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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4화 (4/470)

제4화

4화

“형님. 싸워서 지는 사람이 제선문주가 되는 거야.”

아진이 우렁차게 말하며 도종을 자극했다.

“그러면 네가 제선문주가 되겠다?”

“형님이 질 텐데?”

“요놈 봐라?”

도종은 공부를 하다가 쉬면서 아진과 노는 걸 좋아했다.

전에도 동생과 노는 게 좋았지만 바닥에 쓰러졌다가 일어나서 기억이 잘 안 난다고 한 이후부터는 동생이 완전히 달라져서 하루하루가 정말 신났다.

아직 어린 동생을 봐주겠다고 생각하면서 나무 막대기를 대충 휘두르다가 오히려 자기가 두들겨 맞는 일도 많아서 요즘에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 둘을 보는 서종욱의 표정은 조금 복잡해졌다.

“상공. 우리 아진이가 검술에 재능이 있는 것 같지 않으세요?”

그의 생각을 알아차린 듯 양주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소. 원래는 저렇게 활달하지도 않았는데. 요즘 아진이의 움직임을 보면서 놀라는 적이 한두 번이 아니오.”

“그래서 말인데요. 상공. 아진이에게 무술 스승을 붙여주면 어떨까요?”

“나도 그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오만…….”

“제가 시집올 때 가져온 패물을 팔면 무술 스승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러자 서종욱이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가세가 이렇게 기울지만 않았어도 아내에게 그런 말을 하게 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본래 안휘를 본거지로 하던 제선문이 각 지역에 지부를 낼 때만 해도 서종욱은 산본의가의 미래를 알지 못했다.

유명한 의문에서 지부를 낸다고 해도 그동안 사람들과 쌓아온 신뢰와 선의가 보답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다른 곳은 몰라도 산본의가는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가는 급속도로 쇠락했다.

제선문의 산본지부에서는 현판에 ‘제선문 산본지부 산본의가’ 라고 내걸어 산본의가라는 이름을 훔쳤다.

그러나 서종욱이 그 일을 따지러 갔을 때 그들은 자기들의 뒤에 남궁세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며 그를 겁박해 왔다.

관에도 도움을 청했지만 관도 이미 제선문에서 상당한 뇌물을 받은 터라 제선문의 편을 들어 주었다.

제선문이 ‘제선문 산본지부’라는 이름을 앞에 썼기에 서종욱의 산본의가와 혼동되지 않아 그 이름을 사용하는 것에 문제가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던 것이다.

그러면서 현령은 더는 그런 문제로 자신을 귀찮게 하지 말라면서 서종욱에게 겁을 주었다.

자신의 자리에서 자기가 할 일만 성실하게 하면 된다고 생각해 왔던 서종욱의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세상은 절대 공정하지도 않고 호락호락하지도 않았는데 미령이라는 벽촌에 자리를 잡은 탓에 서종욱이 너무 오랫동안 그 진리를 알지 못한 채 살아온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까지 무리할 것은 아니고 근처의 무관에 보내보는 것으로 합시다. 부인.”

양주은도 고집을 부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의가의 의생과 의녀들이 집으로 돌아가다가 왈패들에게 공격을 당한 일도 있어서 어린 아진을 혼자 무관에 오가게 하는 것이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상공. 이번만 제 청을 들어주시면 안 될까요?”

“…….”

서종욱은 오래 생각한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정말 아진에게 재능이 있다면 마냥 시간을 보낼 것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서도진은 그들이 하는 말을 모두 듣고 있었다.

그가 이곳에 와서 가장 놀란 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마나가 그대로 내공으로 전환됐다는 사실이었다.

내공으로 전환된 마나는 그에게 불가능했던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보통의 감각으로는 들을 수 없는 것을 듣게 된 것도 내공으로 인해 생긴 변화였다.

‘나 때문에 무리하지 않아도 되는데.’

서종욱과 양주은은 그의 부모였지만 원래 서도진의 나이를 생각하자면 귀여운 동생뻘이었다.

두 사람 모두 이제 갓 이십 대를 넘어서서 그저 파릇파릇하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데 자기를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걸 볼 때마다 고맙고 애틋했다.

