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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5화 (5/470)

제5화

5화

그런 서종욱을 보며 아진은 오늘 밤 그를 치료해 주기로 굳게 마음을 먹었다.

“오늘은 아버지랑 같이 자자. 아진아.”

서종욱은 밤새 아진을 간호할 생각으로 아내에게는 다른 방에서 편안히 자라고 말했다.

양주은은 자기도 같이 자면서 번갈아 가며 간호를 하겠다고 했지만 이번에는 아진이 나서서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 손이 따뜻해서 아버지가 문질러 줘야 배가 안 아파요. 아버지가 손을 떼면 바로 아파요.”

그러자 양주은도 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아진의 뜻대로 그날 밤 아진은 아버지와 함께 잠을 잘 수 있었다.

서종욱은 아진의 배를 문질러 주다가 얼마쯤 시간이 지나자 작게 코를 골면서 먼저 잠이 들었다.

아진은 그의 얼굴 위로 손을 가져가서 천천히 흔들며 그림자를 만들어 보았다.

그러고도 서종욱이 눈을 뜨지 않자 수혈을 짚었다.

이곳에서 깨어난 후에 수백 권의 의서가 서가에 빽빽이 꽂혀 있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기겁했지만 나중에는 그 지식이 자기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몰래몰래 떠들어 보고 익혔는데 그중에서도 혈 자리는 전부 외워 두었다.

단순히 혈 자리를 안다고 해서 지금처럼 수혈을 짚어 깊이 잠들게 할 수는 없지만 아진에게는 마나가 있었고 그것을 내공으로 전환하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SSS급 힐러의 막대한 마나가 힘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아진은 서종욱이 확실히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그의 머리에 마나를 흘려 넣기 시작했다.

거의 10분이 지나고야 마나의 흐름이 멈췄다.

처음 종양이 보인 것은 갑자기 벌어진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자신의 의지로 그것을 보았다.

‘사라졌다!’

마나의 흐름이 멈춘 후, 치료가 성공한 것 같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정말 종양이 사라진 것을 보자 가슴이 뛰었다.

아진의 얼굴에 웃음이 지어졌다.

‘다행이네. 정말 잘 됐어.’

아진은 흐뭇한 얼굴로 수혈을 풀어 주고 서종욱의 옆에서 편하게 잠을 이루었다.

내일부터는 완전히 다른 날들이 펼쳐질 거라는 기대감에, 잠이 든 아진의 얼굴에도 연신 웃음이 번져갔다.

* * *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양주은이 들어왔다.

그 소리에 서종욱이 놀란 듯 눈을 뜨고 아진을 보았다.

아이가 아픈데 자기는 정신없이 자고 있었다는 생각에 죄책감마저 느끼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 모습을 본 양주은이 희한하다는 듯이 웃었다.

“상공. 상공이 이렇게 밝은 표정으로 일어나는 건 오랜만에 봐요. 몇 년 만에 보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게 무슨 소리요?”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늘 머리가 아프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늘 얼굴을 찡그리고 두 손으로 머리를 꾹 누르면서 힘들어했고요.”

“……?”

서종욱은 아내의 말을 듣고 지금은 정말 머리가 전혀 아프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구려. 이렇게 개운하게 일어난 건 정말 오랜만인 것 같소.”

그러면서 그는 손가락을 움직이고 팔을 휘휘 저어 보았다.

움직임이 편안했다.

아주 오랫동안 그는 그런 기분을 느끼지 못했다.

머리 위에 무거운 돌을 올려놓기라도 한 것처럼 늘 머리가 무겁고 아프더니 그 두통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러다가 그는 우선 아진을 보자고 생각했다.

“아가야. 우리 아진이. 지금은 좀 어떻지?”

그러자 아진이 눈을 꾹 감고 고개를 저었다.

좀 더 자고 싶다는 것 같아서 서종욱은 웃으며 이불을 덮어 주었다.

“아진이도 오늘은 괜찮은 것 같아요. 상공. 상공 손이 약손인가 봐요.”

“그런가 봅니다. 하하하.”

두 사람이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소리를 들으면서 아진은 곤하게 잠을 이루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하는 이야기는 전부 들었는데 양주은이 하는 얘기를 들으면서 서종욱이 그동안 뇌종양으로 고생해 왔다는 것을 더욱 확실히 알 수가 있었다.

“나는 먼저 나가볼 테니 부인이 아진이가 일어날 때까지 옆에 있어 주시구려.”

