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화 (94/107)
  • 펠릭스는 마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의 생애에 다시 없을, 굴욕적인 순간이었다.

    “……친애하는 형님의 진정성을 봐서라도, 면회 정돈 수락해 드리지요. 아! 아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물으셨죠? 제가 원하는 건 늘 같았습니다. 바로, 형님의 불행이지요.”

    체이스는 무릎 꿇은 펠릭스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재미가 없네요. 그만 일어서 보겠습니다. 부디, 좋은 하루 보내시길.”

    체이스가 흥얼거리며 느긋한 발걸음을 옮겼다. 펠릭스의 몸이 분노로 덜덜 떨렸다.

    으드득-.

    그는 엘리아와 제레미가 행복하기를, 북부가 제국의 도움 없이도 나날이 성장하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그것조차도 내겐 욕심인 건가.’

    그렇다면, 그것조차 내게 허용되지 않은 바람이라면, 바로 내가 모든 권력 위에 서리라.

    황제와 황태자 모두 황좌에서 반드시 끌어내리고 마리라.

    마음을 굳힌 펠릭스는 알현실의 육중한 문을 열어젖혔다.

    밖에서 대기 중이었던 기사들이 펠릭스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카타미아 왕국에 지원을 요청해라. 그리고 북부 기사단을 모조리 집합시켜. 바바리안족에게도 연락해라.”

    “명에 따르겠습니다.”

    일부 기사가 황궁 복도를 급히 빠져나갔다.

    ‘가만히 앉아서 당신을 잃을 순 없어. 그러니 싸워야겠지. 그 끝이 자멸일지라도.’

    쿵, 쿵쿵. 심장이 뛰었다.

    숱한 전쟁을 치렀지만, 그 순간이 다가올 때면 늘 발밑에 절벽이 있는 것처럼 등줄기가 서늘했다.

    “……싸울 생각이십니까, 전하.”

    “그래, 제국을 상대하려니 두렵나.”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두려움 따위는 없습니다. 이미 저희는 몇 번이나 전하께 목숨을 빚졌습니다. 전하를 위해 싸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 영광입니다.”

    루카스가 이내 그의 앞에 서서 가슴팍에 손을 올린 채 허리를 숙였다.

    “…….”

    “북부 기사단 전부가 이 순간을 기다려 왔습니다. 북부의 힘을 모두에게 보여주겠습니다.”

    펠릭스는 확신에 찬 루카스의 표정을 보았다. 그제야 깨닫는 것이 있었다.

    ‘그래. 어쩌면 이 전쟁은 자멸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될 수도 있겠구나.’

    루카스에게서 시선을 거둔 펠릭스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 뒤를 북부 기사단이 묵묵히 따랐다.

    * * *

    대공비가 공녀를 살해했다.

    이 소식은 제국과 북부 사이에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럴 리가, 그럴 리 없어. 그 선량한 마님께서 사람을 다치게 한 것도 아니고, 살해라니? 이건 분명 무슨 음모가 있는 거야!”

    패닉에 빠진 유리가 제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소리쳤다. 그녀 주위를 둘러싼 하녀들 모두 마찬가지의 반응이었다.

    “그래. 우리 마님께선, 그런 분이 아니셨잖아. 우리가 아프다고 하면 항상 먼저 찾아와 살펴주셨던 분이잖아.”

    “맞어, 그 여린 분이 그럴 리가 없어.”

    “그래, 뭔가 수상해.”

    늦은 밤 사용인들은 마님의 소식에 모두 당황하고 있었다. 마님 걱정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그들은 누군가 주방 앞에 서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 벌컥!

    “히익! 뭐야!”

    “누구야?”

    갑자기 열린 문에 몰려 있던 하인들이 일순간 몸을 굳혔다.

    “……도련님?”

    유리는 시선을 내려 잔뜩 울상을 짓고 있는 제레미를 바라보았다.

    “흐끅, 흑, 어, 엄마…… 흐어어어엉!!”

    훌쩍이기 시작한 제레미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우왕좌왕하던 하녀들이 제레미 주변으로 모여 무릎을 굽혔다.

    “도련님, 도련님, 그게 아니라 마님께선 감옥이 아니라…….”

    “다, 다, 다 들어써! 제레미 바보 아냐! 으아아앙!”

    목 놓아 우는 제레미를 모두가 어찌하지 못하고 바라보았다. 한참을 유리가 제레미를 안고 달래주어도 아이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웅성거리는 소리에 샤미르도 졸음이 가득한 눈을 비비며 1층으로 내려왔다.

    “엄마!! 엄마!! 흐어엉!”

    서류 정리를 하던 앤드류 또한 급히 내려와 제레미를 달래기 위해 노력했다.

    그 모습에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던 샤미르가 제레미 옆에 섰다.

    “제레미.”

    “흐아아앙!”

    “엘리아 님 보고 싶어?”

    “……흐윽, 흑, 훌쩍, 훌쩍.”

    서럽게 울던 제레미가 눈물을 닦아내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샤미르는 잠시 한숨을 내쉬며 고민하더니 아이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여기서 이래봤자 소용없어. 대공님께 가봐.”

    “아버지?”

    “……그래, 대공님 말이야.”

    샤미르의 귓속말에 제레미는 소매 위로 코를 문지르더니, 앤드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아부지한테 갈래.”

    “……대공 전하께, 전갈을 보내겠습니다.”

