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가 시간을 되돌려 주겠다고 선택한 당사자는 기억을 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깨달았다.
“너, 앞으로 다시는 이능 사용하지 마. 알겠어?”
샤미르의 경고를 들었던 건지, 원래도 그다지 시간이나 어떤 특정한 일들에 미련이 없던 건지, 그는 그날 이후로 이능을 사용하지 않는 것 같았다.
* * *
“제레미 님, 이번 여름 방학에 장미 축제가 열린대요! 저랑 같이 가주…….”
은색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묶은 여자아이가 두 뺨을 붉히며 제레미에게 물었다. 뒤에서는 그녀의 친구들이 잔뜩 기대하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레미는 제법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그 탓에 함께 있던 샤미르 역시 덩달아 여자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관심 없어. 그보다, 다들 왜 길을 막고 있는 거야?”
훠이, 훠이.
제레미가 여자아이의 말을 끊으며 손짓하자 얼굴을 붉힌 여자아이는 눈가마저 벌게진 채로 돌아섰다.
“……왜, 또 어머니 만나러 가게?”
“응. 가야지.”
“어머니가 그렇게 좋아?”
“모두에게 상냥하고 아름다운 분이셔.”
“흐응, 궁금하네.”
제레미와 함께 교정을 거닐며 샤미르가 중얼거렸다. 그날따라 여름 초입의 햇살이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게 두 사람을 비추었다.
“기회가 되면 한번 소개해 줄게. 너처럼 웃는 게 굉장히 아름다운 분이셔.”
어머니를 이야기하는 그의 얼굴에 어느새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쿵, 쿵, 쿵.
“…….”
그날 처음으로, 샤미르는 친우이자 동생 같았던 제레미를 보며 심장이 뛰었다.
* * *
샤미르가 아카데미 소속 연구원으로 큰 성과를 이룬 건 스물하나가 되었을 무렵 즈음이었다.
왜 북부의 마물들은 설산에만 머무는가, 아버지가 가졌던 의문을 샤미르가 대신 조사해 논문을 발표하고자 했다.
그렇게 그녀를 호위해 줄 용병 길드를 고용하여 간 얼음 동굴에서 마나를 채워주는 광물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녀는 그 광물의 이름을 제로석이라 짓고, 그 뜻을 아무에게도 말해주지 않았다.
제로석 연구로 3년 내내 바쁜 일과를 보내며 제레미와의 교류마저도 뜸해졌을 무렵, 제국에는 북부를 침공하겠다는 황제의 총동원령이 선포되었다.
북부가 반란을 도모했다는 이유에서였다.
*** ‘반란? 반란이라니?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샤미르는 미친 듯이 제레미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이미 그는 제국을 벗어나 북부로 향한 직후였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전쟁을 둘러싼 이야기는 무수히도 많았다. 그중에서 유독 샤미르의 귀에 박히는 소문이 있었다.
황제가 제로석으로 부유해지는 북부를 경계하고 그 가치를 깨달으면서 모든 것을 가져가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전쟁이 끝날 무렵, 황제는 끝까지 저항한 대공을 죽이고 폐위시켰다. 그리고 그의 아들, 제레미의 행방이 묘연하자 수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게 샤미르가 스물넷이 되던 해 겨울이었다.
그녀는 짐을 챙겨 무작정 제레미를 찾아 나섰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제로석을 최초로 발견한 건 바로 나잖아. 이건 내 책임도 있는 일이야.’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리고 그가 어딨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고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은 거라면, 혹시 몰라. 거기에 있을지도…….’
제레미와 북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어린 시절 조부모와 함께 머물던 집의 위치를 말해준 적이 있었다.
그곳은 눈사태로 인해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다치거나 목숨의 위협을 느껴 다른 곳으로 이주해서 비어버린 곳이었다.
운 좋게도 자신의 집만큼은 지금도 온전하다고 말해주었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막 전쟁이 끝난 아르티젠 북부는 황실의 허가 없이는 방문이 불가했다.
당시 샤미르는 제로석을 최초로 발견한 연구자로 유명하여, 연구 명목으로 통행을 겨우 허락받을 수 있었다.
‘제레미…….’