“예, 상공.”

아진은 서종욱이 왜 그렇게 서두르는지 알 것 같았다.

아마도 시침을 연습해 보고 싶을 것이다.

지금의 그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 * *

산본의가에 다시 환자가 늘었다.

가주가 다시 진료를 시작했다는 소문이 돌면서였다.

다른 의원이 아무리 열심히 진료한다고 해도 산본의가에 찾아오는 사람은 가주에게 진료를 받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그가 뒷전으로 물러나고 다른 의원에게만 치료를 맡겼는데 이제는 그러지 않았다.

서종욱은 갑자기 머리가 맑아지고 전과 같은 이상 증상도 사라진 것을 신기하게 여기며 진료를 시작했다.

눈앞의 사물이 여러 겹으로 겹쳐 보이는 증상도 사라져서 시침을 하는데도 문제가 없었다.

“역시 산본신의님이십니다.”

서종욱에게 치료를 받고 몸이 나은 사람들은 듣기 좋은 말을 늘어놓았다.

사람들은 참 단순했다.

조금만 좋으면 금방 칭찬을 하고 존경하는 것처럼 말하면서 조금만 의심이 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쉽게 그 말을 뒤집었다.

서종욱이라고 그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환자가 늘고 산본의가의 명성이 다시 높아져서 기분이 좋았다.

이런 식으로 좀 더 환자가 늘어난다면 빚도 갚고 아내의 패물을 팔지 않고 아진의 무술 스승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아 더욱 들떴다.

“그런데 가주님. 요즘은 모든 일이 다 잘 돼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산본의가에 가면 모든 병이 다 낫는다는 소문이 산본에 퍼져가고 있대요. 그런데 사실 이런 일은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그 말을 한 사람은 의원 하명준이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의생과 의녀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들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아무리 좋은 약을 처방하고 치료 방법이 잘 됐어도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고 체력이 약한 사람도 있어서 회복되는 기간이 다를 수밖에 없는데 산본의가에 가면 사흘에서 닷새 안에는 반드시 낫는다는 말이 있대요. 그런데 그런 말들이 전부 본가에 다녀간 환자들이 하는 말이래요.”

“좋기는 한데 그 말을 듣고 왔다가 낫지 않았다고 행패를 부리는 사람들이 생겨날까 봐 걱정되기는 해요. 그렇지 않아도 제선문에서는 본가에 꼬투리 잡을 기회만 노리고 있을 텐데요.”

서종욱 역시 그런 생각을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아진은 천하태평이었다.

그는 중환자가 오면 그들의 환부를 살폈다.

서종욱의 종양이 보인 후 집중을 하면 환부가 보였다.

그것은 내공으로 전환할 필요도 없이 서도진에게 있는 마나로 가능했는데 환자의 상태가 심각하거나 병이 많이 진행돼 있으면 마나가 급격히 소모됐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도 중증인 환자들에게만 시도했고 일단 그들이 오면 주위를 알짱거리면서 다가가 친한 척도 하고 손도 잡아보고 하며 마나를 불어넣었다.

감기처럼 그냥 놔둬도 낫는 병은 환자 자체도 그럴 거라는 것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기에 병이 나은 후에도 그렇게 열정적으로 소문을 내지 않지만 중증으로 고생을 하던 사람들은 극심한 통증을 참고 참다가 오는 것이라서 그 통증이 사라지면 영업 사원이 된 것처럼 산본의가를 열심히 홍보했다.

그리고 지금 그 홍보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는 거였다.

“좋은 소문이 나면 좋은 거지. 미리 겁을 먹지는 말자고.”

서종욱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지었다.

“산본의가에서 의생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저를 찾아와 묻는 사람도 많습니다. 가주님.”

“저도 그래요. 의녀가 되려면 뭘 해야 하냐고 물으려고 집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요새 많아졌어요.”

의생과 의녀 중에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숙련된 사람들에게는 급봉을 주지만 일을 배우는 단계의 사람들에게는 의가에서 돈을 받기에 그것이 다 의가의 수입으로 이어졌다.

“우리는 크게 가리지 않는다고 말을 하도록 하게. 가릴 처지도 아니고 말이네.”

서종욱이 말하자 모두 이미 그렇게 말했다며 즐거워했다.

오랜만에 의가에 활기가 돌자 그들의 얼굴도 밝아졌다.

잠깐의 휴식 시간이 지나고 다시 환자들이 모여들었다.

