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신을 원망했던 펠릭스는 언젠가 신전에서 보았던 운명의 수레바퀴를 떠올렸다.
‘어쩌면 우리는 다시 만나고 다시 만나도 또다시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 아니었을까.’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홀린 듯 잠든 그녀를 바라보던 그때, 그녀의 눈꺼풀이 들리며, 푸른 낙원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당신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곳은 이렇게 활기가 넘치고, 새롭게 태어나고 있어. 엘리아.’
잠이 덜 깬 모습조차 너무도 아름다운 그녀였다.
* * *
“기억을 되찾고 싶어요.”
펠릭스가 제국과 북부를 왕래하며 바삐 보내던 어느 날의 일이었다. 집무실에 방문한 엘리아가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으니 답답해요.”
“…….”
“꿈을 꿨어요. 거기 제레미와 페, 펠릭스가 있었어요.”
기억이 온전치 못한 엘리아는 그를 폐하라고 부르곤 했다. 그걸 ‘펠’이라 정정해 주자, 차마 그것까진 못하겠는지 저렇듯 ‘펠릭스’라고 불렀다.
“이게 뭔지 잘 모르겠는데…….”
그녀는 답답한 듯 고개를 저으며 속내를 털어놓았다.
“어떤 여자와 펠……, 그리고 제레미가 함께 아도니스라는 꽃을 보며 행복하게 웃고 있었어요. 근데 그 여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고, 너무 흐려요.”
“…….”
“누구인지 몰라 너무 답답해요. 그 여자에게 화가 나기도 하고…….”
엘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꿈속의 여자에게 질투를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말을 하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잘 알지 못했다.
“이런, 엘리아. 그건 당신이야.”
“네? 저라고요?”
“그래, 당신과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들이야. 우리들의 추억이지.”
“아, 그렇군요, 한데 전 기억도 못 하고…….”
“괜찮아. 내가, 제레미가 기억하고 있잖아.”
우울한 그녀의 눈빛에 펠릭스는 안타까운 마음을 보냈다. 그는 그때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파릇하게 솟아오른 아도니스와 그 앞에 쭈그리고 앉은 아이,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선 그와 그녀.
그땐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는데, 그 모든 것이 이젠 그들에게 소중한 추억이었다.
“제가 많이, 정말 많이 좋아했나 봐요.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다는 건 느낄 수 있었거든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지만, 두 사람만 보면 애틋하고 미안한 마음이 계속 들었다.
혼란스러워하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는 펠릭스도 그녀와 추억을 같이 공유하길 원했지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벌컥!
집무실 문이 열렸다. 문가에는 제레미와 난처한 듯 아이를 바라보는 앤드류, 그리고 샤미르가 서 있었다.
“아앗! 또 제레미만 빼고!!”
우당탕, 달려온 제레미는 엘리아의 허리에 매달렸다.
“휴, 넌 정말 언제 철이 들려고 그러니. 노크하고 기다려야지! 황제 폐하와 황후 마마를 뵙습니다.”
뒤에선 샤미르의 딱딱하지만, 예의 바른 목소리가 들렸다.
“치, 맨날 잔소리만 해.”
제레미의 입술이 다시 툭 튀어나왔다. 그 모습에 샤미르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돌렸다.
“황후 마마에게 전해 드릴 희소식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샤미르는 황제와 황후를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희소식?”
샤미르는 한동안 서재에 틀어박혀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헬리오스 여신은 인간에게 그리 모질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갑자기 떠오르더라고요.”
샤미르는 시선을 한번 맞춰 오더니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언제나 하나씩은 가능성은 남겨주셨다고, 그래서 마님의 기억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자료를 찾아보았는데, 가능성 있는 문구가 보이더라고요.”
“가능성 있는 문구?”
“네, 문구에 이렇게 적혀 있었어요. ‘나의 사랑하는 대리자, 인간을 불쌍히 여기고 살펴라. 너의 뜻이 곧 나의 뜻이니 너에게 언제나 문이 열려 있다’.”
“문이 열려 있다?”
펠릭스가 고개를 꺄우뚱거리며 눈으로 다시 설명을 요청했다.
“네, 그렇죠. 그분의 예언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있던 때에는 영이 그분에게 닿지 못했다는데, 백성에게 진실을 이야기하고 백성들이 신의까지 얻고 나서는 다시 그분과 영의 교류가 일어난다고 들었거든요.”
총명해 보이는 눈동자를 반짝이며 샤미르는 막힘없이 이야기를 하였다.
“흠, 그 이야기는 나도 들어 알고 있다.”
“그래서, 제 말은 사랑하는 대리자, 그분이 도와주신다면 마님의 기억이 돌아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거죠.”
“흠……!”
“거짓을 뱉었는데도 버리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고 있는 사람.”
“……대주교에게 연락을 해야겠군.”
펠릭스의 대답에 샤미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을 되찾고 싶으시다면, 그분께 부탁을 드리면 될 거예요. 헬리오스 여신과 관련해서 고대부터 내려져 온 책이란 책은 다 찾아보고 내린 결론이거든요. 아, 물론 확실하진 않아요.”
하암, 샤미르는 하품을 길게 하며 기지개를 켜더니, 미련 없이 뒤돌아 방을 나가 버렸다.
“……저 아이는, 대체 몇 살이죠?”
“내가 알기론 이제 9살 넘었지.”
“아, 9살…….”
