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3화
거울이 있으면 좋겠지만 작은 운동장처럼 휑한 그곳에서는 그런 게 보이지 않았다.
“일단은 들어가자, 아진아.”
“그런데 왜 나를 아진이라고 해?”
“히익!”
서도진이 묻자 아이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하더니 겨우 멈춰 가던 눈물이 다시 떨어졌다.
“아진아. 여기에 가만히 있어. 형님이 아버지 모셔 올게. 죽으면 안 돼. 아진아. 엉엉. 형님이 미안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결국 그 아이는 사라졌고 서도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주위에서 이상한 냄새가 났다.
‘탕약? 한약 재료들인가? 여기가 어디지? 무림 세계라는 건 알겠는데 정확히 어디로 온 거지? 이제부터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서도진은 혹시 상태 창이 다시 나타나지 않을까 했다.
자기가 이곳으로 온 것은 분명히 상태 창의 물음에 답을 해서인 것 같은데 여기에 떨구어 놓고 상태 창이 나타나지 않는 게 걱정되었던 것이다.
서도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보았다.
그러고 짜리몽땅한 자기 몸을 내려다보고 자기가 이제 네 살이나 다섯 살 정도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왜 하필? 그냥 내 나이에 맞는 몸은 없었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람을 일으키며 젊은 남자가 달려왔다.
그 뒤에서는 곱게 생긴 여인이 좀전의 아이에게 끌려오고 있었다.
“어머니. 서두르셔야 해요. 아진이가 죽을지도 모른다고요. 엉엉.”
아이는 정말 서도진이 걱정이 됐던 모양이었다.
“아진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한달음에 달려온 남자가 서도진의 앞에서 그를 꼭 끌어안더니 말했다.
“아진아. 내가 누군지 알겠느냐?”
도리도리-.
“…….”
그는 긴장한 얼굴로 뒤따라오던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 여인도 그 말을 들었는지 급히 걸음을 서둘렀다.
“아진아. 어미다. 어미도 못 알아보는 건 아니지? 응?”
두 사람이 아버지와 어머니인가 보았다.
‘정말 난감하네. 착한 사람들인 것 같은데. 내가 자기들 아들이 아니라는 걸 알면 엄청 충격받게 생겼는데.’
서도진은 잠시 머뭇거렸다.
“아…… 알아요. 장난한 거예요.”
“…….”
두 사람의 눈에 불신의 빛이 서린 것 같기는 했지만 그 말을 믿고 싶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서도진은 자기가 왜 그렇게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두 사람을 걱정시키고 싶지는 않아서 다시 말을 이었다.
“정말이에요. 잠깐 어지럽고 눈앞이 하얘졌는데 이제는 다 기억나요. 형님이랑 아버지랑 어머니 모두요.”
“그렇지? 그래. 다행이다. 다행이야. 아이구. 내 새끼. 그리고 아종이 너! 앞으로 아진이에게 심한 장난하면 그때는 그냥 넘어가지 않을 테니까 알아서 하거라!”
남자가 엄하게 말하자 아종이라 불린 아이가 고개를 조아렸다.
“네. 아버지. 저도 이제 정말 조심할 거예요. 저도 아진이가 죽는 줄 알고 정말 놀랐거든요.”
“그래. 나는 큰일이 난 줄 알고 걱정을 했지 않으냐.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어디가 아프거나 이상하거든 곧장 아비를 찾아오도록 하거라. 아진아.”
“네. 아버님.”
“…….”
남자가 이상하다는 듯이 보는 걸 보고 서도진은 아버지라고 호칭을 바꿔 보았다.
그러자 그의 얼굴에 다시 웃음이 지어졌다.
“갑시다. 부인.”
“네. 상공. 아진아. 아종아. 조심하면서 놀아야 한다. 다치지 않는 게 가장 큰 효도야. 너희 둘 다. 알고 있지?”
여인이 서도진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웃는데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어쩐지…… 뭐라고 할까.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런 손길을 느껴본 게 얼마 만인가 했다.
이 여인이 걱정하는 건 서도진이 아니라 아진이라는 아이이겠지만 서도진은 자신을 걱정하는 사람의 눈길을 너무 오랜만에 받고서 울컥해졌다.
다행히 다른 사람들은 그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네.”
도종이 우렁차게 말했다.
두 어른이 사라지자 도종이 서도진을 바라보았다.
