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화 (105/107)

“…….”

“제레미를 엄청 엄청 사랑해.”

“응, 그랬던 거 같구나. 지금도 이렇게 네가 좋은 걸 보니.”

“응, 응, 엄마는 제레미를 아빠보다 더 사랑해.”

“뭐?”

“헤헤. 엄마는 제레미만 사랑해.”

아이는 장난치듯, 자기만 바라보라고 하며 그녀에게 폭 안겨 왔다.

이상하게 눈시울이 따끔거렸다.

기억에 없었지만, 아이를 안고 있는 것만으로 가슴이 충만하게 차올랐다.

그런 두 사람을 모두가 숨죽인 채 바라보았다.

“기억을 잃었어도, 두 분 사이의 유대감은 그대로인가 봅니다. 눈물이 다 나네, 크흑.”

언제 쫓아왔는지 곁에 서 있는 앤드류의 호들갑에 펠릭스는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그리고 천천히 두 사람 곁에 다가가 그도 마찬가지로 무릎을 굽혔다.

“……엘리아. 알려주고 싶은 게 있어. 당신은 이제 황제의 아내야.”

“……네? 황제, 라니요? 저는 대공비 아니었…….”

당황한 엘리아가 뒤에 서 있던 앤드류를 바라보았다.

분명 대공비라고 알려줬는데. 엘리아의 시선을 읽어낸 그가 눈을 깜박거리더니, 머쓱한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하하, 이런. 저 역시 소식을 늦게 접했습니다. 대공비가 아니라 황후, 로 정정하겠습니다.”

“네에……?!”

두 눈을 커다랗게 뜬 엘리아가 어버버, 입술을 가만두지 못했다. 엘리아의 머릿속은 혼돈 그 자체였다.

‘그러니까, 내가, 내가 황제의 아내라고……. 제국의…….’

“화, 황후……?”

고개를 가로젓던 엘리아가 검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펠릭스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럼, 당신이 황제?”

그녀의 물음에 이번엔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는 황태자야?”

마찬가지로 이 상황을 전혀 몰랐던 제레미는 눈을 멀뚱멀뚱 뜬 채 되물을 뿐이었다.

“맙소사.”

짧게 탄식한 엘리아는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기분에 눈을 질끈 감았다.

깨어나 보니, 대공비였고 이제 황후라고 한다. 다시 눈을 뜨면 이 모든 게 전부 꿈이 아닐까?

그 와중에도 엘리아를 걱정하는 주변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이 모든 게 현실임을 알려줄 뿐이었다.

엘리아가 머리를 잡으며 잠시 휘청였다.

“엘리아!”

“엄마!”

펠릭스와 제레미가 바로 그녀를 잡아주었다.

“그러니까, 대공, 아니 폐하! 안 그래도 심신 미약 상태인 마님께 꼭 그런 소리를 하셔야 했습니……!”

“…….”

앤드류가 펠릭스를 비난하듯 입을 놀리자 바로 날카로운 펠릭스의 시선이 꽂혔다.

“앤드류, 나가.”

앤드류는 그의 냉기 섞인 말에 아차 하는 표정을 짓더니, 응큼한 미소를 지으며 슬그머니 방을 나섰다.

사용인들이 나간 방 안에서 오랜만에 세 식구가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직은 기억이 돌아오지 않아 어색하지만 그들의 눈빛만 보아도 이들이 얼마나 자신을 좋아하는지 느껴졌다.

“가지 마요.”

제레미는 한참 동안 그녀에게 안겨 놀다 피곤한지 스스륵 잠이 들어버렸다. 아이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리고 엘리아도 아직은 체력이 회복되지 않았는지, 아이를 재워준다고 하더니 같이 잠이 들어버렸다. 그 모습에 펠릭스의 입가에는 행복한 미소가 걸렸다.

펠릭스는 너무 행복했다. 이제 천천히 그녀와의 추억을 다시 쌓아 갈 것이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는 잠이 든 엘리아의 매끈한 이마 위에 쪽, 입을 맞추었다.

“사랑해, 엘리아.”

그가 윤기 나는 금빛 머리카락을 살며시 쓸어내리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다정하고 따스한 손길 때문인지, 눈을 감은 그녀의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어려 있었다.

* * *

“엄마! 엄마!”

제레미는 엘리아를 이전보다 더 따라다녔다. 기운이 넘쳐나는 아이의 목소리가 북부 성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사용인들의 얼굴에도 웃음이 가득했다. 펠릭스 부부로 인해 북부는 더 부유하고 살기 좋은 곳으로 계속해서 변하고 있었다.

황제는 부지런히 제국을 왔다 갔다 하며 빠르게 내정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시간이 나면 대신들의 외침을 뒤로하고 북부로 달려오곤 했다.

“앗, 깜짝이야! 폐하, 언질도 않고 또 오셨습니까……?”

연락 없이 들이닥친 펠릭스를 보며, 놀란 앤드류는 눈으로 욕을 하고 있었다.

“흠흠. 제국에서의 일은 다 끝마치고 왔으니, 상관없지 않나.”

“네?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습니까!”

“그럼, 뭐가 중요하지?”

앤드류는 뻔뻔한 제 주군의 모습을 다소 한심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아니라, 지금 한창 즉위식 준비로 바쁠 때인데 이리 자주 자리를 비우시면 황실 보좌관들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앤드류는 집사 초창기 시절 펠릭스에게 적응하기 전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떠올리다 그 고초를 그들이 겪고 있다고 생각하니 측은지심이 마구마구 생겨났다.

“…….”

하지만 그의 잔소리는 귓등으로 흘리며 집무실 창밖을 바라보던 펠릭스는 정원에서 제레미와 티타임 중인 엘리아를 발견했다.

“제 말 듣고 계십니까?”

