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러진 그녀를 꽉 끌어안은 펠릭스는 문득 머릿속에 샤미르, 그 아이의 말이 떠올랐다.
“무리해서 영약을 두 개 만들어놓았어요. 제레미의 경과를 지켜보고 그래도 깨어나지 않으면 하나를 더 먹일 생각이에요.”
서둘러 엘리아를 안아 올린 펠릭스가 재빨리 알현실 문을 열었다.
쾅!!
그녀의 손끝이 제레미와 같이 점점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가자, 엘리아! 빨리 가면…….”
그들이 떠나고, 안에서 무언가 연쇄적으로 부서지는 소리가 황궁 전체를 울릴 정도로 크게 들렸다.
거대한 소음이 끊임없이 귀에 박혀 들었지만, 그걸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엘리아…….’
눈을 감고 있는 그녀를 보자, 마음이 한없이 무너져 내렸다.
콱 목이 멨다. 펠릭스는 2층까지 달려온 지브릴과 스카디, 그리고 북부의 기사단과 마주했다.
“무슨 일이야!”
정신없는 그를 붙잡은 건 지브릴이었다. 그에게 안겨 있는 엘리아의 파리한 얼굴이 모두의 눈에 들어왔다.
“부인께서…….”
스카디는 투명해지고 있는 엘리아의 손을 발견하고 놀라 입을 벌렸다.
펠릭스는 이를 악문 채 핼쑥해진 얼굴로 그들 바라보았다.
“다들, 뒤처리 좀 부탁하지…….”
“…….”
“네. 알겠습니다. 이곳은 저희에게 맡기시고, 얼른 부인을 살리세요.”
스카디는 엘리아의 상태를 확인한 후 비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펠릭스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가 이내 달리기 시작했다.
* * *
펠릭스는 황궁 앞에 대기 중이던 말을 타고, 선착장으로 향했다. 선착장에 도착한 펠릭스는 가벼운 재목으로 만들어져 빠르게 북부에 도착할 수 있는 배에 올랐다.
펠릭스는 배를 타고 가는 내내 엘리아를 끌어안고 있었다.
“엘리아 제발, 버텨줘.”
그의 몰골은 엉망이었다. 제복은 이그니스와의 싸움에 여기저기 찢겨 있었고, 감은 한쪽 눈에서는 이따금 핏물이 배어 나왔다.
쿵쿵-.
미약하게나마 엘리아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
‘버텨, 엘리아. 당신이 사랑하는 제레미를 위해서라도 버터야 해. 그리고 나를 위해서도…….’
펠릭스의 눈에서 핏빛의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 * *
“마, 님께서도 몸이…….”
북부 성 로비에 있던 앤드류가 펠릭스를 향해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는 사색이 된 얼굴로 펠릭스의 품에 안긴 엘리아를 바라보았다.
북부 성까지 오는 사이 엘리아의 몸 전체가 흐릿해져 있었다. 펠릭스는 앤드류의 말에 대답 없이 서둘러 계단을 올랐다.
제레미의 침실 앞에는 의원과 다수의 시종이 몰려 있었다. 모두를 제치고 펠릭스가 벌컥, 제레미의 방문을 열었다.
“제레미…….”
이불을 덮은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제레미 옆에는 샤미르가 앉아 있었다.
“남은, 남은 영약이 있다고 했지?”
여느 때와 다르게 떨리는 펠릭스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눈을 크게 뜬 샤미르가 곧이어 다가와 차분하게 엘리아의 상태를 보기 시작했다.
“……이능의 무리하게 사용했군요.”
“살 수, 있겠나?”
간절한 그의 목소리에 진지한 낯빛으로 고민하던 샤미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살 수는 있어요. 하지만 그때 제가 말했죠? 시간이 돌아가기 전에 아무도 이 영약을 복용한 사람이 없다고. 이 약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에요. 생명력을 복구할 수 있지만, 그에 따라 어떠한 희생이 따를 수도 있어요.”
샤미르의 말에 펠릭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엘리아를 내려다보았다.
‘희생.’
상관없었다. 애초에 제레미와 엘리아, 제 목숨과 같은 두 사람이 살 수만 있으면 그것이 무엇이든 오롯이 자신이 감당하겠다고 다짐했다.
펠릭스는 엘리아를 품에서 내려 제레미 옆에 눕혀주었다. 그녀는 아까보다 더 투명해져 있었다.
“엘리아 님에게 영약을 먹일게요. 제레미에게 더 이상 영약이 필요하지 않아 다행이네요.”
펠릭스 뒤에 서 있던 샤미르가 투명한 병을 꺼내 들며 말했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엘리아의 입에 조금씩 영약을 흘려 보냈다.
이제는 모두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나란히 누운 채 눈을 감은 두 사람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펠릭스의 한숨이 깊었다.
휘이이잉, 덜컹덜컹-.
세차게 부는 바람에 북부의 작은 창이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의 북부는 너무나 춥고, 어두웠다.