사람들도 볼 일을 마치고 오는 것이라 정해진 시간에 환자가 갑자기 몰리곤 했다.

아진은 도종이 의생 허우천에게 시침을 배우는 동안 옆에서 기웃거렸다.

도종은 이른 나이에 의서를 읽기 시작하고 시침도 어느 정도 할 줄 알아 신동 소리를 듣고 있었지만 어느 날부터 아진이 그런 도종을 따라잡았다.

그게 자기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으면 그렇게까지 관심이 가지 않았을 텐데 심심해서 따라 한다는 심정으로 하다 보니 부담 없이 쉽게 배울 수가 있었고 재능도 있었다.

도종은 아진이 자기를 금방 따라잡는 걸 보면서도 질투도 하지 않고 그저 예뻐서 어쩔 줄을 몰랐고 허우천은 산본의가의 앞날이 밝다면서 흐뭇해했다.

“약초를 아는 것도 아주 중요해. 내가 준 약초제서는 계속 읽고 있지. 아종아?”

“그럼요.”

허우천의 말에 도종이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내가 하루에 약초 효능을 10개씩 외우라고 했는데 그것도 잘하고 있느냐?”

“그, 그럼요.”

도종의 목소리가 어째 기어들어 갔다.

“저는 다 외웠어요.”

아진이 그때 자신만만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자 허우천이 웃음을 터뜨렸다.

약초제서에는 잘 사용되지 않는 한자도 많았다.

그래서 허우천은 도종에게 약초의 효능을 외우라고 시키면서도 거기에 나오는 한자 중에 도종이 모르는 것이 태반일 거라고 생각했다.

신동이라고 칭찬이 자자한 도종도 그 한자의 음과 뜻을 찾기 바쁠 텐데 아직 한참 어린 아진이 자신 있게 외치니 그저 어린아이의 치기라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 우리 아진이가 그랬구나. 그러면 아종에게 자극이 되게 아진이가 말을 해 보도록 하자. 우선 위장병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되는 약초를 다섯 가지만 대 보아라.”

“넓은 잎 구절초, 선모초, 구일초…….”

아진의 말에 허우천이 웃음을 터뜨렸다.

모두 구절초의 다른 이름들이었던 것이다.

“아진이가 장난을 하는구나.”

그러자 아진도 따라 웃고 이번에는 약초제서에 기록된 약초 중 위장병에 효능이 있는 약초를 줄줄 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웃던 허우천의 얼굴에서 점점 웃음기가 사라졌다.

수준이 어느 정도가 되면 잘한다, 잘한다 할 수가 있는 법이지만 이건 허우천이 아는 범위를 뛰어넘다 보니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나중에는 아진이 하는 말이 맞는 건지 틀린 건지 알 수가 없어서 잠시 기다리라고 해 놓고 자신의 약초제서를 가져와서 아진이 말하는 것들을 찾아가며 확인을 해 나갔다.

그도 그 많은 약초의 효능을 다 외우고 있지는 못했던 것이다.

“아진아. 어떻게 이걸 다…….”

허우천은 기막히다는 표정으로 아진을 바라보았다.

아진은 그저 씨익 웃기만 했다.

시간이 남고 잠이 오지 않을 때 할 일이 없을까 해서 도종의 책을 떠들어 보다가 약초제서를 발견했고 그걸 읽으면 잠이 잘 올 것 같아서 수면제 대신이라고 생각하며 옆에 두고 종종 읽었다.

그런데 아진의 몸이 워낙 오성이 뛰어나서 그런지 몇 번만 보면 기억이 났다.

약초제서에 나온 한자 중에는 천자문을 뗀 것만으로는 다 알 수 없는 것도 많았지만 무림 세계에 온 이후 글자나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어려움을 겪은 적은 없었고 한자 역시 자연스럽게 이해했다.

“아진이가 한 게 다 맞아요?”

도종은 신기한 듯이 물었고 허우천이 고개를 끄덕이자 놀란 얼굴로 활짝 웃고 아진을 꼭 안아주었다.

“역시 내 동생이네. 이 형님 옆에 꼭 붙어 있더니 형님의 지혜가 옮았나 보다. 히힛.”

“맞아. 형님.”

동생을 조금도 질투하지 않고 자기 일처럼 좋아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도종을 보면서 아진은 더 기뻤다.

“와…… 이건 정말…….”

허우천은 할 말을 잃은 채 연신 고개를 가로젓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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