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2화 (102/107)

“제가 순순히 따를 테니, 저들은 그냥 보내주세요.”

“흥, 내가 왜 그 말을 따라야 하지?”

엘리아의 말에도 기사단장은 콧방귀를 뀌며 명령했다.

“다 죽여!”

기사들이 움직이려는 순간, 그녀가 다시 한번 이능을 사용했다.

쏴아아아아-.

황궁이 순식간에 폭우에 휩싸였다. 거센 빗줄기에 창이 금방이라도 깨질 듯 흔들거렸다.

“계속하신다면 제국을 물바다로 만들겠어요. 믿지 못하시겠다면 보여 드려요?”

시퍼렇게 불타는 눈으로 엘리아가 단호하게 소리쳤다. 그 모습을 본 모두가 움찔 몸을 떨었다.

콰콰광!

그 순간 하늘에서 벼락이 내리쳤다.

“…….”

기사단장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엘리아를 노려보았다. 엘리아 또한 그의 시선을 당당하게 맞받아쳤다.

매서운 빗줄기가 황궁에 내리꽂히며 내부를 뒤흔들었다. 안 그래도 어둑했던 바깥이 이내 암흑으로 뒤덮였다.

“……대공비 전하를 모셔라.”

“네!”

그녀의 기에 눌린 그들이 결국 한발 물러섰다. 기사들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비 전하!”

“엘리아……!”

지브릴과 대주교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쉽사리 나서지 못했다.

“저는 괜찮아요.”

엘리아는 입 모양으로 두 사람만 보이게 말하며 그들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그녀 역시 떨리는 건 마찬가지였다.

쿵쿵쿵-.

심장이 빠르게 요동쳤다.

‘괜찮아. 제레미가 애써 살려줬는데, 절대 쉽게 죽지 않을 거야.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 북부로 돌아가겠어.’

엘리아는 황실 기사단에게 끌려가는 와중에도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대공비를 확보했다. 폐하께 말씀드려라.”

“네!”

기사단장의 명령을 받고 달려가는 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녀는 황궁 내부가 전과 다르게 엉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직 펠릭스가 안으로 진입하지 않았는데도, 내부는 막 전투를 마친 것처럼 곳곳이 부서지고 흐트러져 있었다.

2층으로 향하는 계단 쪽에는 여기저기 기사들의 시체가 나뒹굴었다. 대리석 위에는 길게 이어진 핏자국이 보였다. 그 핏자국은 황제의 알현실로 쭉, 이어져 있었다.

그녀는 이윽고 핏자국이 낭자한 알현실 문 앞에 섰다.

“들어가십시오.”

기사단장이 엘리아의 등을 떠밀었다. 그녀는 천천히 황금과 붉은 기운이 감도는 커다란 문을 열었다.

끼이익.

육중한 문이 열리고 들어선 내부는 핏물이 흥건했고, 황제가 있어야 할 황좌에는 황태자가 비릿한 웃음을 짓고 앉아 있었다.

“오셨습니까.”

황태자의 하얀 얼굴 위로 잘게 피가 튀어 말라붙어 있었다. 씨익 웃는 입술은 너무 이질적으로 천진하고 해맑았다.

“고맙게도 형님께서 아버지의 세력을 대부분 처리해 주셔서 말이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황태자의 발밑에는, 위엄이 넘치던 황제가 쓰러져 있었다. 그 주변으로 피가 낭자하게 깔려 웅덩이를 이루었다.

“아, 하하하하. 놀라셨습니까? 우리 폐하께선 어찌나 목숨 줄이 질기시던지. 애 좀 먹었습니다. 제가 검을 다루는 데는 영 소질이 없어서 말이에요.”

“…….”

엘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턱, 숨이 막혔다.

“사실 형님을 죽인 후에 모든 일을 마무리할 계획이었지만, 애석하게도 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아르티젠이 황궁에 쳐들어올 것이란 말을 듣고 폐하께서 어찌나 역정을 내시던지, 그게 들어줄 수 없을 정도였던지라…….”

내내 웃는 얼굴이던 황태자의 낯빛이 싸늘해졌다.

“왜? 내가 무서운가?”

순식간에 바뀐 얼굴에 우수수 소름이 돋았다. 움찔, 몸을 떤 엘리아가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내가 왜 굳이 그대를 살려서 불러들였는지 아나?”

황태자의 목소리에 엘리아는 두 눈을 꾹 감은 채 고개를 저었다. 광기에 사로잡힌 그의 얼굴을 보기가 두려웠다.

“형님이 괴로워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거든. 크흐하하하! 내게서 그녀를 뺏어 가고 죽인 놈이 행복해하는 꼴이라니.”

“……!”

“기회를 주지. 나에게 와라!”

황태자가 병사가 손짓하자 활시위가 그녀를 향했다.

“네가 망설이는 시간만큼 활시위는 뒤로 당겨질 거야. 대체 뭘 망설이는 거지? 나에게 오면 너는 나와 함께 제국을 다스리며 부귀영화를 누릴 텐데?”

그는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로 천천히 황좌에서 일어섰다.

꾸욱.

피가 튀었다.

뚜벅, 뚜벅, 뚜벅.

황제를 짓밟고, 그가 천천히 엘리아 앞으로 걸어왔다. 그녀는 황태자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뒷걸음질을 치기 바빴다.

“모두, 모두 당신 짓이었어. 이능에 홀린 백성들도, 마물을 풀어 수도를 쑥대밭으로 만든 사람도 전부…….”

“아아, 마물. 그래. 그게 황궁 밖으로 나간 건 참 유감이야. 그건 그저, 형님을 위해 마련된 선물이었거든.”

