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 투둑.
새하얀 눈송이가 창문을 두드리다가, 이내 창틀 위로 슬그머니 내려앉았다.
엘리아는 잠든 제레미의 분홍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제레미.”
그녀의 부름에도 아이는 말이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벌떡 일어나 다 나았다며 환하게 웃어줄 것만 같은데.
“엄마가, 미안해. 제레미 마음 알아주지 못해서, 정말, 정말 미안해…….”
메마른 눈가가 또다시 뜨거워졌다. 엘리아는 아이의 작은 손을 꾹 움켜쥐며 손등 위로 얼굴을 묻었다.
“제레미. 엄마는 북부가 좋았어. 왜냐면, 거기엔…… 이렇게 내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키고 싶은 가족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건 나만 그런 게 아니었나 봐.”
엘리아는 아르티젠 북부에 입성하고 처음으로 보았던, 아주 작고 뼈대가 가녀린 아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집사 뒤에 숨어 잔뜩 경계하던 아이의 뾰족한 눈, 추위에 달아올라 붉어진 뺨, 통통한 입술. 녹음 짙은 두 눈동자로 엘리아를 올려다보는 그 모든 순간까지 전부 다.
회귀 전, 펠릭스와 결혼한 그다음 해 겨울은 엘리아에게 정말 힘겨운 나날이었다.
휘이잉-.
창문이 무섭게도 흔들리던 어느 겨울밤이었다. 벽난로의 열기에도 방 안까지 새어 드는 한기에 추위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 탓인지 잠도 오지 않았다.
엘리아는 두꺼운 외투를 걸친 채 1층으로 내려왔다. 응접실의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밝은 빛이 새어 아직도 누가 있는가 싶어 이끌리듯 들어간 곳에는 제레미가 흔들의자 위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벽난로 앞이라 새하얀 아이의 얼굴이 주홍빛으로 물들어 일렁거렸다.
엘리아는 흔들의자 옆에 있는 소파 위에 앉아 가만히 잠든 아이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천사 같아.’
잠자는 모습이 너무 이뻐 바라보다 어느새 까무룩 잠이 들었고, 인기척에 눈을 떴을 땐 무릎 위에 자그마한 담요가 놓여 있었다.
그 뒤로 들리는 후다닥 뛰어가는 아이의 발걸음 소리 탓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었다.
그런 추억을 떠올리니,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 사실 하나가 있었다.
먼저 손을 내민 사람은, 늘 제레미였다는 것이었다.
“제레미, 나도, 나도 사랑한단다.”
엘리아는 다시금 작은 손바닥 위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몇 번이고 조그만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랑해, 제레미.”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벌컥!
제레미의 침실 문이 열렸다. 황급히 들어선 펠릭스가 어두운 낯빛으로 엘리아와 제레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엘리아는 무너지는 마음을 다잡으며 눈물을 닦아냈다. 그리고 의자에서 일어서 펠릭스 앞에 섰다.
“……오셨어요.”
“엘리아…….”
펠릭스는 엘리아의 창백한 뺨을 조심스러운 손길로 어루만졌다. 그의 눈빛에 걱정과 따스한 애정이 어려 있었다.
“지금까지 말할 수 없었던, 하지만 당신이 꼭 알아야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엘리아는 그의 손을 잡고 제레미의 침대 앞에 나란히 앉았다.
오랜만에 북부에 눈이 날렸다. 펠릭스가 파르르 떨리는 엘리아의 속눈썹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
모든 이야기가 끝났다. 펠릭스는 아내와 잠이 든 것 같은 제 아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엘리아가 했던 모든 행동, 말, 눈빛. 결국엔 그 모든 게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다.
“아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그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함께 북부로 가는 마차 안에서 아이 이야기부터 꺼냈던 게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렇군요. 곧 출정을 떠나시는 건가요?”
그러고 보니, 마을 시찰 후 출정을 떠난다는 사실도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하필 이런 곳에 배를 댈 수 있도록 허용해 달라니,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그 외에도 바바리안의 침입이나 눈사태, 그리고 제로석을 노리는 마물들의 행동까지 잘 알고 있던 엘리아였다.
‘그건 모두 한번 겪어봤기에 할 수 있는 행동들이었어.’
펠릭스는 몇 번이고 마른세수를 반복했다. 누군가 예고도 없이 뒤통수를 세게 후려친 것처럼 얼떨떨하기도 했다.
정말 아무것도 몰랐나,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그렇다고 할 순 없었다. 어렴풋이 엘리아의 눈빛과 행동에서 묘한 이질감을 분명 느꼈으니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통 모르겠군…….”
엘리아의 떨리는 손끝을 바라보며, 펠릭스가 말문을 열었다.
‘제레미는 엘리아와 날 살리려고 시간을 되돌렸고, 엘리아는 우리 모두의 비극을 막기 위해서 다시 나와 결혼을 했다는 말인가.’
펠릭스는 두 손을 얽고, 그 가운데 얼굴을 묻은 채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런 그의 손에 작고 여린 손가락이 닿았다.
“미안해요. 다 잘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이번엔 제가 당신과 제레미를 돕고, 사랑해 주고 싶었어요.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할걸. 그랬다면 지금쯤 제레미도 괜찮았을까요……?”
떨리는 목소리에 펠릭스는 고개를 들었다. 정처 없이 흔들리는 푸른 눈동자가 보였다.
물빛의 커다란 눈동자, 그 속엔 언제나 펠릭스와 제레미가 담겨 있었다.