제레미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황실 기사단의 호위를 받으며 선박에 오르는 동안 샤미르는 두 손을 꾹 움켜쥔 채 숨을 골랐다.
부우웅-.
뱃고동 소리가 아슬하게 울리는 선착장 너머, 저 멀리 새하얗게 눈이 뒤덮여 빛나는 섬 하나가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대로 제레미는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몰골은 엉망이었다. 핏기 하나 없는 얼굴, 단정하지 못한 분홍 머리카락, 풀어 헤쳐진 셔츠. 축축한 마룻바닥에 주저앉은 그가, 정말 기적처럼 그곳에 있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아 관리가 전혀 되지 않은 그곳은 여기저기 찬 바람이 스며들고 있었다.
내부로 들어선 그녀는 천천히 제레미에게로 걸어가 그 앞에 섰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
“어머니도, 어머니도 날 지키려다가…….”
그의 몸은 마치 시체처럼 온기 한 자락 남아 있지 않았다. 곧 죽을 사람 같았다.
너무 미안해서, 그래서 샤미르는 천천히 제레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제레미. 시간을 되돌리자. 가족을, 북부를 지키는 거야.”
초점이 없던 제레미의 눈동자 위로 이채가 돌았다.
“내가 도와줄게. 그러니까 다시, 다시 일어서 보자.”
샤미르는 그때 굳은 다짐을 했다.
자신으로 인해 어긋난 모든 것을 모두 제자리로 돌려놓겠다고. 잃어버린 제레미의 환한 미소를 꼭 돌려주고 싶었다.
* * *
제레미와 제일 처음으로 한 일은, 집에 불을 피우는 일이었다.
내내 먹지 못한 탓인지 제레미는 곧 쓰러질 듯 힘이 없어 보였다. 마른 나뭇가지를 꺾어 불쏘시개로 사용하고, 끼니는 대충 제국에서 가져온 것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샤미르는 제레미를 위해 식량뿐만 아니라 그의 마나를 충만하게 채워줄 제로석을 구하기 위해 제국과 북부를 활발히 왕래했다.
퀭하던 제레미는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활기를 되찾았다.
그렇게 무섭도록 춥던 12월이 지나고, 샤미르는 매일매일 제레미에게 포션을 먹였다. 그리고 1월 1일, 모든 준비가 끝났다.
“제레미, 기억해. 내가 스물하나였던 그때로 시간을 되돌리는 거야. 알겠지? 3년을 되돌리면 마나가 다 소진되면서 생명력이 많이 닳을 거야.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어떻게 해서든, 복구할 방법 찾아볼게.”
샤미르의 말에 제레미는 잠시 픽, 실소를 터뜨렸다.
“3년을 되돌린다고, 뭐가 달라질까.”
“뭐? 그게 무슨 말이야?”
“……마지막에, 나 대신 검에 찔린 어머니는 대체 무슨 생각이셨을까. 늘 그렇게 북부의 추위에 몸져눕고, 아버지의 냉대에 침울해하셨으면서. 물론 거기에 나도 한몫하긴 했지만.”
힘없이 웃는 제레미의 얼굴이 보였다. 해가 지나는 동안 한 번도 어머니의 이야기를 입에 담지 않던 그였다.
제레미는 지독히도 힘겨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들었어. 어머니는, 북부가 좋았을까. 북부에 오지 않았더라면…….”
“제레미. 더 이상은 안 돼!”
샤미르는 무서운 생각이 들어 얼른 제레미의 말을 멈추었다.
“네가 돌릴 수 있는 시간, 딱 3년이야. 더 돌리면? 생명력이 깎이다 못해 너란 존재 자체가 없어질 수도 있어. 그거 알아? 생명력이 깎이면, 뼛가루도 안 남아. 그냥 너란 존재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거라고!”
“…….”
“그래. 체내 마나량이 많아서 시간을 돌린 후에도 괜찮을 수 있다고 치자, 그럼 그 뒤는? 넌 평생 불안해하면서 살아야 해. 언제 사라질지 몰라서, 불안에 떨어야 한다고.”
샤미르의 걱정 어린 이야기에 제레미는 그녀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너는, 아직도 내가 열다섯 먹은 어린애로 보여?”
