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레미의 손을 부여잡은 채 속으로 눈물을 삼키던 엘리아는 심신이 지친 탓인지 스르르 선잠에 빠져들었다.
언젠가 꿈에서 보았던, 아르티젠 북부의 풀밭이 눈앞에 있었다.
그리고 풀밭을 뛰노는 제레미의 뒷모습이 보였다.
“제레미……!”
엘리아의 목소리를 들은 듯 뒤돈 아이는 만면 가득 웃음꽃을 피운 채 사랑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봐 주었다.
* * *
황궁 옆에 웅장하게 자리한 신전. 펠릭스는 신전의 본당이 아닌 헬리오스의 석상이 있는 뒤편으로 천천히 말을 몰았다.
“오셨습니까.”
그곳엔 막시밀리안 대주교와 사제들이 공손히 두 손을 모은 채 서 있었다.
“소식은 들었겠지.”
펠릭스가 진지한 어조로 물었다.
“자초지종을 듣긴 하였습니다만, 쉽게 답할 수 없습니다. 이 일은, 저뿐만이 아닌 신전 모두의 사활이 걸린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 그렇겠지. 황제가 그대들을 가만두지 않을 거야.”
“……혹여나 해서 묻겠습니다. 신전을, 버릴 생각이십니까.”
대주교의 눈동자는 마치 심해처럼 한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펠릭스는 굳혔던 표정을 풀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10년 전, 난 아직도 비 내리던 그 날 밤을 똑똑히 기억해. 그대가 내게 찾아와 무릎을 꿇고, 그 날의 비참함을 반복하지 않을 기회를 달라 그랬지.”
“…….”
“내 아들을 살릴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그 기회를 만들어볼 생각이야.”
펠릭스의 말에 대주교는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떴다.
“……드디어 백성들에게 신탁의 진실을 알릴 생각이신 겁니까?”
“그래.”
간단명료한 대답이었다. 그 짧은 대답을 흡족하게 받아들인 대주교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신의 권능이 담긴 조각은 지금 황궁에 있습니다. 모든 성물은 예언가 카산드라 님이 살해당한 직후, 황실로 귀속되었습니다. 찾아올 수 있도록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고맙군.”
“……신전에 속한 모든 이의 목숨이 달린 일입니다. 부디, 대의를 위해 희생을 불사한 저희를 잊지 마십시오.”
대주교의 말에 펠릭스가 진지한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발 빠르게 황궁에 몰래 침입할 준비를 시작했다.
* * *
대주교가 사제들을 이끌고 황실의 제단 앞에 섰다.
그는 제단을 바라보며 늘 그랬듯이 경건한 자세로 무릎을 꿇었다. 제단을 지키는 황실 기사단은 그의 주변에 서서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매번 똑같이 진행되는 의식에 황실 기사단의 표정은 여유롭다 못해 심드렁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뒤에 선 사제들은 평소와 달리 무릎을 꿇지 않았다. 그 모습을 황실 기사단이 의아한 표정으로 살펴볼 때였다.
사제로 변복한 북부 기사들이 하얀 로브를 벗어 던지고 펠릭스를 필두로 황실 기사단에게 달려들었다.
“치, 침입자다…… 켁!”
“크윽, 컥!”
“흐윽!”
소란이 퍼질 틈도 없이, 소수의 북부 기사들은 수십의 황실 기사단을 깔끔하게 처리했다. 그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뺨 위에 튄 피를 닦아내던 펠릭스의 뒤로, 기도를 올리던 대주교가 섰다.
“이게, 신의 권능이 담긴 조각입니다.”
펠릭스는 대주교에게서 조각을 넘겨받았다. 그 조각은 어린아이의 손바닥만 한 크기로 이슬같이 맑은 빛을 띠었다. 그가 주머니 속에 조각을 넣었다.
“황제가 성물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눈치채기 전에 돌아오지. 그때까지 최대한 버티도록 해. 신전은 책임지고 살릴 테니 걱정 말고.”
“……이미 한번 모시는 신 앞에 떳떳하지 못했던 몸입니다. 그런 제가, 죽음이 두렵겠습니까? 그저 제가 아닌 신전을 모시는 이들의 안전을 확보하고 제가 거짓으로 고했던 신탁만 바로잡으면 될 일입니다.”
대주교가 결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게 제 오랜 바람이자, 아직도 이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이유이지 않겠습니까.”
“……아니, 살아. 살도록 해. 막시밀리안.”
펠릭스의 말에 대주교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봐. 그대가 선택한 사람이, 어떻게 제국을 다스리는지.”
그 말을 끝으로 그가 뒤돌아섰다. 막시밀리안 대주교는 그의 등 뒤로 깊이 허리를 굽혔다.
“제국에 새로운 태양이 뜨는 그 날까지, 꿋꿋이 살아서 보필하겠습니다.”
펠릭스의 뒤로 소수의 기사단이 따라붙었다. 그러나 대주교의 눈에는 수만 명의 사람이 그를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의, 황제 폐하시여.”
* * *
성물을 가지고 귀환한 그 날, 펠릭스는 북부에 총동원령을 선포했다.
펠릭스의 명령에 따라 북부의 기사단이 전부 소집되었다. 바바리안 역시 북부를 도와주겠다고 나섰고, 카타미아 왕국도 도움 요청에 흔쾌히 응했다.
샤미르 역시 조각을 건네받자마자 빠르게 연구에 착수했다.
모두가 정신없는 이때, 엘리아가 펠릭스의 집무실을 찾았다.
똑똑.
“들어와.”
건조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루카스나 앤드류가 온 줄 알았는지 그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펠, 저예요.”
엘리아가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와 말했다. 끼익, 의자에서 엉거주춤 일어선 그가 그녀를 맞았다.