그의 말에 엘리아가 눈을 치켜떴다. 그는 재밌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당신은, 당신은 미쳤어……!”

“크흐흐흐, 이번에도 형님을 선택할 건가?”

둘 사이는 점차 더 가까워졌다. 결국 황태자의 얼굴이 바로 앞까지 다다랐다.

“다가오지 마!”

그가 잔뜩 피가 묻은 손을 들어 그녀의 하얀 볼을 쓸어내렸다.

“윽!”

엘리아의 얼굴 위로 길게 핏자국이 남았다.

쾅!

잔혹하게 웃음 짓던 황태자가 다시 입을 열려던 순간, 육중한 문이 거칠게 열렸다.

“펠…….”

펠릭스가 누구 것인지 모를 검붉은 핏물을 흠뻑 뒤집어쓴 채 서 있었다. 한쪽 눈을 다쳤는지 채 뜨지 못하고 헉헉,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짝짝짝.

“오~, 또 살아왔네. 역시 전쟁 영웅은 뭐가 달라도 좀 달라. 그렇죠, 대공비?”

“…….”

“미친 새끼.”

이를 으득 간 펠릭스가 죽일 듯이 황태자를 노려보았다. 그의 거침없는 욕설에 황태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아, 그래. 형님은 이렇게 엉망일 때가 제일 사람 같아.”

황태자의 광기 어린 얼굴 뒤로 황제가 피범벅이 되어 쓰러져 있었다. 펠릭스는 분노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대체, 왜 이런 짓을……!”

“훗.”

“이러지 않아도 곧 황제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펠릭스가 바닥에 검을 꽂고 선 채 소리쳤다.

그의 처절한 외침에 황태자는 호선을 그리던 입가를 누그러뜨렸다.

“그래. 펠릭스 로이드, 넌 잘 모르겠네. 황제는 늘 너와 날 비교했어. 고작해야 약소국 반란에 지레 겁먹고 도망친 비겁한 노친네 주제에 감히. 나를, 너랑 비교했다고.”

“그래서, 고작 그런 이유로 아비를 죽이고 제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았나! 이대로 네가 황좌에 오른다고, 백성들이 널 가만히 둘 것 같나?”

“하. 형님. 보세요. 제 이능의 힘을. 다들 이런 황제여도 충성을 맹세하고 있지 않습니까?”

황태자는 두 팔을 넓게 펼친 채 빙글, 뒤를 돌아보았다. 엄청난 수의 기사들이 두 눈을 붉게 물들인 채 고개를 조아렸다.

“보셨습니까? 이게 나야. 내가 이 제국의 황제라고!”

뒤로 돌아 펠릭스를 노려보는 황태자의 두 눈이 새빨갛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엘리아는 언뜻 샤미르에게서 들은 말을 떠올렸다.

“이능은, 가끔 보유자의 감정에 힘을 실어요. 그만큼의 마나를 갖고 있지 않은데도 폭발적인 능력을 선보일 때가 있죠. 근데, 그거 위험한 거예요. 마나를 그런 식으로 이용하게 되면 곧 소멸하게 돼요.”

황태자가 엘리아를 펠릭스에게 밀어 던졌다. 그리고 기사단에게 손짓하자 화살이 일제히 엘리아와 펠릭스를 겨냥했다.

“엘리아!!”

“펠!”

펠릭스는 넘어지듯 안겨 오는 엘리아를 잡고 빠르게 그녀를 자신의 뒤로 보냈다. 엘리아는 그녀를 등지고 선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아. 제아무리 제레미가 시간을 되돌려준다고 한들, 어쩌면 이건 우리의 운명이었을지도 몰라.’

그러나, 엘리아는 그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 엘리아는 펠릭스에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제 등에 닿아 있던 온기가 사라졌음을 느꼈는지 그가 뒤로 돌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푸른 기운이 감돌고 곧 오색의 찬란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쩌저적, 쩍-.

황궁 내부가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엘리아는 완벽하게 계절을 조절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고 그 이능은 이전까지 하늘과 땅이 드러나는 외부에서만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녀가 내재한 능력은 그것만이 다가 아니었다.

그녀의 주변으로 푸른 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쳤다. 금실 같은 머리카락이 팔랑팔랑, 허공을 떠다녔다.

그 광경을 목격한 펠릭스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서 있었다. 엘리아의 온몸에서 말간 마나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곧, 엘리아와 펠릭스를 제외하고 모든 것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그건 황태자와 그를 호위하던 기사들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활을 당겨라.”

위험을 감지한 황태자가 소리 질렀다. 하지만 이미 그들의 몸은 굳어 움직이질 않았다.

“어? 어.”

활시위를 겨냥했던 이들의 발밑에서부터 얼음이 덩굴처럼 타고 올라갔다. 그리고 황제의 피 웅덩이를 밟고 서 있던 황태자의 온몸도 얼음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멈춰! 멈……!”

황태자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얼음은 그의 얼굴까지 타고 올라가 모든 것을 멈추게 했다.

웅웅-.

세찬 바람이 알현실 내부를 맴돌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펠릭스가 황태자가 서 있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황태자가, 그리고 모든 게, 딱딱하게 얼어붙고 있었다.

“……엘리아.”

펠릭스가 엘리아를 불렀다. 파리하게 질린 낯빛으로 엘리아가 비틀거렸다. 그는 쓰러지는 그녀를 재빨리 받아 안은 채 주저앉았다.

“제레미가…… 보고 싶어요. 쿨럭, 쿨럭!”

말을 내뱉을 때마다 왈칵, 피가 토해졌다.

“엘리아. 엘리아! 당신, 대체 어쩌자고 이런 무모한 짓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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