그는 두 팔을 뻗어 울먹거리는 여인의 작은 몸을 꼭 끌어안았다.
“……제레미가, 당신을 참 많이 좋아했나 보군. 이렇게 무모한 짓을 벌일 정도니 말이야.”
“…….”
“그동안 애썼네, 당신도. 모든 비밀을 떠안고, 혼자 속 많이 끓였을 텐데.”
한참 엘리아의 등을 쓸어주었다. 품에서 울음소리가 새어 나오더니 이내 그녀가 엉엉,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제레미는 괜찮을 거야. 저번에 말하지 않았나? 그 아인 강해. 날 빼닮았으니, 분명 잘 버틸 수 있을 테지.”
“흐윽, 고마, 흑, 고마워요…….”
펠릭스는 엘리아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잡고는 품에서 떼어냈다.
그리고 얼마나 운 건지 퉁퉁 부은 두 눈과 붉게 물든 상앗빛 피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엘리아, 다시 한번 나와 결혼해 줘서 고마워.”
“흑, 흐윽, 흐읍…….”
“이제는 내가 모든 걸 감당할 테니, 당신은 제레미 곁을 지켜.”
펠릭스가 엘리아의 가느다란 금빛 머리카락을 천천히 옆으로 넘기며 말했다.
붉은 입술을 꾹 다문 엘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어, 어떻게, 하게요?”
“……신전이 나를 지지하고 있어.”
“…….”
“그러니 신의 권능은 대주교의 도움을 빌려, 은밀하게 가지고 올 수 있어.”
펠릭스는 고개를 돌려 제레미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그의 바람은 늘 같았다. 부인과 아들이 행복하기를.
그걸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우리라.
끼이익.
펠릭스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엘리아는 얼른 눈물을 훔치고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저, 저도 함께 갈래요.”
“그럴 순 없어, 엘리아. 최대한 빠르게 갔다 올 생각이야. 우리에겐 시간이 없어.”
“……그렇지만…….”
펠릭스의 옷깃을 그러쥔 엘리아가 간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부 제 잘못 같아요.”
“이건, 당신 잘못이 아니야.”
그는 제 옷깃을 꽉 움켜쥐다 못해 하얗게 질린 손을 잡아주었다.
“우리 가족 중 그 누구도 잘못한 사람은 없어, 엘리아.”
“…….”
“우린 가족을, 우리의 보금자리를 지키고 싶을 뿐이었잖아.”
그 하나를 위해 척박한 북부에서 10년을 악착같이 버텨 왔다.
그건 다시 북부로 되돌아온 그녀도, 시간을 되돌린 아이도 마찬가지였을 터였다.
펠릭스는 지그시 눈꺼풀을 감았다가 떴다.
“실패하더라도 당신이 저를 지켜줄 거라 믿었어요.”
흔들리는 다리 중간에서 올곧은 표정으로 믿음을 드러내던 엘리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제 그 믿음이 옳았음을 보여줄 때였다.
“다녀올게.”
그 말을 끝으로 펠릭스는 서둘러 뒤돌아섰다.
“무사히, 무사히만 돌아와 주세요…….”
* * *
“방금 대공님께서 기사단과 함께 제국행 선박에 오르셨습니다.”
앤드류는 평소와 다르게 한없이 진지했다.
“……무사히 돌아오겠죠?”
“강한 분이시니, 무탈하게 돌아오실 겁니다. 그보단 도련님께서 잘 버틸 수 있으실지…….”
“버텨낼 수 있을 거예요.”
주먹을 꾹, 말아 쥔 엘리아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네! 대공님도, 도련님도 두 분 다 무사하실 겁니다!”
앤드류가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소리쳤다.
“고마워요, 앤드류.”
“별말씀을요. 기운 내세요, 마님.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앤드류는 꾸벅 허리 숙여 인사를 마친 후,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 그날 정오 무렵, 제레미와 단둘이 있던 엘리아는 한동안 쓰지 않았던 이능을 펼쳤다.
펑펑 흩날리던 눈발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어 사라졌다. 어둑하게 하늘을 가렸던 구름이 걷히니, 밝은 태양이 하늘 높이 떠올라 북부를 비추었다.
엘리아는 작은 창을 활짝 열어젖혔다.
“……제레미. 기억나니? 엄마가 처음으로 네게 보여줬던 봄이 이랬잖아. 제레미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 같다고 해줬었는데.”
침대 머리맡에 자리를 잡고 앉은 엘리아가 제레미의 새하얀 뺨을 한번 쓸었다.
“그때만 해도, 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녀가 고개를 숙여 아이의 뺨 위로 짧게 입을 맞추었다.
“어쩌지? 제레미 없으면, 엄마가 엄청 힘들 것 같은데. 우리 착한 제레미가, 아버지 올 때까지 조금만, 아주 조금만 기다려 줄래?”
열린 창으로 따스하고 몽실한 바람이 불었다. 고개를 든 엘리아는 이불을 정돈해 주다 다소곳이 배 위에 놓여 있는 아이의 손을 보게 되었다.
“……!”
작은 이파리 같던 손이, 아직 너무나 어리고 소중한 그 손이, 살짝 투명해져 있었다.
“제레미, 너, 손이…….”
안 돼, 제발, 조금만 버텨줘. 조금만 기다려 줘.
엘리아는 또다시 목이 메는 느낌에 이를 악문 채 고개를 숙였다.
우리에게 시간을 달라고, 데려가려면 차라리 나를 데려가 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