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7화 (107/107)
  • 헤헤, 사랑스럽게 웃는 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그 웃음을 보며 엘리아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기억에는 없지만, 가슴이 기억하고 있었다.

    엘리아는 두 팔을 들어 아이를 꼭 끌어안았다.

    “반드시, 반드시 기억을 되찾을게.”

    엘리아의 품에 파묻힌 제레미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같이 안았다. 그리고 아이는 마치 그녀를 위로하듯 그 작은 손으로 토닥토닥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아이의 포슬한 머리카락 위에 꾹 입술을 묻었다. 아이에게선 따뜻하고 포근한, 봄날의 햇살 같은 향이 났다.

    * * *

    펠릭스가 약속한 대로 대주교가 찾아왔다.

    자신을 막시밀리안 대주교라고 소개한 그의 첫인상은 눈이 부실 만큼 새하얗다는 것이었다.

    정말 신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고 믿어질 정도로 성스러운 분위기를 지닌 이였다.

    같이 차를 마시는 이 공간마저 성스럽게 느껴졌다.

    “즉위식만 치르면 정식으로 황후의 자리에 오르시겠군요. 황궁에는 언제 가실 예정이십니까?”

    그의 질문에 엘리아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큰 행사에만 참여하고 당분간은 북부에 머물 예정이에요. 조금 더 지켜보고 살펴줘야 하거든요.”

    “아, 그러시군요.”

    미소 띤 대주교가 엘리아를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을 잃어도, 따스한 마음만큼은 여전하십니다.”

    “혹시, 이전에 저를 만나신 적이 있으신가요?”

    “아, 그럼요. 그때 저를 구해주시기도 하셨었는데요.”

    “아, 그래요? 하지만 지금은 기억에 없어서…….”

    대주교는 다시 한번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불안해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기억이 돌아온다면 모든 것이 풀리게 될 겁니다.”

    “아, 그렇군요. 저기 한데…… 정말 기억이 돌아올 수 있을까요?”

    “흠, 저는 그분과 연결만을 해드리는 것이라. 하지만 자애로운 분이시니 황후께서 간절히 간청드린다면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을 겁니다.”

    “감사해요.”

    대주교는 잠시 사담을 나누며 곧 진행될 의식에 긴장하지 않도록 그녀의 마음을 풀어주었다. 두 사람은 응접실을 나와 의식이 준비된 성 뒤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 그럼 이제 시작해도 되겠지요?”

    대주교는 그저 웃는 낯으로 미리 그려놓은 표식 안에 선 뒤 엘리아를 불렀다.

    “동그란 선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이제부터 여긴, 신의 영역입니다.”

    “네.”

    엘리아가 조심스럽게 표식이 그려진 곳으로 들어섰다.

    “지금은 기억에 없으시지만, 이전에 축복을 한번 받으신 적도 있으십니다. 그래서 조금 어려운 선택이 기다릴 수 있지만, 잘 극복하시리라 믿습니다.”

    엘리아는 그 말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어쨌든 이제 저도 제가 진 빚은 갚아야지요.”

    막시밀리안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벌렸다.

    “위대한 신이시여, 당신의 종이 이곳에서 당신을 뵙기를 청합니다. 당신은 은혜로우시고 …….”

    한참 동안 기도문이 이어졌다. 그리고 대주교는 감았던 눈을 뜨며 엘리아를 바라보았다.

    “진실한 마음은 어디서나 통하기 마련입니다. 그것만 기억하십시오.”

    “……!”

    대주교의 알 수 없는 미소를 마지막으로, 엘리아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독특한 문양으로 그려진 선에서 빛이 발하기 시작했다. 엘리아의 가는 머리카락이 허공에서 부유했다. 그리고 그건 대주교의 새하얀 머리카락도 마찬가지였다.

    또륵, 똑, 똑, 똑…….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뚜렷했다가, 서서히 멀어지기도 했다.

    “으앙! 으앙!”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당황한 그녀는 소리를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녀의 앞쪽에 갈림길이 있었고 오른쪽 갈림길 쪽에 아기가 바구니에 담겨 버둥거리며 울고 있었다.

    “아가?”

    엘리아는 홀린 듯 아이를 향해 다가갔다. 아기는 그녀를 발견하고 안아달라는 듯 팔을 벌렸다.

    엘리아는 아기를 보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기의 얼굴을 보니 그녀가 알고 있는 누군가가 떠올랐다. 금빛 머리카락에 잿빛 눈동자.

    아기를 안아 들고 몇 번 토닥여 주자, 아이는 더 울지 않고 맑고 깨끗한 눈으로 말똥말똥 그녀를 향해 방긋방긋 웃어주었다.

    “까르륵.”

    무엇이 그리 좋은지 엉덩이까지 들썩였다.

    아이의 잿빛 눈 아래 작게 모여 있는 세 개의 점이 보였다. 그 모양이 너무도 앙증맞았다.

    엘리아는 아이를 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충만하게 차올랐다.

    “안녕.”

    그녀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작은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아기는 곧 엘리아의 긴 머리카락을 움켜잡더니 방실방실 또 웃음을 터뜨렸다.

    “까르륵~.”

    “후후, 너 정말, 그이를 쏙 빼닮았구나?”

    엘리아는 자신들의 아이임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걸렸다.

    [스스로 생명을 소멸시킨 자여, 오지 말아야 할 자가 왔구나.]

    엘리아의 머릿속으로 또렷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사랑하는 종이 보낸 자여, 무엇을 원하느냐.]