“당신이 데리고 온 아이야, 저 아이.”
“제, 제가요?”
“그래.”
“아, 그렇군요.”
엘리아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기억, 되찾고 싶다고?”
조심스러운 그의 물음에 엘리아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녀올게. 엘리아, 당신은 북부에서 푹 쉬고 있어.”
“네? 저 역시 제국으로 가야 하는 게 아닌가요?”
“끌고 올게.”
“그, 그게 가능한 일이에요?”
“당신이 자꾸 잊고 있나 본데 나 황제야. 안 온다고 버티면 납치하지 뭐.”
당황스러운 표정의 엘리아를 바라보며 펠릭스가 짓궂은 미소를 띠었다. 그제야 장난이란 걸 깨달은 그녀는 두 뺨을 붉힌 채 수줍게 웃었다.
“앤드류.”
“네, 전하. 제국에 갈 채비를 할까요?”
“아니, 잠시 제레미랑 다 같이 나가 있으라고.”
“예?”
“나. 가.”
앤드류는 상황을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멍하니 눈을 끔벅였다.
“아버지는 맨날 맨날 나가래!”
“어허, 황태자 점잖지 못하게…….”
“치, 할 말 없으면 맨날 황태자래.”
제레미가 심술궂은 표정으로 엘리아를 잡고 나가지 않으려고 버텼다.
“풋!”
그 모습에 엘리아는 웃음을 터트렸고, 제레미를 말로 이기지 못하는 펠릭스가 눈으로 앤드류를 협박하며 끌고 나가게 했다.
“황태자 전하, 이, 이만 나가시…….”
“아버지, 미워!”
안 나가려고 버티던 제레미는 결국 앤드류에게 달랑 들려 나갔다.
“쯧쯧, 그동안 잘 참으시더니. 폐하도 남자셨네, 남자셨어.”
문을 닫고 나가는 앤드류가 혼잣말인 듯 아닌 듯 궁시렁거리며 사라졌다.
그 말에 두 사람의 얼굴은 불타오르듯 빨갛게 달아올랐다.
“크흠…….”
갑작스러운 적막에 서로 얼굴을 붉힌 채 머뭇거리다 펠릭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엘리아.”
“……?”
“제국에 가기 전에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그럼요, 말씀하세요.”
엘리아의 말간 눈동자는 어떤 의구심과 두려움 없이 청량했다.
“……키스해도 될까?”
기억을 잊은 후부터 여태껏 손끝 하나 닿지 못했는데, 수줍게 미소 짓는 얼굴을 보자 참을 수가 없었다.
“네, 네……?!”
“키스…….”
펠릭스가 천천히 상체를 낮춰 다가오며 재차 이야기를 꺼내자 엘리아는 당황한 듯 답변을 못 하고 있었다.
“그, 그게……!”
“아, 미안해, 엘리아. 내 마음이 조급했어. 아직은 힘들 텐데.”
펠릭스는 살짝 실망하며 숙였던 몸을 바로 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엘리아가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머릿속에 그에 대한 기억은 없었지만, 그녀의 가슴이 그를 깊이 사랑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실망하는 그의 눈빛을 본 순간 자신도 이 순간을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 제가, 해요?”
“……!”
“펠릭스?”
“아니, 아니 내가 할게!”
그의 답변에 엘리아가 살며시 두 눈을 감았다.
촉.
펠릭스의 입술이 이마에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그리고 엘리아가 긴장을 풀 수 있도록 천천히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에 입을 맞추고, 그다음은 달아오른 볼, 그다음은 앙증맞은 코, 그다음은 엘리아의 손을 잡고 그 위에다 입을 맞추었다.
눈을 감고 있던 엘리아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나른한 눈동자가 촉촉이 젖어 있었다.
“으읍!”
펠릭스는 얼른 엘리아의 작은 입술을 머금었다. 다물린 입술을 할짝거리다가도 살살 혀를 찔러 넣었다. 그러자 가만히 미동 없던 그녀가 천천히 입술을 벌려주었다.
두 사람의 가슴은 처음 키스를 하는 연인처럼 두근거렸고, 키스는 감미로웠다. 한동안 계속되는 키스는 첫날밤 그때처럼 긴 시간 이어졌다.
*** 펠릭스가 황실 재정과 행정 현황을 파악하며 제국을 안정시키는 동안, 엘리아는 북부의 계절을 바꾸고 있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봄.
이제 아르티젠 북부는 매년 사계절이 찾아왔다.
처음으로 북부에서 벚꽃 축제가 열렸고, 제국에 있는 펠릭스를 제외한 모두가 꽃 축제를 즐기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엘리아를 태운 마차가 지나갈 때마다 북부 영지민들은 엄청난 찬사와 함께 함성을 내질렀다.
“이 모든 게 황후 마마의 축복입니다!”
“감사합니다!”
“황후 마마 만세~!!”
영지민들은 처음으로 느껴보는 계절의 변화와 북부를 다스리던 대공이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또 기뻐했다.
“온천 축제 때보다 인파가 더 몰렸어요!”
유리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소리쳤다. 온천 축제 때 어땠는지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행복해하는 영지민들을 보니 엘리아의 입가에도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엄마!”
때마침 제레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엘리아는 시선을 돌려 동그란 눈을 반짝이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모두 엄마를 좋아하나 봐요.”
“후후, 그래, 그래 보이는구나.”
“그래두 제레미가 제일 많이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