현대 세계에서 완전히 포기했던 가족 간의 사랑을 이곳에서 느끼게 해 주어서 그것이 특히나 고마웠다.

서도진이 그 생각을 하는 동안 도종이 틈을 발견하고 막대기를 들어 올린 채 우다다다 달려왔다.

그러나 서도진은 도종을 보지도 않은 채 팔꿈치로 그의 가슴팍을 노렸다.

가슴팍을 가격하려 했는데 몸이 워낙 작다 보니 명치를 찍었고 도종은 막대기를 떨어뜨린 채 우왕 울음을 터뜨렸다.

“형님. 미안해.”

아진이 도종을 꼭 끌어안고 달래주자 도종도 꾹 참았다.

“그래도 형님이 졌으니까 제선문주야.”

“야!”

도종은 그것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약속은 약속이라 어쩔 수 없었다.

“네놈이 제선문주냐!”

아진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서종욱과 양주은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아이들이 그러지 못하게 말려야 하는 게 아닌가 해서였다.

그러나 일단은 아진이 뭐라고 하는지 들어 보기로 하고 두 사람은 조용히 아진을 구경했다.

“그렇다. 내가 바로 제선문주니라!”

도종도 기왕 하기로 한 건 제대로 하겠다는 듯이 배를 쑥 내밀고 어깨를 쫙 편 채 말했다.

“그렇구나. 이제 네가 나에게 패했으니 제선문은 앞으로 15년간 봉문을 하든지 아니면 그 이름을 바꾸도록 해라.”

“봉문이라니 어림도 없다.”

“그러면 이름을 바꿔야겠구나.”

“이름을 뭐라고 바꾸라는 말이냐.”

아이들이 노는 게 재미있었는지, 의가에 오는 환자가 없어 심심해서 그랬는지 의가의 의생과 의녀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그들을 구경했다.

“이제부터 제선문은 그 이름을 황천문으로 바꾸어라.”

아진의 말에 사람들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황천문?”

도종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묻자 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제선문은 황천문이니라. 제선문에 들어가는 자들은 황천길에 들어가는 것이니라. 그러니 낫고자 한다면 제선문의 지부가 아니라 산본의가로 와야 할 것이다. 산본에 산본의가는 이곳뿐이니라.”

“아하하하. 재밌다. 황천문이래.”

도종은 자기가 지금 제선문주의 역할을 맡고 있다는 것도 잊은 듯 깔깔거리고 웃어댔다.

다른 사람들도 아진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상공. 아진에게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말하는 양주은의 얼굴에도 웃음이 지어졌다.

제선문의 눈치가 보여 어른들도 못하는 말을 아진이 한 것이 속으로는 조금 후련했던 것이다.

서종욱도 다정한 얼굴에 웃음을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한 번 하기는 해야겠군요.”

마냥 어리기만 한 줄 알았던 녀석이 가문을 생각하는 것이 기특해서 그의 웃음은 더욱 짙어졌다.

그날 저녁 서종욱은 두 아이를 불렀다.

“아진아. 앞으로는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아종이도 마찬가지다. 제선문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건 너희들의 안전 때문이다. 그자들은 정말…… 이런 말까지 하고 싶지는 않지만 패악 무도한 사람들이다. 너희가 아니라면 이런 말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아비는 너희도 진실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종욱은 두 아들을 양쪽 무릎에 앉혀놓고 말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왈패들을 시켜서 무슨 일을 저지를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미리 조심하는 게 좋아.”

“네. 아버지. 앞으로는 안 그럴게요. 아진아. 너도 그러지 마.”

도종이 말하자 아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착한 녀석들. 아버지는 너희 때문에 산다.”

아진은 똘망똘망한 얼굴로 서종욱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종욱은 아진이 왜 그렇게 열심히 자신을 보는지 알지 못한 채 아진의 머리를 쓰다듬고 정수리에 입을 맞추며 귀여워해 주었다.

던전에서 서도진이 주로 치료했던 것은 헌터들이 입은 외상이었다.

그러나 그의 치유력은 외상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아진의 눈에 서종욱의 머릿속에서 자라는 종양이 보였다.