나직한 제레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살짝 시야를 가린 샤미르의 갈색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부드럽고 커다란 손이었다.
“괜찮아. 내 생명력 복구해 주려고 애쓰지 않아도 돼.”
“……무슨 생각 하는 거야. 안 돼! 그러지 마. 그러기만 해. 너 다시는 안 볼 거야.”
주먹을 꾹 움켜쥔 샤미르가 결국 고개를 숙였다. 눈앞이 자꾸만 흐려지는 탓이었다.
“고마워. 도와줘서.”
제레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샤미르의 마음을 자꾸만 뒤흔들었다.
툭, 투둑.
여태껏 참고 있던 눈물이 흘렀다.
“제레미, 너 평소랑 달라. 알아?”
“……그래? 어떻게 다른데?”
“맨날 표정 없던 애가 히죽거리고, 고맙다고 하고, 핀잔만 주더니 이젠 괜찮다고 하고.”
제레미는 우는 샤미르를 말없이 꼭 끌어안아 주었다. 토닥이는 그의 손길이 정말 마지막 같아서, 마음이 미어지도록 아팠다.
“제레미, 이거 하나만 약속하자.”
“뭔데?”
“내가, 생명력 복구하는 방법 찾아내서, 하, 너 살리면…….”
“응.”
“그러면, 너 나한테 줄래?”
꾹꾹, 눈물을 닦아내며 말을 이었다. 제레미의 눈이 놀라 커졌다. 그는 곧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샤미르와 눈을 맞추었다.
“……그래. 그러자. 그럴게.”
제레미는 샤미르의 눈꼬리 끝에 매달린 눈물을 닦아주며 미소를 지었다.
그게, 그날 밤의 추억이, 샤미르가 제레미의 손을 잡고 떠올린 마지막 정보였다.
* * *
샤미르의 말을 듣는 내내 엘리아의 얼굴은 온통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랬구나, 그랬던 거구나.
“제레미가 쓰러진 건, 이미 생명력이 다다른 상태에서 또다시 시간을 되돌렸기 때문이에요. 곧 신체가 버티지 못하고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할 거예요.”
“……맙소사.”
탄식과도 같은 말을 흘리며 엘리아는 지그시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눈물이 엘리아의 양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스물하나에 제가 제로석을 발견하고, 아카데미에선 계속해서 황제의 마나 통을 되살리기 위한 연구에 착수했어요. 그러다가 이 제로석으로, 생명력 또한 복구할 방법을 찾아냈죠.”
“……!”
“원래 제로석의 성분은 마나를 회복시키는 게 다예요. 하지만 여기에 신의 권능이라는 조각을 섞게 되면 생명력을 복구할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어요. 그런데, 몇 가지 문제점이 있었죠.”
“……뭔데?”
샤미르의 연갈색 눈동자는 한 치의 흔들림이 없었다.
“신의 권능 조각이 제로석의 포션과 잘 섞이지 않았어요. 마치 물과 기름처럼 따로 놀았죠. 제가 엘리아 님께 제로석을 받아 북부에서 계속해서 실험을 지속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어요.”
“……!”
“그래도 다행히, 대공님과 함께 얼음 동굴에 갔다가 그 방법을 알아냈어요. 알고 보니, 제로석이 신성한 기운이 담긴 얼음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던 거였어요. 이제 신의 권능 조각만 있으면 제레미, 살릴 수 있어요.”
샤미르는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서 엘리아 앞에 섰다. 엘리아의 앉은키만 한 아이가 이렇듯 어른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샤미르는 아직도 덜덜 떨리는 엘리아의 두 손을 꾹 움켜쥐었다.
“신의 권능이라 불리는 조각이 제국에 있어요. 정확히 말하면, 신전에요. 엘리아 님. 이건 다 같이 헤쳐 나가야 할 문제예요. 저흰 시간이 없어요.”
“…….”
“제레미, 살려야죠.”
*** 엘리아는 죽은 듯이 잠든 제레미 곁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예상대로 의원은 병명을 알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성내 사람들은 침울한 표정으로 그저 주어진 일들을 묵묵히 해나갈 뿐이었다.
아침이 밝아도 북부는 어두웠다. 엘리아가 이능을 쓰지 않은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