“그래. 그래, 한데 엘리아의 상태는 좀 어떻지?”

“뭐, 그대로시죠.”

“흠…….”

“이렇게 와서 확인하지 않으셔도 바바리안 전서구를 이용해서 매일매일 보고드리고 있습니다만?”

“뭐, 그것도 있지만 북부도 신경 써야 하니, 내 눈으로 봐야 하지 않겠나.”

“체, 핑계는?”

앤드류는 어깨를 으쓱하며 놀리듯 가볍게 입을 나불거렸다.

“흠, 내가 없으니, 좀 살 만한가 보군. 입이 아주 자유분방해졌어.”

펠릭스가 얼굴을 찡그리며 지긋이 앤드류를 째려보았다.

“어허…… 큼!”

앤드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헛기침하며 애써 펠릭스의 시선을 외면했다.

“크흠, 그 별 탈 없으십니다. 아시다시피 회복 이후 요즘은 잠이 부쩍 느신 정도입니다.”

“항상 신경 써서 보살피고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꼭 알려라.”

애써 눈길을 피하는 앤드류의 모습이 못마땅했지만, 펠릭스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보고를 받았다.

“네, 항상 신경 쓰고 있습니다. 샤미르 양도 현재 회복 중이라 잠이 많이 늘어난 것이지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고 하더군요. 이능 제어 능력도 이전보다 더 자연스러워지셨고요.”

앤드류는 한참 동안을 펠릭스에게 엘리아의 일과를 줄줄이 보고했다.

그제야 펠릭스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앤드류의 어깨를 퍽퍽 친 뒤 집무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크윽……!”

힘이 실린 펠릭스의 손길에 앤드류는 말도 못 하고 멀어지는 펠릭스의 뒤통수를 노려보고 궁시렁거렸다.

“……아닌 척하시기는 그저 황후 마마만 쫄쫄. 애나 어른이나…….”

툴툴거렸지만, 앤드류는 펠릭스의 그런 모습이 보기 좋기도 했다.

“그래도 뭐, 이렇게 계속 행복하셨으면 좋겠네.”

곧 그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 * *

펠릭스는 빠른 걸음으로 정원에 다다랐다. 그는 티 테이블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엘리아에게 다가섰다.

엘리아의 옆에 앉은 제레미는 연신 그녀의 긴 금발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놀고 있었다.

펠릭스가 제레미의 머리 위에 살짝 손을 얹었다.

“제레미.”

“엉? 싫어요. 안 돼요!”

“응?”

“아버지 또 엄마 데려가려고!”

의자에서 폴짝 내려온 후 엘리아의 손을 꼭 잡은 제레미가 작게 으르렁거리듯 소리쳤다.

“허허, 그것참…… 제레미, 아버지가 생각을 해봤는데 말이다.”

“왜요? 뭐요?”

제레미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펠릭스를 올려다보았다.

“아버지가 앞으로 엄마 옆에 있을 시간이 넉넉하지 못할 것 같다.”

“그래서요……?”

“그러니까, 아버지에게 양보를 좀 해야겠는데.”

“……!”

그 말에 아이는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을 뾰족하게 올려 뜨며 볼을 부풀리기 시작했다. 잔뜩 심통이 난 표정이었다.

“싫어요! 엄만 내 거야!”

“아니지, 제레미. 엘리아는 내 아내이니, 내 것이다.”

아이는 졸고 있는 엘리아의 손을 더 꼭 잡으며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이 펠릭스를 노려보았다.

그 모습을 본 그가 가소롭다는 듯이 픽, 웃더니 제레미의 손을 엘리아에게서 하나씩 하나씩 떼어내었다.

“아앗, 치사해!!”

훗, 웃음을 날린 펠릭스가 엘리아의 몸을 들어 올렸다. 엘리아는 그런 소란 속에서도 깊이 잠들어 있는지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잠깐 데려가마.”

“힝, 너무해! 치사해!”

펠릭스가 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제레미는 쫄쫄 따라오면서 볼멘소리로 연신 투덜거렸다.

그 장면을 모두 지켜본 북부 성 사용인들은 입을 쩍 벌린 채 다물지 못했다.

‘그 카리스마 넘치던 폐하가…….’

“내가 못 살아. 다들 지켜보는데 저러고 싶으실까…… 쯔쯔쯔.”

그리고 그들 사이에 껴 있던 앤드류 또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펠릭스는 곤히 잠든 엘리아를 침대 위에 눕혀주었다. 작게 난 창 위로 비스듬히 햇살 한 줄기가 새어 들었다.

“이제 그만 어머니 쉬시게 해드리자. 이따 깨시면 다시 오너라!”

펠릭스의 축객령에 같이 들어섰던 아이의 볼이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아버지. 욕심쟁이, 흥!”

“……!”

제레미는 아주 많이 화가 났다는 듯 다리를 쿵쾅거리며 침실을 나갔다. 예전에는 펠릭스에게 드러내지 않던 감정을 요즘은 곧잘 표현했다.

그 모습이 어이없으면서도 아이답다는 생각에 결국 펠릭스는 웃고 말았다. 그리고 이내 깊은 잠에 빠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엘리아는 요즘 잠이 더 많아졌다. 그리고 그렇게 잠이 들 때마다 너무 깊은 잠에 빠지기도 하여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계속된 이능 사용 때문인지 걱정하기도 하였지만, 샤미르는 조금씩 사용하는 건 그녀에게 오히려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현재 북부는 엘리아의 이능으로 조금씩 사계절의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사라지자 북부는 웅크렸던 기지개를 켜고 그 어느 때보다 활력이 넘쳤다.

“잠꾸러기가 되어버렸군.”

펠릭스는 잠든 그녀의 얼굴을 보며 탐스러운 머릿결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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