“정말 다행이다. 넘어지면서 많이 아팠나 보네. 잘 울지도 않던 녀석이 울고 있는 걸 보면.”
그러면서 서도진의 머리를 박박 쓰다듬어 주었다.
그는 이제 걱정할 게 하나도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서도진은 그렇지 않았다.
“네가 내 형이야?”
“……야. 무슨…… 말이야? 너 왜 그래. 무섭게. 아진아?”
도종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끝난 줄 알았는데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너한테는 말을 해도 될 것 같아서 말하는 건데. 내 말 잘 들어. 나는 네가 나를 왜 아진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르겠고 저분들이 누군지도 몰라. 그런데 나를 걱정하는 것 같아서 일단 어머니, 아버지라고 부른 거야.”
“히익!”
도종의 얼굴은 다시 새하얗게 질렸고 이번에도 어른들을 부르러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서도진이 조금 더 빨랐다.
“일단 내가 왜 이러는지 알려 주고 내가 누구인지 말해 봐. 내 생각에는…….”
서도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내가 아무래도 갑자기 넘어지면서 기억을 잃은 것 같아.”
“아. 그럴 수도 있어. 너, 넘어지면서 돌에 머리를 부딪쳤거든. 그런데 내가 네 형님이라는 것도 기억이 안 나?”
그건 정말 심각하다는 듯이 도종이 물었다.
“응.”
서도진이 말하자 도종이 한숨을 깊이 쉬고 서도진의 손을 꼬옥 잡았다.
“너는 서도진. 나는 서도종. 내가 네 형님이야.”
“그런데 왜 다들 나를 아진이라고 불러?”
“어린 도진이니까 ‘귀여운 우리 도진이’라는 의미로 그렇게 부르지. 아명이야. 진진이라고도 부르고 진아라고도 부르는데 우리는 아진이라고 불러.”
“그런 거야?”
“그래. 당연하지. 큰일 났네. 내 동생이 한 번 넘어지고 바보가 돼 버렸어.”
도종이 다시 울먹거리더니 서도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도 이 형님이 전부 다 말해 줄 테니까 기억이 안 나는 게 있으면 물어 봐. 그리고 어머니 아버지가 걱정하시지 않도록 거짓말을 한 건 잘한 것 같아.”
도종은 동생이 자기 때문에 넘어져서 기억을 잃었다는 게 밝혀지면 난리가 날 것 같아 걱정되는 듯했다.
서도진은 도종이라는 조력자가 생긴 게 다행스러웠다.
“여기는 어디야? 여기는 뭐 하는 곳이야?”
서도진이 작정을 하고 묻자 도종이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우리 가문은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의가야. 아버지는 유명한 의원이시고. 할아버지는 산본신의라고 이름을 날리셨대. 기억…… 나?”
“아니.”
“그래…….”
일말의 기대감이 도종의 얼굴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산본신의가 뭐야?”
“여기가 산본인데 할아버지가 산본의 신의라는 거지.”
“아버지는 그럼 뭐라고 불려? 아버지도 신의야?”
“아버지는…… 그 정도는 아니고.”
도종이 흙바닥을 발로 툭툭 치며 말했다.
“왜? 아버지는 환자를 잘 못 보셔?”
“아니야. 아버지도 잘 보셔!”
도종이 갑자기 화를 내며 말했다.
“미안.”
서도진은 자기가 잘못한 것 같아서 곧바로 사과했다.
도종은 고개를 끄덕이고 사과를 받아들이더니 설명을 이어나갔다.
“원래는 아버지도 잘 보셨어. 지금도 잘 보시고.”
“그래. 알았다고.”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전만큼 잘 보시지는 못하는 것 같아. 손이 떨리고 눈이 침침해지신 것 같거든. 몇 번 그런 걸 느꼈어. 아침이 되면 두통이 심한지 잘 일어나지도 못하시고 얼굴을 찡그리고 다니셔. 아아. 너는 그것도 기억이 안 나겠구나. 아버지가 얼굴을 찡그리시는 건 화가 나서가 아니라 아프셔서 그런 거야. 그러니까 오해하면 안 돼. 알았지?”
서도진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보기는 했지만 도종의 부모라는 사람들 모두 좋은 사람들 같았는데 지병을 앓고 있는 건가 했다.
진맥하고 병을 고치는 사람이 갑자기 자기 몸에 이상이 생기면 환자를 보는 게 어렵기도 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가문이 기울어 가고 있다는 말인가 보네.’
