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3화 (93/107)
  • 뚜벅, 뚜벅, 뚜벅-.

    그가 미련 없이 뒤돌며 기사들을 향해 명령했다.

    황실 기사단이 북부 기사단을 밀치고 들어서 엘리아의 양팔을 붙잡고 밖으로 끌고 나왔다.

    명확하게 보이는 살인 사건 앞에 북부 기사단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길을 내어주고 말았다.

    정신없이 끌려 나가던 엘리아가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마님!”

    북부 기사단이 다시 달려들었으나 차마 검을 뽑아 들지는 못했다.

    “더 이상 다가오면 공무 집행 방해로 체포하겠다. 물러서라!”

    황실 기사단은 빠르게 쓰러진 그녀를 마차에 싣고 이동했다.

    의식을 잃은 와중에도 이사벨라의 가슴에 검이 박히던 느낌이 손바닥에 그대로 남아 있는 듯 엘리아는 간헐적으로 몸을 떨고 있었다.

    * * *

    모든 일은 속전속결로 이루어졌다. 항구에 정박해 있던 황실의 선박이 엘리아를 싣고 제국으로 향했다.

    대공비에 대한 처분을 북부에 맡길 수는 없다는 황태자의 단호한 결정 때문이었다.

    이동 중인 선박 안에서 눈을 뜬 엘리아는 몇 번이고 치미는 토기를 참을 수 없었다.

    눈을 감을 때마다 이사벨라의 손길과 살려 달라는 눈빛이 몇 번이고 떠오른 탓이었다.

    철그럭, 철그럭.

    쇠사슬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의 잠금장치를 풀고 있는 모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고, 황태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홀로 방 안에 들어온 그의 입가엔 가증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제 공연은 어땠습니까. 부인의 마음에 쏙 들던가요?”

    “……로렌츠 영애는, 영애는 전하의 친우가 아니셨습니까?”

    엘리아의 물음에 하하, 허리를 굽히며 웃음을 터뜨린 황태자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하하하, 진짜, 멍청한 질문이 따로 없네.”

    “…….”

    “이리 순진하시니, 저처럼 못돼먹은 놈에게 놀아나는 것이 아닙니까. 쯧쯧.”

    혀를 차던 황태자가 한 걸음 엘리아에게 다가섰다. 그녀는 피로 온몸이 얼룩져 엉망이었다. 금빛 머리카락에는 핏물이 잔뜩 엉겨 붙었고, 얼굴과 손, 드레스 곳곳에는 핏자국이 가득했다.

    그가 엘리아의 턱을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엘리아는 이미 두 손이 결박당한 터라 차마 이를 거부할 수 없었다.

    “으윽.”

    엘리아의 턱을 움켜쥔 손의 힘이 과격했다. 절로 신음이 새어 나올 정도였다.

    “일을 이 지경까지 몰고 온 건 바로 너야, 엘리아 로이드. 펠릭스를 그저 한낱 쓰기 쉬운 도구로 남겨뒀어야지. 그래야 우리가 이용하다가 지금보단 천천히 망가뜨리지 않았겠어?”

    “그를 망가트리기 위해 일부러 이런 일을 계획했었단 말이에요?”

    “그래. 참 일찍도 알아차렸네. 북부도, 펠릭스도 이제 끝이라고.”

    웃음 띤 황태자의 얼굴이 어느 때보다 잔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먹잇감을 앞둔 구렁이가 연신 혀를 날름거리는 기분이었다.

    “……후회하실 겁니다.”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러지 않고선 북받치는 감정에 지금 이대로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후회? 잘 들어요. 대공비. 후회는, 이미 릴리가 죽었을 때 충분히 했어. 그런 내 앞에서 후회? 후회라고?”

    잔뜩 목소리를 낮춘 그가 엘리아의 턱을 놓고 붉은 핏물을 머금은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흐윽!”

    머리카락이 뜯기는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은 이미 광기에 사로잡혀 섬뜩했다.

    “펠릭스 로이드는 황제의 개처럼 납작 엎드리고 있어야 했어. 알아들어? 평생을 그렇게 살다가, 마침내 내 손에 모든 걸 빼앗겨야 했다고!”

    “윽!”

    “북부가 크면, 그 새끼에게 날개까지 달리는 셈이지. 응? 그렇게 되면 아무도 말릴 수가 없다고. 내가 그걸 몰라?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내가 가만히 보고만 있을까?”

    황태자는 연신 엘리아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채 악을 썼다. 고통에 절로 눈앞이 흐렸다. 엘리아는 울지 않기 위해 여린 볼살을 깨물었다.

    “……그냥, 전 대공비는 핑계, 핑계에 불과했군요.”

    *** “뭐……?”

    “그렇잖아요. 그녀도 사랑하는 사람을 누군가 이렇게 처참히 짓밟는 걸 원치 않았을 거예요. 하아, 근데 봐요. 당신은, 정말 그녀가 원하는 걸 행하는 중인…… 아악!”

    황태자가 엘리아의 머리카락을 쥐고 흔들더니 침대 쪽으로 휙 던져 버렸다. 그에 엘리아의 몸도 그쪽으로 밀쳐졌다.

    “릴리는, 제레미를 낳다가 죽었어. 그 말이 무슨 뜻인 줄 알아? 아이만 포기했어도 릴리는 살 수 있었다는 말이야. 펠릭스 로이드는, 살인자라고.”

    “……아니에요. 펠릭스가 아니라 그녀가 원한 거예요. 엄마의 마음은 다 그런 거니까. 그저 아이가 더 소중하니 아이를 살려 달라고 했을 거라고요.”

    “…….”

    “당신도 이미 알고 있지 않나요?”

