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4화 (104/107)

그 말에 갈색 머리카락의 여자가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주위에서도 연신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낯선 사람들의 영문 모를 행동에 맑고 푸른 눈동자가 잔뜩 겁에 질려 흔들렸다.

“아무래도 기억을, 잃으신 것 같네요.”

오른편에 자리한 아이가 진지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아이답지 않게 성숙하다는 생각을 하며 엘리아가 시선을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바로 옆에는 분홍 머리카락의 새하얀 피부, 통통하고 붉은 입술을 오물거리는 아이가 잠들어 있었다.

“기…… 억?”

연갈색 눈동자 소녀의 말을 되짚어보던 엘리아는 무언가 답답한 마음에 미간을 찌푸렸다.

자꾸만 뭔갈 놓치고 있는 기분. 이게 뭐지, 여긴 대체 어디지. 이 사람들은 다, 누군데 여기서 이렇게 울고 있을까.

* * *

제국에 도착하니, 황태자는 반란의 주도자가 되어 비난받고 있었다.

지브릴과 스카디가 사태를 수습하며 소문을 퍼뜨린 덕분이었다.

황태자의 이능이 폭주하였고, 그로 인해 그가 황제를 죽였으며 제국을 쑥대밭으로 만들려던 걸 북부가 나서서 막았다는 이야기가 정설로 나돌았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사람들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이 사태를 진정시키고, 제국을 다시 부흥시킬 새로운 군주가 필요할 뿐이었다.

그리고 과거 신탁이 선황제에 의해 조작된 것임이 밝혀졌다.

예언가 카산드라가 황제의 핏줄을 이은 첫 아이가 제국을 살릴 것이라는 신탁을 받고 발표하려 하였으나, 이미 많은 전쟁으로 백성들의 원성을 듣고 있던 황제는 자신의 자리에 위협을 느끼며 그 신탁을 백성들에게 발표하기 전날, 카산드라의 목을 치고 신전을 피로 물들였다.

그리고 첫 아이가 제국을 파멸시킬 것이라는 거짓 신탁을 어린 날의 대주교에게 발표하게 하였는데, 결국 그런 잘못된 선택이 지금의 불행을 가져오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펠릭스를 비난하던 여론은 그가 세운 업적에 대한 찬사로 바뀌었다.

그렇게 펠릭스는 제국의 황제로 추대되었다. 선황제의 폭정에 억눌려 있던 귀족들은 그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권력의 한 축인 신전 또한 여전히 그의 편이었다.

제국민들도 하나같이 펠릭스를 지지했다.

그는 모두의 축복 속에서, 황좌에 올라섰다.

‘이게 이렇게 쉬운 일이었다니.’

허탈한 마음에 실소를 터뜨린 그는 귀족들과의 논의를 마치고 의회장의 문을 열었다. 그 앞에는 미리 대기 중이던 루카스가 서 있었다.

그 역시 제국민의 습격에 여기저기 생채기가 남은 상태였다.

“도련님께선 아직인데, 황후께선 하루 전에 깨어나셨다고 합니다.”

“뭐라? 깨어났다고?”

펠릭스의 반색하며 바로 뛰어갈 듯 움직였다.

“……주군!”

서둘러 걸음을 옮기던 펠릭스를 루카스가 불러 세웠다.

“왜 그러지? 서둘러라.”

“그게, 다른 소식도 함께 왔는데 아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이야기지?”

“그것이…… 기억을 모두 잃으셨다고 합니다.”

“기억을 잃어?”

순간 펠릭스는 얼굴이 돌처럼 굳으며 샤미르가 했던 말을 기억해 냈다. 생명력의 대가로 바쳐야 하는 희생.

멈추었던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지금 중요한 건 그녀가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 펠릭스가 마차를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기고 그 뒤를 루카스도 따랐다.

“다른 말은?”

“그게, 잘은 모르겠지만, 성격이 많이…….”

“뭐지?”

“조금, 이상해지셨다고…….”

크흠, 흠. 루카스는 연신 헛기침을 했다. 앤드류의 말을 그대로 전하려니, 몹시 민망했다.

펠릭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제레미가 시간을 돌리기 전 기억도 사라진 건가? 전부?’

많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기억을 잃고 불안해하고 있을 엘리아가 떠오르자 마음이 더욱 조급해졌다.

‘곁에 머물러 있어야 했는데…….’

걱정과 불안을 안고 펠릭스는 서둘러 황궁을 빠져나갔다.

* * *

쿵쿵쿵!

“마님! 이 문 좀 열어보세요! 마니임!!”

유리가 연신 문을 두들겼다. 깨어난 엘리아가 침실의 문을 꾹 잠근 채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 탓이었다.

“흐어엉, 어떡해요. 앤드류 님, 도저히 나오실 것 같지 않으세요.”

“이거 참, 곧 전하께서 오신다니까 좀만 기다…….”

탁!

순간 앤드류는 제 어깨를 짓누르는 손길을 느끼며 말을 멈추었다. 뒤돌아보니, 초조한 표정으로 거친 숨을 몰아쉬는 펠릭스가 서 있었다.

“전하! 엘리아 님께서 침실 문을 걸어 잠그신 채 도통 나오시질 않습니다.”

“하아. 제레미는?”

“도련님은 깨어나시진 않았지만, 많이 호전된 상태로, 샤미르 양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래, 일단 다들 물러가라. 여기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쉴 새 없이 달려오느라 헝클어진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펠릭스는 엘리아의 방 문 앞에 섰다.

똑똑.