    놀란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엘리아는 바로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신이시여, 저의 기억을 돌려주십시오.”

    [너는 나에게 축복을 받은 자,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구나. 하지만 나의 사랑하는 종이 간절히 부탁하니 너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다.]

    어느새 그녀는 빈손으로 이정표 앞에 서 있었다. 어떠한 설명도 없이 한쪽은 붉은 그리고 다른 한쪽은 푸른색의 수레바퀴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금기를 범한 자여. 선택하라.]

    고개를 갸웃한 엘리아가 왼쪽의 갈림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제레미가 서 있었다.

    다시 오른쪽 길을 보자 조금 전 안고 있었던 아이가 있었다.

    “……그게 무슨? 혹 둘 중에 한 아이를 선택하라는 말씀이세요?”

    [무엇을 택할 테냐.]

    “……!”

    [모든 걸 가질 수는 없다. 선택해라.]

    그 차가운 음성에 엘리아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건 아닙니다. 기억을 찾고 싶었던 건 아이와 함께 행복해지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런데 둘 중에 한 아이를 선택하라니, 싫습니다.”

    [그럼 내가 너의 선택을 도와주겠다.]

    의미심장한 말에 엘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갈림길에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아이들 주변으로 서서히 불이 붙고 있었다.

    “안 돼!”

    놀란 엘리아가 크게 소리 내어 외쳤다.

    [선택하라.]

    그 말을 끝으로 불은 더욱 거세어졌다. 엘리아의 푸른 두 눈동자에도 시뻘건 불길이 치솟았다. 한 아기는 울어대고, 제레미는 엄마! 엄마! 하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카르마’,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이 ‘원인’이 되어 ‘결과’가 생긴다. 선택하라, 너의 인과는 무엇이냐.]

    “흐흑흑…… 아기를, 아기를 한 번만 더 가까이서 볼 순 없을까요?”

    주변을 뜨겁게 달구던 화마가 사라지고, 엘리아는 서둘러 엉엉 우는 갓난아이 앞으로 걸어가 아이를 안아 들었다.

    하얀 얼굴이 새빨갛게 익을 정도로 울던 아이는 엘리아가 안아주자, 금세 울음을 그치며 그녀를 향해 웃어주었다.

    [그래. 너의 아이를 선택하는 것이냐.]

    엘리아의 눈가에서 후두두 눈물이 떨어졌다. 그녀는 아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들어 제레미가 서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제레미는 슬픈 미소를 짓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기는 괜찮다는 듯이.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엘리아가 이내 제 품에 안긴 갓난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푸른 눈망울이 흐릿하게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아가야. 우리, 우리는 조금만 더 있다가 만나야겠네.”

    투두둑.

    아기의 통통한 볼살 위로 작은 물기가 어렸다. 슬픈 그녀의 눈빛에도 아기는 방긋방긋 웃으며 꺄꺄 소리를 내질렀다.

    [……운명의 수레바퀴가 정해졌다.]

    소나기가 내렸다. 숲도, 갈림길도, 엘리아 품에 안겨 있던 아기도 모든 게 다 사라지고 없었다.

    주변이 환한 빛으로 가득 찼다. 눈이 부셔 감긴 그녀의 눈꺼풀 위로 빗방울이 와 부딪쳤다.

    투둑, 툭, 투두둑, 쏴아아-.

    그녀의 몸속으로 빗방울이 스며들며 잘게 부서졌던 기억의 조각들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 * *

    “도련님! 그쪽으로 가시면 안 돼요!”

    “시러! 엄마랑 있을래!”

    “제레미 로이드!”

    우당탕탕!

    제레미가 엘리아와 대주교가 의식을 치르고 있는 북부 성 뒤편 널따란 숲길에 들어왔다.

    아이를 말리려 달려온 펠릭스와 하녀들이 그 뒤를 따랐다.

    의식은 끝나 가고 있었다. 아이의 모습을 발견한 대주교가 크게 손짓하자 밝은 빛이 사라지며, 그 앞에 서 있던 엘리아가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두 뺨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엄마!! 왜 울어요!”

    놀란 제레미가 그녀에게 뛰어왔다. 아이의 걱정 어린 얼굴에 엘리아는 급히 눈물을 닦아냈다.

    “아니, 아니야.”

    엘리아는 곧 웃는 얼굴로 아이를 마주 안아주었다.

    “응? 아니에요?”

    두 눈 가득 눈물이 고여 있는데도 웃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레미, 사랑해.”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제레미는 그녀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기분이 좋아졌다.

    “히히히, 저도요!”

    자신을 꼭 안은 그녀가 좋아 마냥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기다려 줘서 고마워!”

    “응? 혹시 이제 모두 기억나요?”

    “그래, 이제 모든 게 기억나는구나.”

    “와, 엄마…….”

    “……당신, 기억이 돌아왔군!”

    펠릭스가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의 눈동자는 젖어 있었다. 엘리아가 그를 보며 활짝 웃었다.

    “사랑해요, 펠. 믿어줘서, 기다려 줘서 고마워요.”

    어느새 다가온 펠릭스는 엘리아와 제레미를 함께 감싸 안았다.

    “사랑해. 엘리아.”

    그의 목소리는 묵직하게 떨렸다.

    “나두, 나두!!”

    제레미가 잔뜩 상기된 얼굴과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렇게 북부의 따스한 첫봄을 맞이하는 해, 엘리아는 소중한 기억을 되찾게 되었다.

    숲길 사이로 흩날리는 연분홍 꽃잎이 너무도 아름다운, 북부의 어느 따스한 봄날이었다.

    <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