    엘리아의 외침에 황태자는 말이 없었다. 엘리아는 욱신거리는 머리에도 상체를 일으켜 세워 고개 숙인 황태자를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전하께선 그저 두려운 거예요. 펠이, 그 사람이, 당신 자리를 위협할까 봐……!”

    황태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 위로 붉은 기운이 스치며 청회색 눈동자가 순식간에 일렁이듯이 타올랐다.

    황태자의 마나가 요동치고 있는 듯했다.

    끼이익-!

    침대의 낡은 스프링이 우는 소리가 거세게 들렸다.

    “커헉, 컥!”

    체이스는 엘리아의 가녀린 목덜미를 한 손으로 꽉, 움켜쥔 채 그녀를 침대 위에 눕혔다.

    “……엘리아 로이드. 이건 마지막 기회였어. 알아? 고분고분 있었다면, 그래. 한동안 가두었다가 추후 신분을 교체해 정부로 들였을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계획을 바꿨어.”

    “끄윽, 흑…….”

    “엘리아 로이드는 사형될 거야. 그 모습을 보면 펠릭스 로이드는 좌절하겠지.”

    “끄윽!”

    “무너지는 그 모습, 아주 재미있지 않겠나?”

    목을 조여 오는 힘에 엘리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꺽꺽 소리만 나오며 의식이 희미해지려 했다.

    “쿨럭, 쿨럭, 쿨럭!”

    그제서야 황태자가 손에 힘을 풀어 겨우 숨을 내쉴 수 있었다.

    탁탁.

    황태자는 제복에 묻은 먼지를 몇 번 털어내더니 휙, 몸을 돌렸다.

    벌컥, 쾅!

    요란한 문소리와 함께 황태자가 나가고 엘리아는 낡은 침대 위에 몸을 옹송그렸다.

    눈물이 차올랐다가 떨어지길 반복했다.

    “미안, 미안해요…….”

    엘리아가 메마른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방 안에는 한동안 울음소리만이 가득했다.

    * * *

    “전하! 큰일 났습니다! 비 전하께서 로렌츠 영애를 살해한 혐의로 구속되었습니다!”

    “……?!”

    “황태자 전하가 직접 비 전하를 감옥까지 압송하셨습니다.”

    다급히 황실 별채까지 달려온 북부 기사 중 한 명이 펠릭스에게 소식을 전달했다.

    “……엘리아가 황태자와 귀족을 만나러 갔었나?”

    청천벽력 같은 말에 펠릭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네, 그렇습니다.”

    “서신은 받지 못했고?”

    “……출발 전까지 북부에는 어떠한 서신도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몇 번의 마른세수와 깊은 심호흡이 이어졌다.

    “당장 황태자에게 면담을 요청해.”

    “그러겠습니다!”

    문 쪽에서 대기 중이던 루카스가 함께 움직였다.

    콰앙!

    펠릭스가 테이블 위를 거세게 내리치며 숨을 골랐다.

    ‘황태자와 엘리아를 함께 두면 안 됐어…….’

    공작 영애 살해 혐의.

    황태자의 의도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엘리아는 사형당할 수도, 평생 옥살이를 할 수도 있었다.

    펠릭스는 이를 으득, 깨물면서도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했다.

    “엘리아…….”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텅 비어버린 방 안에 울렸다.

    엘리아가 감옥에서 버틸 수나 있을까. 그 가녀린 사람이.

    불안한 마음에 펠릭스는 한동안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며 서성였다. 어쨌든 가장 큰 문제는 엘리아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때마침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전하께서, 대면을 허락하셨습니다.”

    웃는 낯으로 언제나 그의 뒤통수를 호시탐탐 노리던 체이스 로이드의 얼굴이 떠올랐다.

    쾅!! 와장창!

    큰 반동에 테이블 위에 있던 모든 찻잔과 디저트 접시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당신의 길은 늘 순탄하기만을 바랐는데, 당신을 욕심낸 게 잘못이었을까.

    투둑, 툭.

    황궁 별채의 너른 창을 빗방울이 하나, 둘 두들겨 대고 있었다.

    쏴아아-.

    이내 무수히 많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알현실에 들어서는 펠릭스의 뒤를 기사들이 따랐다.

    “어디까지 하려고?”

    맞은편에 앉자마자 묻는 펠릭스의 모습에 황태자가 픽, 능글맞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뭐 이제 시작인데 벌써 그러시면 어떡합니까. 형님.”

    “……!”

    “후후, 많이 애가 타시기는 하는가 봅니다. 하긴, 그렇지 않았다면 막 황궁으로 입성한 아우를 불러내 다짜고짜 캐묻진 않겠지요.”

    “말장난할 생각 없다. 바라는 게 뭐지?”

    “하. 형님. 아직도 상황 판단이 안 되시는 겁니까? 그리 거만한 태도로 질문만 할 것이 아니라, 최소한 무릎을 꿇는 성의라도 보여야 하지 않겠어요?”

    “…….”

    펠릭스의 날카로운 눈빛에 황태자가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으득, 급기야 펠릭스가 볼 한쪽이 움푹 파일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눈썹이 사선으로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선 스멀스멀 냉기가 내뿜어졌다.

    드르륵.

    펠릭스가 아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게 무릎을 꿇는다고, 뭐가 달라질 거란 생각은 도저히 들지 않아.”

    “그래서, 시도조차 안 하겠다?”

    빈정거리는 황태자의 말에 펠릭스가 손이 새하얗게 질릴 때까지 불끈 주먹을 쥐었다.

    “…….”

    마침내 펠릭스가 그 자리에서 무너지듯 한쪽 무릎을 굽혔다. 그러자, 위에서 끅끅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크흐흐. 아아, 정말 여자 하나 때문에 천하의 전쟁 영웅이 무릎을 꿇다니. 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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