그의 노크 소리에도 안에서는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펠릭스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숨어드는 건 엘리아답지 않았다.

한참 골똘히 생각하던 그가 다시금 문을 두드렸다.

“엘리아, 나야. 펠릭스. 이 문 좀 열어줄 수 있겠나.”

“…….”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펠릭스는 한참 동안 말없이 그녀가 문을 열어주기만을 기다렸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끼이이익-.

천천히, 아주 천천히 침실 문이 조금씩 열렸다. 그 사이로 여전히 은하수 같은 푸른 눈동자와 금실보다 더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보였다.

그녀의 눈빛은 살짝 불안해 보였지만, 여전히 따뜻했다.

그래서 펠릭스는 조금 마음이 놓였다.

“엘리아.”

천천히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움찔, 작고 가녀린 어깨가 움츠러들면서 그녀가 호기심 짙은 눈동자 위로 당황스러움을 내비쳤다.

펠릭스는 손을 거두고 작게 미소 지었다.

“미안해. 아직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는데, 무례하게 굴었군.”

“…….”

“그래, 천천히 다가갈게. 당신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여긴 당신을 위협하는 그 무엇도 없는 곳이니까.”

엘리아는 입술을 달싹거리기만 할 뿐,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고 미안한 듯 고개를 숙였다.

“당신이 지금 무슨 생각인지 난 잘 몰라. 아니, 어떤 생각을 해도 상관없어. 다만, 이것만 확실히 알아둬. 여기 있는 모두가 당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거.”

“네……? 모두가 저를요?”

엘리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럼, 당신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당신은 내 아이의 엄마고 모두가 존경하는 이 집안의 안주인이야.”

“제가요?”

“그럼, 그리고 당신은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나의 부인이기도 하지.”

그의 고백에 엘리아의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었다.

“그러니까. 너무 불안해하지 마. 당신의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 다시 당신이 마음을 열 때까지 그게 언제가 되더라도 기다릴 수 있어.”

“……저, 저는…….”

펠릭스의 진심이 느껴졌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녀의 가슴은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말 한마디, 손짓 하나하나가 그녀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했다.

“그래도 이거 하나만은 약속해 줄래?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당신도 노력해 주겠다고.”

“……네, 아직은 모든 게 낯설지만, 저를 위해 모두를 위해 노력할게요.”

그녀는 진심이 담긴 그의 목소리에 그제야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우당탕탕!

“어, 어……!!”

쿵!

황급히 달려오던 앤드류가 몸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바닥에 엎어졌다. 그 황당한 모습에 두 사람은 잠시 말을 잃었다.

“자네 뭐 하고 있나?”

“아, 흐윽…… 저, 전하! 도련님, 도련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 앤드류는 아픔에 일어서지 못하며 바닥에 엎어진 상태로 말했다.

“제레미가?”

“네, 흑 지금 깨어나셨습니다.”

앤드류의 눈가에서 기쁨의 눈물인지 아픔의 눈물인지 모를 물방울이 또르르 떨어졌다.

펠릭스와 엘리아의 시선이 마주쳤다.

“가지.”

덥석, 엘리아의 손목을 움켜쥔 펠릭스가 성큼성큼 제레미의 침실로 향했다. 엘리아는 영문도 모르고 따라가며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침실 문은 이미 활짝 열려 있었다. 엘리아는 침대 위에 뾰로통하게 두 볼을 부풀린 채 앉은 아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엄마 어디 가써!”

자그마한 팔로 팔짱을 낀 아이가 입술을 삐죽거리고 있었다. 이에 모두의 얼굴이 문 쪽으로 향하자 아이는 커다란 눈망울을 돌려 엘리아를 바라보았다.

토라진 얼굴 위로 금세 화색이 돌았다. 아이의 환한 미소를 보자, 엘리아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모든 게 낯선데, 심장은 아이의 행동 하나하나에 반응하고 있었다.

“엄마!!”

아이가 폴짝 뛰어와 엘리아의 치마폭에 얼굴을 묻었다. 하지만 곧 이상함을 느낀 제레미가 고개를 들어 엘리아를 쳐다보았다.

“엄마?”

엘리아의 표정이 이상했다. 평소 자신을 대해주던 그녀의 모습이 아니었다. 아이가 걱정 어린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어, 저 난…….”

엘리아도 갑작스럽게 아이가 안겨 오자 당황하고 있었다.

‘집사라는 분께 듣기는 했어. 이 아이는 대공 전하의 아이고, 나는 이곳의 대공비가 되었다고. 그리고 여태껏 너무나 잘 적응해 주었고, 모두가 나를 좋아한다고.’

그 말을 듣자마자 엘리아는 기분이 묘해졌다. 좋기도 하면서, 또 한편으론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아 답답했다.

‘나한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엄마아! 아파요?”

아이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엘리아의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엘리아는 천천히 손을 들어 아이의 포실한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보았다. 부드럽게 닿는 촉감이 기분 좋았다.

엘리아는 무릎을 굽혀 아이와 시선을 마주했다.

“……하나도 아프지 않아요. 그저 내가 지금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아서 그러는데, 정말 미안하지만 조금만 기억을 나눠줄 수 있을까?”

엘리아가 용기를 내어 아이의 말랑한 볼을 살짝 쓸어내리며 물었다.

와락!

제레미는 다시 그녀의 치마폭에 얼굴을 묻으며 머리를 도리도리, 어리광 피우듯이 엘리아 품에 비벼댔다.

“응. 엄마는 제레미 엄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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