당했는가.”
“어떤 불한당 놈들이 시비를 걸어서…… 별것은 아니었습니다. 돈을 달라고 하는데 은자 두 냥이 있어서 그걸 줬더니 사라졌습니다. 걱정하실 일은 아닙니다.”
하명준은 제선문에서 사주한 일이라고 말해도 가주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말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기도 했다.
서종욱은 하명준이 당한 일이 안타까우면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관에 말을 한다고 해도 현령은 이미 제선문에 완전히 넘어가 있어서 오히려 산본의가에 잘못이 있다고 뒤집어씌울 수도 있었다.
그런 일은 흔하게 일어났다.
억울한 일을 풀어 달라고 고발을 하면 죄 없는 사람을 무고했다며 오히려 고발한 사람을 끌고 가 고신을 가하고 투옥하는 일도 빈번했던 것이다.
서종욱은 그 자리에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환자들의 진료를 시작했다.
산본의가에 환자가 늘고 의가가 부흥하는 것은 좋았지만 이런 식으로 외부에서 압력이 가해진다면 사상누각에 불과했고 의가가 흥한다며 마냥 좋아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서종욱의 시름은 더욱 깊어지는 것 같았다.
조만간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될 듯했다.
외부에서 지내는 사람들을 의가 안에서 지내게 하는 식으로라도 대책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여러모로 방법을 강구했다.
“산본에서만도 의원과 의생이 공격을 당해서 문을 닫은 의료원이 세 군데라고 합니다. 본가만의 일이 아니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가주님.”
의생들이 서종욱을 보며 그를 위로하려는 듯이 말했는데 그 말이 더 서종욱의 근심을 키웠다.
아진은 도종과 함께 그들이 회진할 때부터 따라다니면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모두 들었고 이 일을 그냥 내버려 둘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 의원님. 통증을 다스리는 차래요. 어머니가 가져다드리라고 했어요.”
회진이 끝나고 하명준이 혼자 있을 때를 노려 아진은 어머니의 심부름을 하면서 은근슬쩍 그 옆에 앉았다.
“고맙구나. 아진아.”
“진료하시느라고 힘드실 텐데 제가 팔 좀 주물러 드릴까요?”
그러면서 아진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하명준의 팔을 이미 주무르기 시작했다.
몽둥이에 두들겨 맞고, 왈패들이 마구 휘두른 칼에 곳곳을 벴는데 그런 건 아는 바 없다는 듯이 환부를 꾹꾹 주무르는 아진 때문에 기함이 터지려고 했지만 희한하게도 통증이 오래지 않아 사라졌다.
“차가 효과가 있는 것 같아요. 의원님?”
아진은 하명준이 자신을 이상하게 여길 것 같아 선수를 쳤다.
“응? 응. 그런 것 같구나. 무슨 차라고 하시던?”
하명준도 그게 차 때문일까 하며 금방 아진에게 넘어간 채 물었다.
“이거 되게 비싼 약초 이파리를 달여서 만드신 거래요. 아주 귀한 건데 의원님은 본가에 없으면 안 되는 소중한 분이라서 특별히 달인 거래요.”
“신기하구나. 가모님께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려야겠다.”
그러는 동안에도 아진은 조물거리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의원님. 누가 이런 거예요? 저도 가끔 본가 밖으로 나가는데 누가 이랬는지 알아야 멀리서 보고 피하잖아요.”
“그렇기는 하지. 미령에서는 아주 유명한 놈들이다. 자기들은 혈천방이라고 부르는데 사람들은 광견파라고 하지. 초승달 위에 혈자가 그려진 건을 두르고 다녀서 한눈에 보면 알 수 있을 거다. 그놈들은 무조건 피해야 해.”
“혹시 다른 의생님이랑 의녀님들을 공격한 놈들도 다 그놈들이에요?”
“응. 미령의 뒷골목은 그놈들이 장악하고 있거든. 제선문의 꼬임에 넘어갔을 거야. 제선문은 아무 곳에나 돈을 뿌리면서 자기들의 명령을 따르게 하지. 그 사람들을 보면 정말 조심해야 한다. 아진아. 알았지?”
“네. 의원님.”
아진의 손에서 힘이 빠지자 하명준은 아진이 이제 귀찮아진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그래도 대견하다고 여기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가주님도, 가모님도, 그리고 아종이랑 아진이도 이렇게 친절한데 내가 어떻게 본가를 떠나겠느냐.”
“본가를 떠나래요?”
아진이 눈을 초롱초롱 밝히며 묻자 하명준이 입을 다물었다.
괜한 소리를 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그런 협박을 듣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걸 안다고 해도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혈천방도 관의 눈치를 보기는 해야 할 거라는 생각에 그냥 버티는 것뿐이었다.
“너무 걱정은 하지 말자. 환자가 늘고 있으니까 우리도 호위 무인을 고용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르지. 삼류라도 무인이 한 명 있으면 왈패들이 이렇게 설치지는 못할 거야.”
“네. 의원님.”