“엘리아.”
“……이야기 들었어요.”
“……그래. 마침 잘됐어. 오늘 밤 당신에게도 전할 생각이었거든. 머지않아 침공당할 운명이라면, 먼저 나서는 게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이 섰어.”
“……저도 함께 데리고 가주세요.”
엘리아의 말에 펠릭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럴 순 없어. 나는, 결코 당신을 위험한 곳에 데려가고 싶지 않아.”
“전 언제까지 당신이 무사히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어야 하나요? 저도 분명 도움이 될 수 있어요!”
“엘리아……!”
쩌적.
엘리아의 두 눈동자가 새파랗게 빛나자 펠릭스의 집무실 내부 바닥이 일순간 얼어붙어 버렸다.
“제로석 포션은 이능을 개화시켜 줘요. 황궁까지 가는 여정이, 훨씬 수월해질 거예요.”
그녀가 계속해서 이능을 사용하자 냉기는 그의 책상까지 이어져 곧 사방이 꽝꽝 얼어붙었다.
“…….”
펠릭스는 눈을 내리감은 채 말이 없었다.
“펠, 제가 당신을 따라가도, 가지 않아도 어차피 이 전쟁에서 패배하면 저 역시 무사하지 못할 거예요.”
그의 침묵에 엘리아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제게도, 싸울 기회를 주세요.”
엘리아의 단호한 어조에 펠릭스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잠시간 고민하던 그가 깊은 한숨 끝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약속이 있어.”
“뭔데요?”
“절대, 절대로 위험한 짓은 하지 마.”
“……그럼요.”
천천히 그에게 다가선 엘리아가 너른 품에 안기며 대답했다. 단단한 두 팔이 그녀를 감싸 안았다.
그렇게 개전을 준비하며 엘리아는 내내 제레미의 침실에서 머물렀다. 곧 제레미를 살릴 영약이 만들어질 예정이었다.
‘제국에 가기 전까지 만들어졌으면 좋겠는데.’
그녀는 아이의 말랑한 볼을 살살 쓸어주며 생각했다.
“부르셨어요, 마님.”
곧 무거운 표정을 한 루시와 유리가 방으로 들어와 엘리아 뒤에 공손히 손을 모은 채 섰다.
“……너희에게 한 가지 부탁할 것이 있어서 이렇게 불렀단다.”
“말씀하셔요.”
“모두 이미 들었겠지만, 나 역시 참전할 거란다.”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엘리아는 차분히 제레미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내가 없는 동안 제레미를 잘 지켜보고 내게 서신 한 통만 보내줄 수 있겠니.”
“……그럼요. 당연하죠, 마님! 흐윽, 흑.”
몇 번의 깊은 숨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유리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엘리아에게 와락 안겨 어깨를 꼭 붙잡았다.
“실례일지 몰라도, 흐윽, 안아드리고 싶었어요, 마님……. 부디, 부디 다친 곳 없이 건강하게 돌아오셔요. 흐어어엉!!”
“제레미를 위해서라도, 나는 무사히 돌아올 거란다.”
엘리아가 유리를 토닥여 주자 뒤에 선 루시조차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마님, 마님께선, 제게 특별한 분이세요. 흐으윽. 항상, 항상 그랬어요.”
“고맙구나, 고마워, 유리. 루시도 고맙고, 앤드류도 고마워요.”
“마님, 훌쩍, 집사님께선, 훌쩍, 여기 없는……?”
주변을 둘러보던 유리는 빼꼼히 열린 문 틈 사이 팔로 얼굴을 벅벅 문지르고 있는 앤드류를 발견했다.
“다들, 제레미를 잘 부탁할게.”
엘리아는 잔잔한 미소를 띤 채 사용인들과 짧은 일별을 나누었다.
*** “대공 전하!! 신전의 대주교가 황실 지하 감옥에 잡혀갔다고 합니다!”
“……황실에선 이미 눈치챘겠군. 체이스 로이드는, 지금 어디에 있지?”
“제국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쪽도 움직임이 영 심상치 않습니다.”
“이미 이능으로 사태를 다 파악했겠지.”
그는 이능 하나로 어떤 비밀도 손쉽게 알아낼 수 있을 터였다.
집무실 의자에 앉아 지그시 눈을 내리감은 펠릭스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그의 곁에는 루카스가 제복을 갖춰 입고, 무장을 한 채 서 있었다.
“날이 밝자마자, 작전대로 실행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래.”
“……한 가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말해.”
“왜 하필 지금입니까. 전하께선 항상 큰 욕심이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모함에도 불구하고 순순히 이곳에 정착하셨지 않습니까.”
펠릭스는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그의 잿빛 눈동자가 어느 때보다 더 가라앉아 있었다.
“그랬지. 나만 물러서면 모든 일이 수월하게 흘러갈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 와 싸울 이유가 생기신 겁니까.”
펠릭스의 눈동자 위로 짙은 해무가 만연했다. 그는 한평생 제 뒤를 따르며 충성을 맹세하던 이를 고요히 바라보았다.
“훗날, 제국이 아르티젠을 침공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
“왜, 헛소리 같나?”
루카스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믿기지 않는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루카스는 가슴팍에 손을 올린 채 허리를 숙였다.
“……전하를 믿습니다.”
루카스의 눈빛에는 그를 향한 신뢰감이 가득 차 있었다.
억울하게 물러나야 했던 대공을 보며 그를 아끼는 모든 이들이 아마 이 순간을 꿈꾸어 왔을 것이다.
승산 있는 싸움이다.
부족했던 인적, 물적 자원이 풍부해졌다. 그리고 오랜 수행과 제국에서 치렀던 잦은 전쟁은 북부 기사단의 밑바탕이 되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