    녹안에 차오르는 물기에, 망설이던 앤드류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 * *

    투옥된 지 3일이 흘렀다. 그동안 엘리아는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몸을 웅크리고 앉아 끊임없이 현재 벌어진 일들을 생각했다.

    ‘펠은, 지금쯤 내가 로렌츠 영애를 정말 살해했다고 생각하고 있으려나.’

    현장에서 구속당했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냐, 펠릭스는 날 믿을 거야.’

    엘리아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부정적인 생각을 몰아냈다.

    내내 숙이고 있었던 고개를 들었다. 쇠창살 사이사이로 끈끈한 거미줄이 타원 모양으로 넓게 이어져 있었다.

    그 끝에 커다란 거미와 작은 거미가 얇고 가는 실타래를 타고 움직이고 있었다.

    이내 작은 거미가 커다란 거미의 등에 올랐다.

    ‘제레미가 많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울먹이며 가지 말라 소리치던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콧잔등이 절로 찡그려지고, 숨이 가빠 왔다.

    “제레미, 제레미…….”

    미안해. 엄마가, 엄마가 너무 미안해.

    내내 울었던 터라 눈물이 다 말라 버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흐윽, 제레미…….”

    엘리아가 두 손 위에 얼굴을 묻었다.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되돌아와도 결국은 제자리였다. 자신이 더 망쳐 버린 것 같은 죄책감에 엘리아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엄마는 여기 있어요?”

    환청과 같은 제레미의 목소리에 엘리아가 곧바로 고개를 들었다.

    뿌연 시야에 펠릭스와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제레미가 보였다.

    “펠……? 제레미……!”

    엘리아는 녹이 슨 쇠창살을 떨리는 두 손으로 붙잡은 채 뚝뚝, 눈물을 떨구었다. 그런 그녀를 보게 된 제레미가 펠릭스의 품에서 마구 발버둥 쳤다.

    보다 못한 펠릭스가 아이를 내려주었다. 제레미는 두 볼이 상기된 채 달려와 쇠창살을 붙잡았다.

    “어, 엄마…….”

    철컥, 철컥, 철컥!

    아이가 힘을 주어 쇠창살을 앞뒤로 흔들어댔다. 이미 오랜 시간 부식된 탓인지 삐걱거리는 소리가 크게 내부를 울렸다.

    “빠, 빨리 나와요. 여긴 너무 춥고 더러운데…….”

    “……제레미.”

    엘리아는 터지려는 울음을 꾹 참고 제레미의 잎사귀만 한 작은 손을 잡아주었다.

    아이의 두 눈동자 위로 물기가 어렸다.

    “크흠. 우리 제레미, 엄마가,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해. 흐읍, 그게 좀 시간이 걸릴 것 같네? 우리 놀러 가기로 했지? 그것도 조금만 미뤄야 할 것 같아…….”

    “제레미두 알아! 여긴 감옥이자나! 감옥은 나쁜 사람만 가는 거잖아! 흐어엉, 엄마가 얼마나 착한데……. 아버지. 빨리 꺼내줘요, 네?”

    엘리아의 머리 위로 엉엉 우는 제레미의 목소리가 들렸다.

    “…….”

    펠릭스가 제레미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맞닿은 엘리아와 제레미 손 위로 제 손을 얹었다. 그리곤 제레미의 들썩이는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펠…… 미안해요. 하지만 저는 정말, 정말 로렌츠 영애를…….”

    “알아. 엘리아.”

    “흑, 펠…….”

    낮고 건조한 펠릭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거칠게 뛰던 심장이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불안이 점차 가라앉았다.

    “예쁜 얼굴 다 상하겠어.”

    “…….”

    아이를 달래던 펠릭스의 손이 쇠창살 사이로 들어와 엘리아의 볼을 부드럽게 훑고 지나갔다.

    ‘아, 아아…….’

    엘리아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숙였다.

    ‘당신은 한 치의 의심도 없었군요.’

    후두둑.

    엘리아의 뜨거운 눈물이 차가운 바닥을 적셨다.

    * * *

    그로부터 열흘 후, 재판이 열렸다.

    치열한 공방 따윈 없었다. 이미 결과는 정해졌기 때문에 재판은 어느 때보다 빠르고 간결하게 진행되었다.

    증인도, 증거도 모두 엘리아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죄수 번호 600213. 로렌츠 공작 가문의 장녀, 이사벨라 로렌츠를 살해한 죄로 공개 참수형에 처한다.”

    재판이 끝나고, 엘리아가 포승줄에 묶인 상태로 뒷문으로 끌려 나갔다.

    웅성웅성, 재판이 끝나자 이를 지켜보고 있던 귀족들이 결과를 두고 수군대기 시작했다.

    “그럼 정말 대공비가 공녀를 살해했다는 소리오?”

    “당신도 들었잖아요. 그렇다고. 쯧쯧, 역시 저주받은 대공의 아내라니까요.”

    “첫 번째 부인은 요절에, 두 번째 부인은 도망가서 행방이 묘연하다죠? 세 번째 부인은 살인죄로 참수된다니……. 북부도 참, 쯧쯧쯧.”

    콰앙!

    순간, 목제 테이블을 거세게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로브로 얼굴을 가린 펠릭스가 제 뒤에서 감히 함부로 입을 놀리는 귀족들을 싸늘한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그 눈빛에 겁먹은 귀족들이 어깨를 움츠린 채 연신 헛기침을 하더니 서둘러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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