* * *
하루가 지났을 때쯤, 엘리아와 제레미의 몸이 예전처럼 선명해졌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아직 깨어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샤미르는 생명력이 복구되고 눈을 뜨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것이라고 했다.
엘리아가 쓰러진 지 이틀이 되던 날, 제국에서 서신이 도착했다.
귀족들이 모여 회의를 열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황제가 죽고 그 뒤를 이을 황태자까지 사망하여 제국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고 했다.
펠릭스는 이 상황을 정리할 유일한 인물로 다시 제국으로 가야만 했다.
“제국에 갈 채비를 다 마쳤습니다.”
“……그래.”
대답하고 나서도 펠릭스는 차마 발을 떼지 못했다. 그저 한참을 엘리아와 제레미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바로 옆에는 샤미르가 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다.
“차마 발이 안 떨어지십니까.”
앤드류의 물음에 펠릭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늘 그래 왔듯이, 잘 이겨내실 겁니다.”
“그렇겠지. 늘 그래 왔으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앤드류가 두 눈 크게 뜨고 깨어나시는 걸 확인하면 바로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무척이나 밝은 어조였지만, 앤드류의 표정에도 숨기지 못한 염려가 섞여 있었다.
“……회의에 늦겠습니다.”
펠릭스는 마지못해 발걸음을 옮겼다. 누군가 그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진 것처럼 걸음이 무거웠다.
* * *
엘리아는 생전 처음, 온통 맑고 푸른 물로 가득 들어찬 세상을 마주했다.
그 세상은 엘리아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으나, 엘리아와는 별개의 공간처럼 전혀 그녀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다.
엘리아가 딛고 선 공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곳에 있으니, 슬픔과 기쁨, 분노, 외로움 따위는 어느새 다 사라지고 없었다. 그저 고요하게, 그저 그렇게 서 있을 뿐이었다.
그때 눈앞의 세계에 균열이 생겼다. 엘리아는 멍하니 그 균열의 틈새로 들어서는 페가수스를 보았다.
“……!”
책에서만 보았던 페가수스의 자태에 입을 벌린 채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사방으로 펼쳐진 거대한 날개와 머리 위에 얹은 가시 왕관, 그리고 금빛의 큰 수레바퀴를 입에 문 모양에서 헬리오스 석상이 떠올랐다.
[너는 금기를 범하였다.]
어디선가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
엘리아는 소리가 난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서는 페가수스를 바라보았다.
“금기요?”
[그래. 내가 내린 이능으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것도 모자라, 감히 신의 영역까지 손을 대었지.]
사람까지 얼어붙게 만들 정도로 확장되었던 그녀의 이능. 그것을 말하는 걸까?
[선택하라.]
“……무엇을 선택해야 하나요?”
[네가 간직해 온 기억과 배 속의 생명 중 무엇을 택할 테냐.]
*** “배 속의 생명…… 설마!”
엘리아는 제 배를 감싸 안았다. 샤미르가 내어준 포션을 마시면서 건강이 회복되었다고는 생각했는데, 임신을 할 수 있었던 걸까.
[나는 네게 선택지를 주었다.]
“잠시만요! 제레미는요? 제레미는 무엇을 잃었죠?”
[나는 네게 질문을 허락하지 않았다.]
“선택하라니요, 전 그 무엇도…….”
고개를 가로저은 엘리아의 두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어리석은 인간. 이 또한 너를 불쌍히 여기는 내 자비라는 것을 어찌 모르느냐.]
‘기억과 우리 모두의 아이…….’
감싸 쥔 배를 내려다보던 엘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펠릭스와의 사랑이 새 생명이라는 결실을 맺는다면, 그가 얼마나 기뻐할까.
외로운 제레미에게 동생이 태어난다면, 그 아이가 얼마나 좋아할까.
[아이를 선택했구나.]
엘리아의 생각을 읽은 듯 페가수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아니, 잠시만요! 어어?”
엘리아가 페가수스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이후였다.
곧이어 어딘가에서 흘러들어 온 물줄기가 엘리아의 다리를 적시며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잠시만요! 전 아직 선택하지 못했……!”
엘리아는 멍하게 서 있다가 천천히 뒤로 돌았다. 순식간에 어둠이 밀려들어 엘리아를 삼켰다.
“뭐지, 뭔가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기분…….”
검은 그림자가 그녀 내부에 스며들어 기억을 조각내고 그 파편을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이 부숴놓았다.
“으, 으읏!”
깨질 것 같은 두통을 느끼며 엘리아는 몸을 움츠렸다.
번쩍.
눈을 뜨자 주변엔 사람들이 한데 모여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었다.
“마님, 흐어엉!! 드디어, 드디어…….”
“대공비께서 깨어나셨다!”
“다행입니다. 다행이에요.”
축축 늘어지는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누구, 세요?”
이불을 움켜쥔 채 경계하듯 몸을 움츠린 엘리아가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마, 마님…… 훌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