아진은 그대로 일어서서 자박자박 걸어나갔다.
하명준은 아진의 뒷모습을 보고 웃다가 문득 자기가 전혀 아프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 도대체 이게 무슨 찬데 이러지? 가모님을 뵈면 여쭤봐야겠어. 이 정도 효능이 나타나는 약초라면 보통 귀한 게 아닐 텐데 나 때문에 괜히…….’
아진의 치유를 받고 하명준의 충성심은 더욱 깊어졌다.
* * *
산본의가에 한 번 환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아진은 자기가 사라진 걸 들키지 않고 밖에 나갔다 올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진은 하명준의 집을 알고 있었고 그곳으로 가면 혈천방 놈들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진의 생각은 적중했고 악취를 풍기는 쓰레기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쓰레기들이 이미 쓰레기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고. 요년 봐라. 아주 탱탱한 게 제대로 물이 올랐네. 너, 이 집에 살면서 고기 먹어본 적 없지? 네 아비와 어미가 저 모양인데 너를 제대로 먹이고 입히기는 했겠냐? 창루에 가는 걸 무섭게 생각할 것 없다. 거기에 가면 좋은 오라버니들이 너를 귀여워해 줄 거고 고기도 매일매일 먹을 수 있어. 얼굴에 살이 올라야 좋아하거든.”
“아악, 놔 주세요. 제발 저 좀 놔 주세요. 아버지. 어머니. 살려 주세요!”
“놔라. 이놈들! 하늘이 무섭지도 않으냐!”
딸의 절규에 나이든 아버지가 고함을 지르며 왈패에게 매달렸다.
아진은 산본의가 밖으로 나와본 적이 많지 않았다.
나온 일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이런 장면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웬만했다면 생각을 하고 움직였을 텐데 더러운 손이 여자의 몸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구역질이 치밀어 그대로 달려나갔다.
아진이 사전에 아무런 경고도 없이 달려가 옆구리에 발을 꽂아 넣자 놈의 몸이 바닥에 처박혔다.
“……웬 놈이냐!”
그 옆에서 시시덕거리던 놈들은 갑자기 나타난 아진을 보고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디서 무림 고수가 나타난 건가 했는데 눈앞에 나타난 아이가 이제 겨우 다섯 살 정도밖에 되지 않은 꼬마였으니 당황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아진은 그들의 머리에 두른 건을 보고 있었다.
“네놈들이 혈천방이냐?”
“……뭐?”
바닥에 처박힌 놈은 금방이라도 일어나 화를 내고 싶었겠지만 온몸을 얻어맞아 적어도 한 달은 넘게 자리 보존을 해야 할 터였다.
옆에 있던 세 놈은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화는 나는데 아진이 해 놓은 것을 본 후라 선뜻 움직일 수도 없었다.
“누, 누군데 이러느냐. 왜 상관도 없는 일에 끼어드는 거냐는 말이다!”
불그죽죽한 무복을 입은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 일에는 상관이 없는데 너희하고는 상관이 있거든.”
“누구냐. 너는. 우리는 너를 본 적도 없다. 도대체 누군데 이런 짓을 하는 거냐!”
“왜 이러지? 내가 선빵을 날렸잖아. 참지 마. 왜 참아? 그런 사람들 아니지 않아?”
아진이 히죽 웃자 혈천방의 패거리들은 그 자리에서 오줌이라도 지릴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태어나서 이렇게 소름 끼치는 기분은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동안 벽촌 뒷골목에서 왕 노릇을 하면서 변변치 않은 주먹과 머릿수를 믿고 행세를 해 왔다.
그것으로 족했다.
그런데 갑자기 하루아침에 뭔가가 잘못된 듯했다.
말도 안 되게 어린 꼬마 놈이 나타나서 일격을 휘두르는데, 일어난 일은 그것뿐인데 무서워서 죽을 것 같았다.
“참지 말라는데 참 말을 안 듣네.”
아진의 입에서 악귀 같은 말이 튀어나오더니 신형이 사라지고 색과 형체가 뭉개졌다.
사라진 아진이 어디로 간 건지 눈이 쫓아갈 틈도 없이 회색 무복을 입은 남자가 비명을 지르고 나뒹굴었다.
“으아아악!!”
그 소리가 어찌나 끔찍했는지, 남은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허리춤의 칼을 빼 들었다.
“어어. 칼을 빼면 나도 더는 봐 줘가면서 할 수가 없는데? 나를 죽이려고 한 것 맞지? 이 조그만 나를. 아주 못됐네. 이런 경우는 가중처벌이야.”
미칠 노릇이었다.
여전히 형체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무시무시한 주먹이 적의인의 가슴팍에 정통으로 들어왔다.
‘흡!’
소리를 지르려고 했지만 비명이 목구멍 속으로 도로 말려들어 가는 것 같았다.
뻐걱 하는 소리가 너무 요란하게 들렸다.
심장을 보호하던 단단한 뼈가 그대로 부러지고 조각나며 장기 곳곳을 찌르자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이제 아저씨 하나 남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