이전에는 환부가 그런 식으로 보인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아진은 종양을 보며 도종이 전에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제선문이 아무리 산본의가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을 냈어도 한동안은 산본의가가 굳건히 버텼는데 어느 날 서종욱이 침을 놓다가 실수를 해서 환자가 크게 다친 후에 의가의 상황이 급속도로 나빠졌다는 거였다.

큰돈을 배상하느라 여기저기에서 돈을 빌려야 했고 그때부터 환자도 떨어졌다고 했다.

그때 빌린 돈은 지금도 다 갚지 못해서 매달 조금씩 갚아 가는 중인데 이자가 너무 비싸서 아무리 갚아도 원금이 줄지 않는다며 도종이 한탄을 했다.

도종은 그 이야기를 할까 말까 오래 고민을 하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말을 했었다.

그 때문에 지금은 서종욱이 직접 시침을 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자기가 미리 말을 해 주지 않으면 아진이 그걸 아버지에게 물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아버지만 전처럼 시침을 잘 하시면 다 해결이 될 텐데.

아진은 종양을 보고 그 말을 떠올리면서 서종욱이 뇌종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신기한 일이네. 전에는 환부가 직접 보이는 일은 없었는데.’

아진은 서종욱에게 직접 뇌종양의 증상에 대해 물으면서 혹시 요즘 그런 일들이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어차피 자기가 치료를 하는 것은 의학적인 시술도 아니고 마나를 불어 넣어서 몸을 회복시키는 거라 서종욱이 모르게 치료를 하기로 했다.

‘그러려면 머리에 손을 얹어야 하는데. 아무리 나를 예뻐한다고 해도 마나가 충분히 흘러 들어갈 동안 머리를 잡고 있는 건 이상하다고 생각하겠지?’

아진은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한참 동안 고민을 하다가 머리를 굴렸다.

‘같이 자자고 하자. 같이 자는 동안 고치면 되겠지.’

그때부터 아진은 혼신을 다한 메소드 연기에 돌입했다.

“아버지. 머리가 아프고 배가 꼬이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꾀병을 부리자 서종욱이 깜짝 놀라며 촉진을 시작했다.

“여기냐, 아진아? 여기가 아파? 갑자기 왜 이러지?”

“아야. 아야. 아야!”

아진은 아프지도 않으면서 비명을 질렀고 서종욱은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의가의 의원을 불렀다.

의원 하명준은 아진을 살피면서 처방을 내렸다.

꾀병을 부리는 환자에게, 그리고 자신의 증상에 대해 거짓말을 하는 환자에게 제대로 된 처방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진은 지금의 서종욱이 얼마나 애가 탈지 생각했다.

자신의 손으로 아들을 고쳐주고 싶을 텐데 뇌종양으로 인해 시력이 저하되고 두통으로 집중력과 운동신경도 둔화했을 터였다.

행여 자기가 치료를 하려고 하다가 소중한 아들을 더 위험에 처하게 할까 봐 그러지도 못하고 마음만 졸이는 그가 한없이 안타까웠다.

그래도 대의를 위해서 지금은 그런 감정에 눈을 감아야 했다.

아진은 일부러 서종욱의 품에 파고들면서 징징거렸다.

“아버지. 아파요.”

서종욱은 다른 것을 해 주지 못하는 대신 따뜻한 손으로 아진의 배를 문질러 주었다.

그러자 아진이 반색하며 좋아했다.

“아버지. 그렇게 해 주니까 안 아파요.”

“그래? 이렇게 하니까 안 아파?”

온기가 전해져서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서종욱은 더욱 정성스럽게 아진의 배를 문질러 주었다.

아무리 해도 이제 됐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고, 손을 떼려고 하면 다시 아프다고 해서 서종욱은 계속 아진의 배를 문질러 주었다.

팔이 아픈 것도 몰랐다.

부모는 자식이 아플 때 아픈 자식을 대신해서 아파 주고 싶은 법인데 고작 팔이 아픈 것 정도는 전혀 대수롭지 않았던 것이다.

그 자신이 뇌에 종양을 갖고 있으면서 그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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