서도진은 도종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추측을 해 나갔다.
“원래는 우리가 산본의가라는 이름을 대대로 써 왔는데 다른 곳이 마구잡이로 그 이름을 써서 사람들은 이제 우리를 미령의가라고 해. 우리가 산본의간데!”
도종은 분한 듯이 말했다.
서도진은 가문의 일을 억울해하는 도종이 조금 귀여웠다.
“그럼 여기는 미령의가야?”
“산본의가라고 했잖아.”
“알았어.”
산본이 미령보다 큰 행정구역인데 의가의 세력이 줄면서 사람들은 이제 다른 곳을 산본의가라고 부르고 이곳은 그냥 미령의가라고 부르는 듯했다.
도종의 앞에서는 산본의가라고 해야겠다고 다짐을 하고 서도진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원래 이 몸의 주인은 어디로 간 걸까? 혹시 돌에 부딪히면서 죽은 거야?’
이름이 같다는 것도 신기하기는 했다.
서도진은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 황당하기는 했지만 모르는 건 도종에게 물어 보면 될 테니 어려울 건 없겠다고 생각했다.
“원래는 우리 의가에 의원이 열 명이 넘고 의생은 오십 명이 넘었는데 다른 데서 하나둘씩 빼가서 이제는 의원이 아버지 빼고 한 분밖에 안 계셔. 환자 수도 줄고 있고.”
도종의 입에서는 점점 비관적인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면 우리 어떻게 되는 거야? 망해?”
서도진이 묻자 도종이 발끈했다.
“누가 그런 소리를 해?”
도종은 동생을 귀여워하고 예뻐했지만 동생이 가문에 대해 안 좋게 말하면 화를 내는 듯했다.
화를 내는 부분에 일관성이 있어서 뭘 조심하면 될지 알 것 같았다.
도종은 기울어 가는 의가의 장자로 장차 가문을 일으켜야 한다는 마음가짐이 대단했다.
‘의가? 의가라면 나한테는 잘된 일인 것 같은데?’
서도진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진아. 배 안 고파?”
“배고파.”
“그럼 밥 먹으러 갈까?”
서도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도종이 서도진의 손을 잡았다.
“가자. 지금 가도 아마 숙수님이 먹을 걸 주실 거야.”
“우리 굶은 거야?”
“응. 너랑 노는 게 너무 재미있어서. 너도 재미있었지?”
기억이 안 난다는 애에게 굳이 그걸 묻는 도종이었다.
그래도 서도진은 이 조그만 형님이 마음에 들었다.
부모도 괜찮은 사람들인 것 같고 자기가 깨어난 곳이 기울어 가는 의가라는 것도 좋았다.
‘내가 일으켜줘야지.’
왠지 앞으로는 재미있는 일이 가득 일어날 것 같았다.
* * *
“아진아. 아진아. 그러다가 넘어지겠다. 조심하래도.”
“네. 어머니. 으헤헤헤헤.”
이게 참.
서도진도 자기가 왜 그러고 있는 건지 잘 몰랐다.
다섯 살짜리 아이의 몸에 들어갔다고 갑자기 행동이며 말투가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는데 주위 사람들이 우리 아진이, 우리 아진이 하면서 부둥부둥 해 주고 잔뜩 귀여워해 주니 자기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잊고 도종과 천진하게 뛰어놀기에 바빴다.
도종이 며칠 동안 긴장하면서 서도진의 옆에서 그가 알아야 할 것들을 열심히 알려 준 덕에 이제 서도진은 산본의가의 사정을 훤히 뀄다.
어머니 양주은은 자상하고 지혜로우며 올곧았고 아버지 서종욱은 병증이 나타나기 전까지 실력 있는 의원이었다.
그는 사업가로서의 수완은 별로인 것 같고 다른 의가가 크게 세력을 키워 다른 지역에 지부를 세우면서 뻗어 나가는 동안 시대의 흐름을 따르지 않는 독불장군 같은 면모도 보였지만 그걸 꼭 나쁘다고만 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손님을 많이 끌려면 목 좋은 곳에 점포를 내는 게 좋지만 실력이 있다고 이름이 나면 아무리 접근성이 어려워도 사람들이 알아서 찾아오는 게 세상 이치였다.
난치병을 앓는 사람을 몇 명 고쳐서 이름이 알려지면 의가의 이름이 알려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거라 서도진은 우선 이 여유를 즐기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