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100/107)

승리를 다짐하는 기세등등한 루카스의 얼굴을 보며, 펠릭스는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 * *

부우웅- 부우웅- 부우우웅-.

뱃고동 소리가 여러 번, 길게 울려 퍼졌다.

해란의 선착장은 카타미아 왕국에서 지원 온 여러 척의 선박과 북부의 전투용 선박으로 빼곡했다.

엘리아는 드레스가 아닌 제복을 입고 로브를 두른 채 펠릭스 옆에 서 있었다.

“안녕. 오랜만이다. 엘리아.”

한결 제국어 발음이 능숙해진 카타미아 왕 지브릴이 그녀의 앞에 있었다.

그는 왕이라는 자리에 걸맞게 위엄과 진중함을 어느새 갖추고 있었다.

엘리아는 그의 성숙해진 모습에서 제레미를 떠올렸다.

해란에 오기 직전, 엘리아는 모두와 함께 샤미르가 제레미에게 영약을 먹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신기루처럼 사라질 듯 투명해지던 몸이 점차 제 형태를 되찾는 것까지 보고 서둘러 펠릭스와 이곳에 온 것이었다.

‘제레미가 깨어날 때쯤, 모든 일은 마무리되어 있어야만 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엘리아는 제 앞에 선 지브릴에게 고개를 숙였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전하.”

“엘리아 부탁이라면 뭐든, 뭐든 해줄 수 있다.”

그의 말에 펠릭스는 영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지브릴은 개의치 않고 엘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런 지브릴 옆에는 바바리안의 수장, 스카디 역시 자리하고 있었다.

“스카디 역시, 정말 감사해요.”

“평생 속죄하면서 살겠다고 했잖아요. 로이드 부인, 이번 일이 잘 마무리된다면 친우와 동맹으로서 서로 더 가까워졌으면 좋겠습니다.”

“당연한 말씀이에요.”

엘리아의 대답에 스카디가 이가 드러날 정도로 환히 웃었다.

엘리아는 시간을 되돌아와서 노력했던 순간들이 지금 빛을 발한다는 생각에 벅찼다.

그리고 그녀는 제 옆에 자리한 남편을 바라보았다. 한평생 사랑하고, 지켜주겠다고 다짐한, 소중한 사람이었다.

“엘리아. 지금이라도 제레미 곁으로 가는 게 낫지 않겠나.”

그의 눈동자 속엔 근심이 가득 어려 있었다. 엘리아는 미소를 머금은 채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제가 당신보다 훨씬 관록이 있을걸요? 전 분명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자신할 수 있어요.”

엘리아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어느 때보다 또렷하고 반짝거렸다.

그녀는 아이의 침대맡을 지키며 했던 다짐을 다시금 마음에 되새겼다.

‘모두를 지켜내겠어.’

그렇게 모두가 각자의 신념을 가지고 전함에 올랐다.

정찰을 위한 소형 군선이 앞서 나가고, 그 뒤를 거대한 전함들이 잇따르며 안드리나 해협을 지났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위이이잉-.

거대한 경보음이 들렸다. 모두가 전투태세에 돌입하며 내부는 긴장감으로 한층 소란스러웠다.

“전하, 저 멀리 백여 척의 전함이 길을 막고 있습니다!”

“예상했던 일이다. 함포를 준비하지.”

“함포를 준비하라!!”

“함포를 준비하라!”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윙윙, 경보음은 어려운 여정을 예고하듯 계속해서 울렸다.

“엘리아, 당신은 이곳에 있어.”

선박 내부로 엘리아를 이끈 펠릭스가 서둘러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펠……!”

엘리아가 그를 불러보았지만, 그는 사다리를 타고 갑판 위로 단숨에 올라갔다.

* * *

쿠구궁-!!

엄청난 굉음과 함께 폭발이 일었다. 카타미아 왕국에서 내준 함포는 은빛의 화려한 자태만큼이나 뛰어난 화력을 자랑했다.

그 결과, 갑판 위에는 거무스름한 연기가 지독한 화약 냄새와 함께 내내 맴돌았다.

“전하! 적함들이 방향을 돌려 후퇴하고 있습니다!”

적들은 예상치 못한 폭탄의 화력에 놀라 허둥지둥 배를 돌리고 있었다.

“이대로 밀고 나가도록 하지.”

“네!”

함포에서 발사된 폭탄이 단번에 제국의 전함 열댓 척을 무너뜨린 이후로 항해는 순조로웠다.

주변 적함을 향해 발광 신호를 보내자, 그들은 지레 겁먹고 길을 트기 시작했다.

펠릭스가 탄 전함을 필두로, 아군의 전함들이 주변을 감싸며 물길을 가로질러 나갔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전함 하나 침몰하지 않고 제국 선착장 앞까지 무사히 밀고 들어왔다.

하지만 선착장에는 이미 그들을 기다렸다는 듯 엄청난 수의 황실 기사단이 죽 늘어서 있었다.

“펠…….”

갑판 위에 서서 사방을 둘러싼 군단을 바라보던 펠릭스가 뒤돌아섰다. 어느샌가 다가온 엘리아가 그의 앞에 섰다.

“다행히 우리의 피해는 없어 보이네요.”

“카타미아 왕국의 화력이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었어. 이제부터 시작이야.”

“그렇네요.”

엘리아의 눈에 선착장에 늘어선 황실 기사단이 보였다.

“저들을 뚫고 올라가기가 조금 힘들 것 같네요?”

“…….”

백병전이라면 자신 있었지만, 문제는 선착장으로 발을 들여놓기 전 원거리에서 날아올 화살과 화약이었다.

선착장에 내려서기 위해서는 잠시라도 저들을 멈출 수 있는 것이 필요했다. 그렇지 않다면 아군들의 상당한 희생이 뒤따를 것이다. 예상한 일이지만 편치 않은 현실이기도 했다.

“그래도, 해야겠지. 한번 시작했으면 끝을 맺어야 하는 법이니까!”

고심하는 펠릭스의 어깨 위로 따스한 온기가 스몄다. 엘리아의 손길이었다.

“펠, 제게 방법이 있을 것 같네요. 날 믿어봐요.”

펠릭스는 그녀가 어떤 일을 실행하려는지 알고 만류하려 했다. 하지만 엘리아의 표정은 단호했다.

엘리아의 당부와 그의 지시로 모든 선박 가판에 나와 있던 기사단 모두가 일제히 내부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온 엘리아가 결연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상당한 포션을 흡수해 온 엘리아의 눈동자 주위로 어마어마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날이 흐려지고, 사방이 구름에 가려 어두워지자 빗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져 내렸다.

우르릉, 천둥이 크게 울려 퍼졌다.

쏴아아-.

순식간에 제국 선착장 일대에 장대비가 쏟아졌다. 점차 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쳤다.

북부 기사단을 저지하려 최전선에 배치된 황실 기사단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그들 몇몇은 너무 거센 바람에 휘청이다 못해 중심을 잃고 바다에 풍덩 빠지기도 하며 혼란에 휩싸였다.

그 뒤로 선착장을 둘러싸듯 지키고 있던 병사들 역시 갑작스러운 폭우에 눈도 뜨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세차게 쏟아지는 비가 그들의 앞을 가리고 있었다.

“지금이에요!”

엘리아가 소리치자 배가 빠르게 선착장으로 이동했다. 곧 펠릭스와 기사들은 선실에서 벗어나 빠르게 가판 위로 올라갔다.

북부 기사단과 카타미아 왕국 기사단, 바바리안으로 이뤄진 군단이 함성과 함께 선박에서 뛰어내렸다.

엘리아는 펠릭스와 함께 말에 올라탔다.

‘아아, 정말 전쟁이 시작되었구나.’

엘리아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이능을 갈무리했다. 그러자 폭풍처럼 몰아치던 비바람이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어마어마한 수의 군단과 마주 서자, 긴장감과 두려움이 사지를 바짝 조여 왔다.

펠릭스는 한 손에 든 검을 치켜들었다.

“돌격!”

그의 목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 “와아아!”

엄청난 고함이 터지는 동시에 펠릭스와 기사들이 황실 기사단에 부딪쳤다. 흉폭하게까지 보이는 북부 기사단의 기세에 적들은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 사람, 한 사람 전쟁의 신이라도 된 듯 전장을 휩쓸고 날뛰었다.

일격에 적들이 나가떨어지고 있었다.

펠릭스군의 화살은 정확하게 적의 심장을 관통했다. 그리고 그들의 칼은 지금까지의 설움을 토해내듯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적들을 베어내고 있었다.

그 무엇도 그들을 막을 수 없었다.

펠릭스와 기사단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비명과 피가 난무했다.

‘그래, 이들이 제국과 대적하지 않은 이유는 순전히 펠릭스의 뜻이었구나.’

그들의 전투가 경이롭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상황은 북부에 유리한 쪽으로 흘러갔다.

지브릴이 내어준 연화는 개조되어 작지만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상당수의 황실 기사단이 폭발로 와해되었고 그 주변은 쑥대밭이 되었다.

‘이대로만 간다면, 금세 황성까지 도달할 수 있을 거야.’

쿵쾅쿵쾅, 펠릭스의 곁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엘리아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모두가 서둘러 제국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나비탄 강의 다리를 건널 때쯤이었다.

제국민들이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대공 전하 앞에 이 무슨 무례냐! 무엄하다, 모두 길을 비키거라!”

루카스가 앞장서서 소리쳤다. 그가 타고 있는 검은 명마의 투레질 소리가 귓속에 선명하게 박혀 들었다.

“더는, 더는 못 가십니다.”

“못 갑니다. 가려면 저희를 죽이고 가십시오.”

이들은 멍한 눈빛을 한 채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농기구를 휘두르며 기사단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게 무슨……!”

재빨리 검을 들어 그들을 제지한 루카스가 난처한 듯 뒤를 힐끗 돌아보았다.

“이능에 홀린 거예요! 무고한 사람들이에요!!”

엘리아는 최대한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사벨라에게서 보았던 붉은 기운이 그들 눈 속에도 어려 있었다.

“하. 내가 백성들을 해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이렇게까지 최악이라니.”

펠릭스가 이를 악물며 중얼거렸다. 이에 루카스의 옆에서 거대한 도끼를 휘두르는 사내를 막아선 스카디가 외쳤다.

“기절시키죠!”

그녀는 날렵하게 검을 돌려 손잡이로 사내의 뒷덜미를 내리쳐 쓰러뜨렸다.

기사들도 스카디를 따라 최대한 제국민들이 다치지 않게 애쓰며 그들을 제압했다. 강한 무력을 가진 아군에게 제국민들은 큰 위협이 되지는 못하였다. 잠시 시간만 지체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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